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87. 헬렌 켈러의 다음 생

기자명 김정빈

“사흘만 볼 수 있다면 선생님 모습을 마음에 간직”

시청각 장애인 된 헬렌 켈러
설리번 도움으로 학업 시작
여성 참정권 위한 투쟁 참여

대상물 손으로 파악 함에도
고통 흔적 전혀 보이지 않고
죽음 두려움도 느끼지 않아

그림=근호
그림=근호

눈과 귀가 안 보이고 언어를 제대로 발음할 수 없던 헬렌 켈러(Helen A. Keller, 1880~1968)는 처음부터 시청각 장애인은 아니었다. 그녀는 생후 19개월이 되었을 때 성홍열과 뇌막염에 걸려 위와 뇌에서 급성출혈이 있었고, 그로 인해 시각과 청각 장애를 갖고 살아가게 되었다. 헬렌은 자기 집 가정 요리사의 여섯 살 난 딸과 수화를 통해 대화가 가능했었다. 그녀의 수화는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손이 움직이는 것을 자신의 손으로 만져보는 방식의, 일반 농아인들의 수화보다 복잡한 것이었다.

헬렌이 여섯 살이던 때 그녀의 부모는 펄킨스 시각장애학교의 졸업생인 스무 살 처녀 앤 설리번을 소개받았다. 설리번은 다음 해 3월부터 헬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녀의 교육방식은 단어의 스펠링을 헬렌의 손바닥에 적어주는 것이었는데, 처음에 헬렌은 설리번이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이해해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설리번은 마당의 수도꼭지에서 물을 틀어 헬렌으로 하여금 물을 만지게 한 다음 물(water)이라는 단어를 손바닥에 써주었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헬렌은 모든 사물에는 이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헬렌의 심장은 터질 듯한 환희로 차올랐다. 그녀는 비명을 내질렀고, 그것을 본 설리번의 마음 또한 보람으로 벅차올랐다.

설리번의 도움을 받으며 그녀는 학업을 시작했다. 1888년에는 시각장애학교에 등록하였고, 1894년에는 시청각장애학교에 다니기 위해 뉴욕으로 갔다. 1896년에는 케임브리지 여학교를 다녔으며, 1900년에는 하버드대학 부속 여자대학인 레드클리프 대학에 입학하여 1904년에 시청각장애인으로는 세계 역사상 학사학위를 받고 대학을 졸업한 첫 번째 사람이 되었다.

이후 그녀는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그녀는 수많은 강의를 통해 불리한 신체 조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지지하고 옹호했다. 여성 참정권을 위해 투쟁했으며, 여성 피임을 지지하는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로 살았다. 1915년에는 조지 케슬러와 함께 ‘헬렌 켈러 인티내셔널’이라는 단체를 만들어 건강과 영양 연구에 실적을 올렸으며, 1920년에는 미국자유인권협회의 설립을 도왔다.

어느 날 헬렌 켈러가 숲속을 다녀온 친구에게 숲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자 그 친구는 별로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은 헬렌에게 충격적인 것이었다. 어떻게 특별한 것을 볼 수 없단 말인가!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수필을 써서 ‘애틀랜틱 먼슬리’1933년 1월호에 발표했다. 그녀는 그 글을 통해 말했다. “만일 그런 기적이 내게 일어난다면 맨 첫날에는 자신의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아 마음속에 간직하겠다. 그런 다음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들과 들꽃을 바라보고, 노을 지는 석양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겠다.”

이어서 그녀는 둘째 날, 셋째 날에 무엇을 할 것인지를 감동적으로 서술했다.

1950년 여름, 브로드웨이와 런던에서 이름을 떨친 배우 릴리 팔머 부부는 이탈리아에서 포르토피노의 높은 별장 지대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었다. 그곳은 천국처럼 아름다웠지만 동네로 오르는 길이 매우 가파른 것은 문제였다. 그 길은 여느 차로는 오를 수 없고 오직 군용 지프만이 오르내릴 수 있을 만큼 경사지고, 좁고, 구불구불했다.

어느 날 팔머 부부는 지인의 부탁을 받고 호텔로 가서 헬렌 켈러를 별장 지대로 실어오게 했다. 군용 지프가 격렬하게 튀어 올랐지만 헬렌은 어린아이처럼 깔깔대며 재미있어 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그녀는 식탁 위의 어느 자리에 무엇이 있는지를 간파한 후에는 그것을 외워둠으로써 손으로 더듬는 따위의 보기 안 좋은 일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손이 눈이었다. 그녀는 손으로 대상물을 만지는 것을 ‘본다’고 했다.

그 방식으로 그녀는 그동안 많은 것들을 ‘보아’ 왔으며, 앞으로 ‘보고’ 싶은 것도 많다고 말했다. 릴리 팔머는 그때 헬렌이 뭔가에 귀 기울리는 듯한 태도로 머리를 약간 처든 자세로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가혹한 고통을 겪었을 그녀의 표정에서는 고통의 흔적이라곤 전혀 보이지 않았다. 속세를 잊은 성자 같은 모습으로 그녀는 천천히 움직였다.

“나는 보고 싶은 것, 배우고 싶은 것이 많아요”라고 그녀는 말했다. “하지만 죽음이 저 앞 모퉁이까지 와 있는걸요.”
“죽음이 두렵나요?”
“두렵지 않아, 오히려 그 반대지요. 저는 죽음을 이 방에서 저 방으로 가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잠시 침묵이 흐른 다음 헬렌은 천천히, 그러나 아주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튼 저세상은 내게만은 좀 다를 거예요. 짐작하시죠? 그 방에서, 나는 볼 수 있을 거예요!” 자연과학은 헬렌 켈러가 말한 ‘다음 생’을 증언하지 않는다. 자연과학에서 모든 사물의 기반은 물질이며, 정신은 물질의 파생물에 불과하다. 정신 내지 마음은 인정되지만 그것은 신경전달물질들의 자극과 반응에 불과하다. 이 인식의 그 어디에도 죽은 후까지 존속하는 ‘영혼’이나 ‘식’의 자리는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으레 ‘전생’과 ‘다음 생’을 말한다. “그런 복을 받다니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돌아가신 부모님이 하늘에서 기뻐하고 계실 거예요”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반인들로서는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이 말이 옳은가, 아니면 자연과학이 말하는 지식으로부터 추리되는 이치가 옳은가.

분명한 것은 자연과학은 종교의 본질 부분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은 물리현상의 ‘어떻게’에 대해 말하지만 ‘의미’를 말하지는 않는다. 아무리 물질을 연구해도 물질의 의미는 발견되지 않으며, 이 분야는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의 연구분야가 아닌 인문학의 연구분야이다.

한 인간으로서 나는 나의 삶에 의미가 있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삶이 ‘창조’ 되어야 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죽음 이후’는 삶의 의미에 대한 ‘요청’ 과정에서 다루지 않을 수 없는 분야이다. 현생만으로 답하는 삶의 의미도 있겠지만 죽음 이후를 상정함으로써 삶의 의미는 더욱 풍성해지게 된다. 그렇더라도 종교가 ‘창조’하는 ‘다음 생’은 자연과학적 ‘사실’로서의 진리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종교적 ‘요청’에 부응하는 ‘결정’ 내지 ‘결심’으로서의 ‘진실’이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61호 / 2018년 10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