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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담마딘나의 무소유

기자명 김정빈

수행자에게 무소유는 최소한의 물질만 갖는 것

남편 위사카, 수다원과 성취한 후
재산일체를 부인 담마딘나에 주고
출가 수행자로서의 삶에만 집중

담마딘나, 남편이 준 재산에 대해
뱉어버린 침 비유하며 출가 선언
무소유 삶 실천해 아라한과 성취

그림=근호
그림=근호

위사카와 그의 아내 담마딘나는 좋은 부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위사카가 밖에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담마딘나는 반갑게 맞이하며 노고를 위로했고 그러면 위사카는 다정한 눈길로 아내에게 화답했다. 문제는 위사카가 불교 수행을 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위사카는 열심히 정진한 끝에 수다원을 성취했다. 중요한 것은 이 경지에 이르면 세속사에 관심이 적어진다는 점이다. 그렇긴 하지만 수다원이 된다고 해서 곧바로 출가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위사카는 여전히 가정에 머물러 지냈는데, 다만 아내에 대한 그의 태도만은 전과는 아주 달라졌다.

그는 집에 돌아올 때마다 보이던 다정한 미소를 더 이상 아내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이것은 담마딘나에게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녀는 남편이 왜 변했는지가 궁금했다. 수다원이 된 뒤로 담마딘나는 혼자서 아내와 떨어진 장소에서 식사를 했는데, 담마딘나는 남편이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자신이 그를 화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며칠 뒤, 식사를 마친 위사카가 아내를 자기 옆에 불러 앉히고 말했다.

“이제부터 이 집안의 재산은 모두 당신 것이오.”
“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요즘 들어 당신은 변했어요.”
“당신 말 그대로 나는 변했소. 나는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렸소. 그래서 내 재산을 당신에게 모두 주려는 거요.”

담마딘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가 놀란 것은 자신에게 재산이 생겼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녀는 남편의 결정이 지닌 의미에 관심이 갔다. 대화를 하던 중이었지만 그녀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위사카는 아내가 더 이상 말을 않자 일을 보기 위해 집 밖을 나갔다. 담마딘나의 사색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저녁때가 되어 위사카가 집으로 돌아왔다. 식사가 끝난 다음 부부는 다시 마주 앉았다. 담마딘나가 먼저 입을 열어 선언했다.

“저는 집을 떠나 비구니가 되겠어요!”

여느 사람에게는 충격적인 말이었겠지만 수다원 위사카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두어 번 끄덕거리고 나서 말했다.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세상에 그럴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없으니까. 특히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능히 그럴 수 있고 말고. 하지만 갑자기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는 궁금하구려.”
“당신은 저에게 이 집안의 재산을 모두 주겠노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렸노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당신은 그 재산을 ‘침’처럼 뱉으신 것인데 내가 그 침을 받아 가져야만 하나요? 저도 물질을 침처럼 여기는 경지에 이르고 싶어요. 그래서 가정을 떠나 비구니가 되려는 거예요.”

이렇게 하여 담마딘나는 비구니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열심히 수행했고, 마침내 깨달음의 가장 높은 경지인 아라한 경지를 성취했다. 그런 다음 고향으로 돌아오자 전에 그녀의 남편이었던 재가신자 위사카는 수도원으로 담마딘나 비구니를 찾아갔다.

위사카는 담마딘나의 수행이 어느 경지에 이르렀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직접 물어보는 것은 되바라질 거라고 생각하여 넌지시 수다원 경지가 어떠한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담마딘나는 막힘없이 대답했고, 그 대답은 자신의 경험과 일치했다. 이어서 위사카는 사다함, 아나함의 경지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담마딘나의 대답은 그에 대해서도 막힘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위사카는 아라한 경지에 대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담마딘나가 말했다.

“그에 대해서는 부처님께 직접 여쭈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위사카는 부처님께 나아가 담마딘나와 나눈 대화를 들려드린 다음 법문을 청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래의 딸 담마딘나는 참으로 잘 대답했구나!”

이어서 부처님께서는 게송 한 편을 읊으시었다.

그는 과거, 현재, 미래에 얽매이지 않고
물질의 소유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시간의 얽매임이 없으며 욕심에서 벗어났나니
나는 그를 브라흐마나라 부른다

물질에 대한 집착처럼 끈질긴 것이 있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물질에 대한 욕망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생명체이고, 생명체는 생존을 하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물질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과 여분으로서의 물질로 분별된다. 불심에 충만하여 출가하여 비구, 비구니가 된다는 것은 그중 전자만을 인정할 뿐 후자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출가자가 된다는 것은 무소유자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의 무소유는 아예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최소한의 물질만을 소유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출가자는 물질을 버리는 것일까. 그것은 물질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무언가가 불법에 있기 때문이다. 불법은 깨달음을 핵으로 하고, 깨달음을 성취한 사람은 물질로서는 도저히 맛볼 수 없는 감로를 맛보며 살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수다원을 성취하는 것은 지상의 왕이나 천왕이 되는 것보다 열여섯 배가 더 낫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그 둘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깨달음의 공덕은 무너지지 않는 데 비해 물질의 소유는 무너져 소멸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질을 ‘침’으로 여긴 끝에 천왕조차도 부러워하는 경지에 이른 담마딘나 같은 참다운 불제자가 지금 우리 곁에도 있을까? 왜 그런 불제자는 부처님 시대나 옛날에만 있는 것일까? 잘 살펴보면 지금 우리 곁에 그런 불제자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이들이 매우 희귀하다는 것만은 어김없는 사실이다.

진정한 무소유를 실천하는 불교 지도자가 드물어진 현재의 한국불교가 안타깝다. 물질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물질을 버렸노라고 호언장담하면서 돈을 헤아리고 땅을 사 모으는 탐욕스러운 불교 지도자들, 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차치하고라도 남을 속이고 현혹시키는 그들을 금강역사의 철퇴로 응징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가끔 있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62호 / 2018년 10월 3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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