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무관심 속에 사라진 석장승
29. 무관심 속에 사라진 석장승
  • 이숙희
  • 승인 2018.10.23 13:39
  • 호수 146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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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인 장착 트럭으로 야밤 싹쓸이 절도

장승은 소원 비는 신앙대상 겸
이정표이자 마을 수호신 역할
18세기 불교에 민간신앙 수용
미륵신앙 결합 미륵불로 불려

도갑사 입구 마주선 석장승 2구
1988년 도난 후 아직 행방불명
하르방 모습 괴산 장승도 도난
무관심 속 곳곳서 수난 이어져
도갑사 석장승, 조선후기, 높이 178㎝.

전라남도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42-2번지 도갑사 입구에 세워져 있던 조선 후기의 석장승 2구는 1988년 8월2일에 도난당하여 아직까지 그 행방을 알지 못한다.(사진 1, 2) 이 석장승은 높이 각각 178㎝, 185㎝로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21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승은 주로 마을의 수호신으로 사악한 기운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준다는 의미와 함께 거리를 알려주는 이정표 역할을 하며 때로는 마을 사람들의 소원성취를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그 기원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고대 남근숭배사상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 퉁구스 기원설, 남방 벼농사 기원설, 환태평양 기원설 등 여러 설이 있다. 보통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남녀가 짝을 이루어 마주 보고 서 있다.

특히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은 장승 중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으며 경기도와 충청도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원래 팔장신(八將神)의 하나인 대장군이라는 의미가 음양오행설에 의해 성으로 구분되어 남녀 한 쌍으로 세우게 된 것은 조선시대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남상은 머리 위에 사모(紗帽)나 전립(戰笠)과 같은 관모를 쓰고 있고, 여상은 관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장승은 기능에 따라 한 쌍이 아니라 단독 또는 셋이 배치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마을 지세나 방위상 허한 곳을 보강해 주는 비보(裨補)의 기능이 있는 것이다. 장승의 형상 또한 시대와 지역마다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었다. 그 명칭도 장성(長成), 장승(長丞), 장생(長栍), 벅수, 법수, 돌하르방, 당산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졌다.

도갑사 석장승 2구는 사찰 입구에 마주 보고 서 있는 돌장승이다. 잘 다듬지 않은 길쭉한 돌기둥에 얼굴을 입체감 있게 조각하고 턱 아래로는 약간 휘어진 수염이 길게 내려와 있다. 특히 눈두덩 위를 깊게 파서 도드라진 왕방울만 한 눈과 뭉툭한 주먹코, 두툼한 입술 등은 장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기괴하면서도 익살스러운 표정이며 그런대로 얼굴은 착하고 선해 보인다. 두 귀는 뚜렷하게 구분되어 있지 않으나 턱 아래까지 길게 내려와 있다. 커다란 돌기둥에 약간 굽은 어깨와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있는 모습은 전반적으로 입체감이 없이 밋밋하다.

도갑사 석장승, 조선후기, 높이 185㎝.

능묘 앞에 세워두는 문인석과 유사하나 문인석보다는 단순하고 거친 듯한 조각기법에서 생동감 있는 조형감이 느껴진다. 이러한 석장승은 미륵신앙과 결합하여 흔히 미륵불이라고도 부른다. 장승과 미륵불의 결합은 조선 후기인 18세기 후반에 이르러 불교에 민간신앙이 수용되면서 나타나는 신앙형태로 보인다. 당시 미륵불은 힘든 삶에 지친 중생들에게 자신을 구제해 줄 메시아와도 같은 존재였다.

