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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원의 환부역조

기자명 심원 스님

‘제 애비를 바꾼 놈’ 환부역조(換父易祖)! 명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심한 욕은 없다. 역사는 크게 국가나 민족사에서부터 작게는 가족사가 있으며, 그 중간에 크고 작은 조직과 단체의 역사가 있다. 그 모든 역사에서 누구를 시조로 하는가는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과거에 근거해서 미래를 열어가는 자기 정체성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선학원이 한국불교 근현대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크다. 일제강점기에 한국불교계는 왜색화 현상이 심각하여, 승려가 결혼하고 고기를 먹는 ‘대처식육’이 만연하고, 선풍(禪風)은 땅에 떨어졌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비구승들이 계율을 지키고 선풍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청정 승풍을 지켜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그 결과 선학원이 설립되고 선우공제회가 발족하게 된 것이다.

용성, 성월, 도봉, 석두, 남전 스님을 비롯한 수좌들이 선학원 설립에 기여하였지만 그 가운데 만공 스님은 단연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선학원 설립과 선우공제회 조직 과정에서 회의를 주도하고 재산을 기부하였으며, 1934년 선학원이 재단법인 선리참구원으로 등록할 때는 초대이사장으로, 뒤이어 개최된 수좌대회에서는 종정으로 추대되는 등 만공 스님이 선학원의 설립과 운영의 주역이었던 것은 역사 기록이 전하는 사실로써, 근현대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면 이견 없이 인정하는 정설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환부역조의 역사왜곡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선학원 집행부가 느닷없이 만해 한용운 스님을 선학원의 설립조사로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선학원 홈페이지를 보면 만공 스님을 비롯한 선학원 역대조사들은 뒷전으로 밀쳐져 있고, 태반이 만해 스님 이야기로 장식되어 있다. 더 심각한 것은 올해 6월 준공된 선학원 ‘한국근대불교문화기념관’이다. 들어가는 입구 벽면에는 만해 스님 일대기가 새겨져 있고, 기념관 내부에는 동상이 거창하게 자리 잡고 있다. 누가 보나 선학원 기념관이 아니라 영락없는 만해기념관이다.

만해 스님을 설립조사로 내세워야만 하는 그 절박한 사정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지만 지나쳐도 너무 지나쳤다. 만해 스님은 선학원 창건에 관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해 스님을 선학원 ‘설립 조사’로 추앙하는 것은 명백한 역사적 오류이다. 1910년대를 선학원 태동기로 보고 만해 스님을 설립 조사로 내세우고자 하나, 이는 억지로 끼어 맞춘 역사인식일 뿐이다. 선학원이 1921년에 창건되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만해 스님은 이에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만해 스님은 ‘승려취처문제건의서’라는 청원서를 당국에 제출했을 뿐 아니라, 1933년에는 혼인을 하고 대처승으로 성북동 심우장에서 살았다. 그러한 그가 어떻게 ‘대처식육의 왜색불교’에 대항하여 만들어진 선학원의 설립조사일 수 있는가? 이는 환부역조를 넘어서 선학원 정체성까지 파괴하는 역사왜곡 행위다.

왜 이처럼 무리하게 역사를 왜곡하는 지 알만한 이들은 그 불순한 이유를 알고 있다. 국가로부터 사업비 지원을 위한 것이든, 수덕사와의 재판에 대한 불편함의 표출이든, 만해 스님의 그늘에 숨어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 한 것이든, 그 어떤 이유에서건 이제는 멈추어야 한다. 지금까지 진행된 왜곡된 역사를 바로 돌려놓아야 한다.

‘만해 스님을 선학원 설립조사’로 만들기는 특정 내용만 골라 뽑아 자신들의 입맛에 맞추어 악의적으로 편집한 전형적인 역사왜곡작업이다. 결코 역사 재해석이라 할 수 없다.

지금 현재 선학원의 발전을 위해 만해 스님이 필요하다면, 만해 스님에게 설립조사가 아니라 그의 위상에 부합하는 적절한 역할을 부여해야 한다. 어울리지도 않은 남의 옷을 덧씌워서는 안 된다. 나라가 망해가는 암울한 시기에 한국불교를 걱정하며 서로를 격려했던 만해 스님과 만공스님이다. 만해 스님은 결코 만공 스님의 흔적을 지우고 당신이 선학원 설립의 주역이 되어 21세기 선학원 기념관에 동상으로 서 있기를 바라지 않았을 것이다. 만해 스님은 만해다움으로도 충분히 평가받고 존중받을 수 있다. 삿된 의도를 숨기면서 그럴듯한 미명 하에 더 이상 만해 스님을 욕되게 해서는 안 된다.

심원 스님 중앙승가대 강사 chsimwon@daum.net

 

[1465호 / 2018년 1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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