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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⑪

신라는 율령 반포 이후에도 한동안 부족연맹적 성격 탈피 못해

신라 최고 금석문 발견으로
6세기 전반 신라 실상 제공

지증마립간 때 교시된 비석
각 부 대표 모두 왕으로 표시

7인이 대등한 입장에 서서
공동 결정하고 함께 교시해

국왕이 초월적 위상 못 갖고
하나의 부대표 입장이 기본

율령 반포한 법흥왕 시대에
관등 높낮이 기록하는 변화

한때 낮춰 받던 율령 수준도
내용 갖춘 명실상부한 율령

부족장과 왕이란 이중지위
석존 당시 인도사회와 비슷

국보242호 울진봉평신라비.

4~6세기 신라는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전반에 걸쳐 커다란 변화를 겪고 있었다. 특히 22대 지증마립간대(500~514)부터 23대 법흥왕대(514~540)의 6세기 전반은 연맹왕국으로부터 중앙집권적 왕국으로 전환되는 하나의 획을 긋는 시기였다. 그러한 전기를 마련한 중요한 역사적 사실로서 그 동안 주목된 것은 지증마립간 4년(503) ‘사로’에서 ‘신라’로의 국명 변경과 ‘마립간’ 대신 ‘왕’의 칭호 사용, 6년(505) 주군제(州郡制)의 실시, 그리고 법흥왕 7년(520) 율령의 반포, 14년(527) 불교의 공인 등의 사건이었으며, 문헌 자료를 통해 변화과정에 관한 대체적인 이해체계를 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변화의 내용으로서 6부체제(六部體制)와 관등(官等)·관제(官制) 등의 내용과 성격, 지배체제와 역역(力役)체계의 정비과정, 불교 공인의 역사적 의의 등에 관한 이해는 아직까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추측성의 다양한 주장들만이 제기되어 오는 상태였다. 그런데 1988년 울진봉평신라비(蔚珍鳳坪新羅碑, 524년, 이하 봉평비)의 발견에 뒤이어, 포항냉수리신라비(浦項冷水里新羅碑, 503년, 이하 냉수리비)와 포항중성리신라비(浦項中城里新羅碑, 501년) 등 이른바 신라 최고(最古)의 금석문 자료들이 순차적으로 출현함으로써 6세기 전반의 신라사의 실상에 대해서 이전과는 다른 차원과 시각에서 접근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적지 않게 제공해 주었다. 이들 3비는 모두 지방에서 발생한 분쟁 사건에 중앙정부가 개입하여 해결하는 과정과 결과를 비석에 새긴, 일정한 행정문서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해당 지역에서의 재발을 방지하려는 의도뿐만이 아니라 다른 지역까지도 겨냥하여 경고하는 포고문의 성격도 동시에 지닌 것으로 보인다. 문장 표현이 별로 정제되지 못한 매우 미숙한 상태이지만, 그 속에 담긴 여러 가지 풍부한 정보 가운데 우선 ‘6부체제’를 중심으로 6세기 전반 정치사회의 발전과정을 추정해 보겠다.

먼저 냉수리비는 겉으로 드러난 양상은 구체적으로 특정하기가 쉽지 않은 어떤 재물을 놓고서 벌인 지역 유력자 사이의 다툼을 중앙정부가 직접 개입하여 해결하는 과정과 그 처리결과를 비석에 새긴 것인데, 중앙정부의 해결과정이 특히 주목된다. 지증마립간을 비롯한 6부의 대표 7인이 함께 의논하여 결정하고 교시하는 부분만을 번역하여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계미년(503) 9월 25일 사탁(부)의 지도로갈문왕·사덕지아간지·자숙지거벌간지·탁(부)의 이부지일간지·지심지거벌간지·본피(부)의 두복지간지·사피(부)의 모사지간지 등 7왕(王)들이 함께 의논하여 교시하였다.” (이하 교시 내용 생략)

