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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산책

기자명 임연숙

마음 속 풍경을 꺼내 들여다보다

전통적 화조화 틀에서 벗어나
여러번 덧칠한 푸른 바탕위에
은박 겹붙여 시간속 풍경 표현

유미선 作 ‘산책’, 70×70cm, 장지위에 석채·은박, 2017년.
유미선 作 ‘산책’, 70×70cm, 장지위에 석채·은박, 2017년.

암각화는 선사시대 유적으로 단단한 바위위에 기하학적인 문양이나 물고기, 산, 사냥하는 모습 등을 음각으로 새겨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유적이다. 문자시대 이전에 그림으로 기록을 남긴 태초 인류의 생각을 엿보게 한다. 유미선 작가의 암각화를 연상하게 하는 그림은 가장 단순한 선으로 간단한 도상으로 통해 단편적이나마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 이 기록은 서사적이라기보다 함축적이고 응축적인 시어와도 같이 느껴진다.

대부분 작품과 작품을 그린 작가의 이미지나 느낌이 일치되는 측면이 있다. 유미선 작가의 작품은 작가가 주는 이미지 그대로다. 차분하고 단아하면서도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고, 따듯하면서도 사려 깊다.

전통회화의 화조화라 하면 어떤 전형적인 틀을 연상하게 된다. 문인화풍의 화조화 역시 전형적인 기법과 내용을 담고 있다. 작가는 한국화 채색의 기법을 따르면서도 이를 현대적이면서 전형적이지 않은 자신만의 언어로 만들고 있다. 푸른 바탕은 차갑고 시원한 이미지보다 여러 번 덧바르는 과정에서 곰삭은 따뜻함을 준다. 전체적인 화면에 그려진 드로잉은 은박이라는 기법을 사용해 회색처럼, 혹은 연필의 흑연처럼 느껴진다. 이 은박기법은 종이보다 얇은 은박을 아교로 화면에 붙이는 기법이다. 작가는 은박을 1mm로 얇게 잘라 일일이 선을 따라 붙이는 기법을 사용했다. 드로잉이 주는 자유로운 선의 표현을 일일이 붙여서 표현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선의 느낌은 오히려 철저히 계획되어진 표현일 수도 있겠다. 얇은 은박을 붙이기 때문에 이를 견고하게 만들고자 두 번, 세 번 그 위에 덧붙이는 과정을 거친다. 그림에 그려진 선의 견고한 느낌은 부드러운 붓으로 그린 선의 느낌과는 달리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사물과 사물 간의 연관보다 각각의 이미지들을 명확하게 한다. 화면에 스며든 물감이 아닌 그 위에 덧붙여진 기법은 평면이지만 엄밀하게 삼차원의 입체작품인 것이다. 암각화처럼 느껴진 이유가 드로잉으로 자유분방하게 선을 그린 것이 아닌 은박을 붙여서 표현했기 때문이다.

작가의 말을 빌리면 각인된 이미지는 큰 소망과 소원처럼 거시적인 것들이 아니다. 할머니 댁 마당에서 한가롭게 햇볕을 쬐는 아이처럼, 담장 옆의 소박한 화단과 느릿느릿 걸어 다니는 개, 항상 그 장면이었을 것 같았던 시간의 흐름을 그리워하는 그리움을 담았다. 소박한 밥상처럼 담백하고 싱겁지만 건강한 맛처럼 늘 그러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담장 옆에 무심히 피어있는 꽃과 일상이 느껴지는 시계와 자전거, 그냥 그어댄 듯한 선들을 통해 작가는 자신만의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를 만끽한다.

덧바르고 기다리고 하는 반복의 시간들을 통해 원하는 색감을 얻어내는 기법은 그 자체로 작가에게 수련의 과정이었을 것이다. 여기에 1mm로 자른 얇은 은박을 아교로 붙이면서 작가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한 번 더 곰삭혔을 것이다.

“어느덧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색색의 꽃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어느 날, 내 안에 아직 남아있는 담담한 풍경을 꺼내어 그곳을 들여다본다. 시간의 궤적과 퇴적 속에 박락되어진 벽화처럼 아득한 기억의 잔상들을 시간 속의 풍경으로 오리고 붙여본다.“

작가의 말 속에 따듯하고 섬세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임연숙 세종문화회관 전시디자인 팀장 curator@sejongpac.or.kr

 

[1463호 / 2018년 11월 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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