이외에도 언뜻 보기에는 하르방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충청북도 괴산 능촌리 석장승 1구(1989년 12월27일)와 충청남도 금산군 목장승 1구(1993년 9월6일)(사진 3) 등이 도난당하였다. 장승의 경우, 지정되지 않은 비지정문화재가 대부분이며 보존과 관리가 소홀하여 유물의 수량이나 소재지가 제대로 파악되어 있지 않고, 또한 도난당했다 하더라도 신고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전체 도난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다. 더욱이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강하며 파격적인 조형미를 보여주는 장승의 경우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석장승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화강암이나 퇴적암 또는 제주도에 많이 나는 현무암을 사용하여 만들어졌다. 조각기법상으로는 환조기법에 의한 입석형의 기둥 형식으로 자연석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서 머리 부분만 조각한 석비형(石碑形)의 장승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반면에 목장승은 재료의 특성상 세월이 갈수록 나무가 퇴색되고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매년 또는 몇 년에 한 번씩 다시 제작해야 한다. 목장승으로 오래되었거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이런 장승이나 능묘조각, 석탑 등과 같은 석물들은 크기나 무게로 보아 아마도 장비를 동원해서 옮겨간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신문기사만 보더라도 어떤 방법을 이용하여 훔쳐갔는지 짐작할 수 있다.

2004년 여름부터 2005년 4월까지 문화재 전문절도범들이 트럭을 몰고 다니며 11차례에 걸쳐 대구 달성군 도동서원 중정당(보물 제350호) 기단면석 2점을 비롯하여 사찰의 문화재급 불상, 탱화, 사천왕상, 석탑과 전국의 향교와 서원에 있는 현판, 고문서 등을 싹쓸이하였다. 이들이 훔친 문화재는 모두 2300여점, 시가 80억원 어치로 당시 사상 최대 규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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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능촌리 장승, 조선후기, 높이 260㎝. ‘불교문화재도난백서’(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1999).

경찰 조사결과 이들은 주로 밤을 틈타 인적이 뜸한 지방의 사찰이나 서원, 향교, 능묘 등을 범행 대상으로 삼았다. 미리 범행 장소를 물색한 뒤 크레인이 장착된 2.5t 트럭을 몰고 다니며 기단석, 능묘조각, 석탑, 장승 등 부피가 큰 것에서부터 족보, 문집, 고서, 현판에 이르기까지 값나갈 만한 문화재는 닥치는 대로 훔쳐 갔다. 훔친 물건을 회수하기 위해 경찰이 2.5t 트럭으로 3번을 실어 날랐을 정도였다. 이렇게 훔친 문화재들은 알선책인 고미술상의 창고에 보관했으며 석물처럼 부피가 큰 물건은 대구 근교의 논바닥에 묻어두기도 했다.(‘조선일보’ 2005년 4월1일자)
2006년 5월21일에도 승합차를 몰고 다니며 야산이나 절터에 있는 고려시대 석탑 등 불교문화재를 전문적으로 훔치는 일당 2명이 있었다. 이들은 2005년 9월26일 새벽 1시쯤 경상북도 의성
군 신평면 중률리에 있는 한 절터에 세워져 있던 5층 석탑을 7개로 분리해 12인승 승합차에 싣고 달아났다. 높이 160㎝, 둘레 90㎝ 크기의 이 석탑은 고려시대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해 5월 초순쯤 경상북도 성주군 벽진면 안산영당(安山影堂; 문화재자료 217호) 안에 있던 높이 1m 정도의 미륵석불상 1구도 같은 방법으로 훔쳤다. 또 이들이 훔친 5층 석탑을 750만원에 사들인 고미술상은 석탑과 문인석 등 문화재 10여점도 함께 구입하여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한 연못 속에 숨겨두었다고 한다.(‘조선일보’ 2006년 5월22일자) 몇 년 전만 해도 비지정문화재의 경우, 절취한 뒤 은닉하고 있다가 공소시효 7년이 지난 이후에 매매하면 법적인 처벌을 할 수 없었다.

이처럼 석장승과 같은 비지정문화재는 훔친 후 불법적인 거래로 처분하기가 쉽고 잡혔을 경우에도 그 죄질에 비해 법적인 처벌이 약하다. 이 때문에 비지정문화재가 문화재 절도범들에게는 좋은 먹잇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숙희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shlee1423@naver.com

 

[1461호 / 2018년 10월 24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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