위 인용문의 내용 가운데 우선 주목되는 것은 6부 가운데 사탁부·탁부·본피부·사피부 등 4개 부의 대표자(부장) 7인이 대등한 입장에서 공동으로 결정하여 교시하고 있으며, 그들이 모두 ‘왕(王)’으로 칭해지는 공동지배의 방식이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7인의 나열 순서는 관등 순서가 아니고 소속부 별로 우선 구분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 일원적인 관등체계가 성립되기 이전에 각부는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 기능했음을 알 수 있다. 7인 가운데 처음에 기록된 지도로갈문왕은 지증마립간을 지칭하는데, 그 자신도 다른 부의 대표들과 똑같이 사탁이라는 소속부의 이름를 관칭하고 있었다. 이는 원래 국왕도 초월적인 위상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부대표(부장)로서의 입장이 기본이었음을 의미한다. 당시 인명의 표기 방식은 부명(部名), 인명(人名), 관등(官等)의 순서로 정형화되어 있었으며, 뒷날 직무가 분화되면서는 제일 앞에 직명(職名)의 기록이 추가되었다. 그런데 교시가 내려진 다음 달인 10월에 지증마립간만이 왕을 칭하게 됨으로써 왕 이외 다른 부의 대표들은 왕을 칭하는 것이 금지되었던 것으로 본다. 왕호를 마립간이라고 칭하던 17대 나물마립간(365~402)부터 22대 지증마립간 시기는 6부가 각각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 공동지배하는 이른바 ‘부체제’였으나, 시기가 내려가면서 부 사이에 우열의 차이가 생기었고, 특히 탁부와 사탁부의 세력이 강해져 마립간(왕)은 탁부, 갈문왕은 사탁부에서 독점하고 여타 다른 부들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법흥왕의 아버지가 되는 지증마립간이 21대 소지왕(479~500)의 6촌 아우로서 즉위할 때 나이가 64세였으며, 사탁부 출신의 갈문왕을 역임하였다는 사실은 그의 즉위 자체가 정상적 과정을 밟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추측케 한다. 그런데 다음에 검토하게 될 봉평비에서는 지증마립간의 2명의 아들 가운데 장자인 법흥왕은 탁부, 차자인 입종(사부지)갈문왕은 사탁부 출신으로 소속 부를 달리 관칭하고 있었음이 주의된다. 탁부 출신이 마립간(왕)위를 독점해 오던 상황에서 지증마립간은 사탁부의 출신이면서 갈문왕으로서 즉위하였으나, 그 아들인 법흥왕은 탁부에게 정통성이 있음을 의식하여 소속 부명으로 탁부를 관칭하고, 그 동생인 입종갈문왕은 그 아버지를 이어 사탁부를 관칭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국보 264호 포항냉수리신라비.

