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었다. 몇 년의 가을을 잊고 지났는데 새삼 올해 가을 이야기가 잦으니 사람들이 내게 가을 탄다고 한다. 계절은 매년 어김없이 내 곁을 지나가지만 내가 느끼는 계절의 흥취는 완전 별개인 것 같다.
바쁜 삶을 살다 보니 실은 가을을 잊고 살았던 것이다. 제주에 살다 보면 가을을 잊어버리기 쉽다. 남도의 낙엽은 우리 곁에 깊게 다가오지 않는다. 사실 한라산 고산지역이 아니면 낙엽다운 낙엽을 보기 힘들다. 제주 가을의 흥취는 노오랗게 익어 수확을 기다리는 밀감을 보는 것이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생일이 가을 초입이라 매년 한 번씩 나 자신을 위해 직접 선물을 산다. 세상에 내가 태어나 살아가는 일이 어찌 타인들에게 축하만 받을 일일 것인가! 나를 위해 내가 선물을 찾아 나 자신에게 선물하니 어찌 보면 좀 싱겁긴 해도 나는 이 세상에 살아가주는 내가 좋다.
몇 년째 내가 내게 한 선물을 살펴보니 모두가 그림이고 가을 풍경이다. 가을과 자연의 흥취가 깊이 묻어나는 길거리 그림들이다. 그냥 마음에 들어 가볍게 사서 삶 주변에 걸어두고 오가는 사람과 함께 즐기다가 계절이 지나면 가벼이 바꾸어도 크게 섭섭지 않을 내 선물은 그래서 더 좋은지 모르겠다.
지난 9월에 창단한 우리 보리왓 보리수어린이합창단 활동의 일환으로 제주밀감 판매행사를 하자고 했다. 말이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우리 스님 또 일 만든다”고 했다.
신도 한분이 기꺼이 밀감밭을 내주었다. 바빠서 무농약 귤이 된 밭을 얻어서 어린단원들과 놀이삼아 몇 상자라도 따서 팔려는 생각이었다. 생각은 이랬지만 주변분들 말이 맞았다. 주변의 좋은 분들과 SNS의 힘으로 불과 6일 만에 700상자의 주문이 쏟아졌다. 합창연습이 끝나고 아이들과 함께한 수확의 일은 축제에 버금갔다. 예상외로 제주아이들과 자모들 중에는 “난생 처음 밀감을 직접 따본다”는 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은 함께 밀감을 따면서 거침없이 목청 돋우며 얼마 배우지도 않은 곡들을 합창해 흥겨움을 더했다. 이제 주문을 마감하고 내년을 기약하며 되돌아보니 판매해 얻게 될 수익금보다, 맛난 감귤에 감사하는 감동보다, 함께 한 우리들의 가을 시간이 더 소중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북화합의 상징으로 북에서 온 송이에 대한 답례로 최남단 제주의 밀감을 보냈다고 한다. 계절도 의미를 부여하면 우리에게 다가와 생생한 삶의 생기를 불어넣어 주듯이 세상 모든 사물도 의미를 부여하면 우리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것 같다.
우리 보리수단원들에게도 밀감은 단순한 과일일 뿐만 아니라 부처님 나라에서 행복 가득 전해 준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게 되었을 것 같다.
그래서 시인 김춘수는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의미가 된다고 하였나 보다. 이 가을 한 폭의 가을 그림도, 제주 가을 지천으로 널린 밀감도 어린 단원들의 합창과 남북화합의 상징으로 함께 이름을 불러주니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오지 않는가. 이 가을, 우리 주변에 이름 불러주지 않아 사라져가는 존재들을 자비의 눈으로 되찾아 그들을 불러 의미를 되살려봤으면 좋겠다.
나도 겨울이 다가오기 전에 가을 향 가득한 의미로 누군가에게 다가가고 싶다. 우린 모두 누군가에게 또 다른 의미로 남고 싶어 하지 않은가. 가을엔 더욱 그렇다.
약천사 신제주불교대학 보리왓 학장 sw0808@yahoo.com
[1465호 / 2018년 1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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