그런데 냉수리비보다 21년 뒤인 법흥왕 11년(524)에 세워진 봉평비에서는 기본적으로는 부가 왕경의 지배자 공동체로서 의사가족적(擬似家族的)인 성격을 계승하면서도 상당히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봉평비의 내용에서 당시 중앙정부가 추진한 차등적인 지방지배정책에 대해 특정 지역에서 강한 불만을 품고 반발한 데서 일어난 분쟁이 발생하였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국왕을 비롯한 각부의 대표 14인이 공동으로 회의를 개최하고, 그 결과를 함께 교(敎)의 형식을 빌어서 발동하는 주체로서 등장하고 있는 점은 냉수리비에서의 방식과 별다른 차이가 없다. 이는 국왕의 위상이 아직 초월자적 지위로까지 나아가지 못하였음을 의미한다. 당시는 이미 율령(律令)이 반포되고 국왕의 위상이 변화되는 도정이기는 하였으나, 전시대적 성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음을 말한다. 그러나 인명을 열거하는 방식에서는 상당한 차이점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냉수리비에서는 회의 참석자 인명의 열거 순서를 관등의 높낮이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부별 단위로 묶어서 표기하였는데, 봉평비에서는 인명의 기재 순서가 보유한 관등의 높낮이가 주된 기준으로 바뀌는 변화를 보였다. 관등의 순서는 국왕인 모즉지매금왕((牟卽智寐錦王, 법흥왕)과 사부지갈문왕에 이어 제2관등인 간지(이찬)부터 제11관등인 나마까지 14인의 부명 · 인명 · 관등이 열거되었다. 이는 관등체계가 정비되면서 기능이 강화되었던 데 반하여 부의 독립적인 정치단위로서의 역할은 크게 감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변화의 배경으로서는 법흥왕 7년(520) 율령 반포와 백관 공복(公服)의 제정 사실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봉평비에서 ‘대교법(大敎法)’과 같은 율령 반포 사실 자체만이 아니라 노인법(奴人法)을 비롯한 ‘장육십(杖六十)’, ‘장백(杖百)’과 같은 율령의 구체적인 편목 내용까지도 보여주고 있다. 법흥왕 7년에 반포한 율령이 공복제와 같은 단순한 내용의 규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낮추어 평가했던 견해와 달리, 국가체제와 운영의 큰 틀로서의 율(律)과 령(令)의 다양한 편목과 내용을 갖춘 명실상부한 법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최치원이 893년 즈음 편찬한 봉암사지증대사비문에서 불교 공인 시점을 율령 반포 연도를 기준으로 서술하고 있었던 것을 보아도 신라의 역사에서 율령 반포의 의의가 대단히 높게 평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국왕인 모즉지매금왕과 그의 아우인 사부지갈문왕도 다른 부의 대표들과 마찬가지로 각기 자신의 소속부인 탁부와 사탁부를 관칭하고 있음을 보는데, 이것은 국왕이 아직 특정 소속부의 대표자로서의 성격을 탈피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요컨대 국왕인 법흥왕은 즉위 11년(524) 당시 탁부라는 특정부의 대표자이면서 동시에 6부의 대표자 회의를 주관하는 부족연맹장으로서의 성격과 위상을 동시에 가진 2중적 성격의 존재였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령 반포 이후에도 상당 기간 탁부의 부장으로서의 매금왕, 사탁부의 부장으로서의 갈문왕, 그리고 여타 각 부의 부장 및 관등을 소지한 관료들 다수가 함께 모여 회의를 하고, 그 결과를 공동의 명의로 교(敎)의 형식을 빌어 실시케 하는 부체제의 기본적 성격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고, 아직 국왕의 초월자적인 지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이로써 법흥왕 14년(527) 불교가 공인되기 직전까지의 부체제 중심의 국가 운영과 국왕의 위상 실태를 살펴보았는데, 결국 이러한 국가 형태는 기원전 6~5세기 석존이 생존했을 때의 상가(saṃgha)와 유사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석존 당시 16대국을 비롯하여 수많은 국가들의 정치형태는 왕국과 공화국의 체제로 대별되는데, 공화국은 상가(saṃgha), 또는 가나(gana)라고 불렸다. 상가의 형태에 대해 인도와 서구의 학자들은 republic, oligarchy, aristocracy 등으로 번역하고, 일본의 학자들은 과두제국가(寡頭制國家), 공화제국가(共和制國家), 귀족제국가(貴族制國家) 등으로 번역하였다. 석존이 출생한 카빌라국은 상가국이었고, 또한 석존이 열반에 들었던 쿠시나가라가 소재한 말라국도 상가국이었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공화국은 밧지국이었는데, 불전의 기록에 의하면 국가의 최고 의사결정기관은 부족집회였으며, 이 집회에는 라자(rājā)라는 왕의 칭호를 가진 회의체의 구성원이 7707인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석존의 조국이며, 부족연합 형태의 카빌라국에서도 부왕인 숫도다나(Suddhodana, 淨飯王)를 비롯하여 그의 형제들인 숫크로다나(Sukiodana, 白飯王), 드로노다나(Droṇodana, 斛飯王) 등이 모두 라자라는 왕의 칭호를 가지고 있었다. 석존이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설교하고, 제자들을 모아 교단을 조직하고, 그 집단의 이름을 상가(saṃgha, 僧伽)라고 이름하였다는 점은 불교의 사회적 성격과 신라사에서의 불교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만한 사실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65호 / 2018년 11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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