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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 동안거 결제 법어

기자명 주영미
  • 교계
  • 입력 2018.11.25 21:56
  • 수정 2018.11.27 10:21
  • 호수 1466
  • 댓글 3
지유 스님.
지유 스님.

오늘부터 삼동결제를 시작합니다.
지금까지는 결제 전 산철이라고 해서 각자 인연 닿는 대로 산으로 혹은 바다로, 마을로 사방을 오고 가며 냇물이 흐르듯 구름이 다니듯 ‘운수납자(雲水衲子)’로 생각하고 있었던 몸이 오늘 결제를 맞이하여 석 달 동안 바깥출입을 끊고 이 자리에 돌아왔습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의문이 생기는 점도 있었을 것이고 또 깨달은 바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것을 해결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고 한다면 모든 출입을 끊고 선방은 선방대로 강원은 강원대로 소임자는 소임자대로 각기 맡은 바에 몸을 던지면서 거기서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면벽관심(面壁觀心), ‘이 몸이 벽을 대하고, 마음을 본다.’라고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벽을 보는 것을 다른 말로 ‘좌선한다.’라고 표현합니다. 달마대사께서도 소림굴에서 9년 동안 출입을 끊고 면벽관심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벽을 대하고 앉아 있었던 것일까요? 마음을 닦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마음을 닦는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닦는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닦는다고 하는 것은 나에게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있으면 덜어내어야 하고 때가 있으면 씻어내야 하고 나빴던 모습이 있었다면 좋은 모습으로 바꾸어 나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도대체 제대로 되는 물건인지 삐뚤어진 물건인지 벽 앞에 갖다 놓아야 합니다. 자기 몸을 갖다 놓고 벽을 향해 조용히 앉아보면 누구보다 자신이 벽을 보고 앉아 있다고 알 수 있습니다.

자, 여기서 어떻게 할 것인가. ‘마음을 관한다.’ ‘마음을 깨닫는다.’라고 들어왔습니다. 각자 자기 나름대로 해왔던 생각을 연속하면서 화두를 들었다든지 염불을 했다든지 사람마다 똑같지 않을 것입니다. 염불하든 기도를 하든 화두를 들든 소임을 보든, 그것을 하기 전 형편없고 욕심이 많고 감정도 많고 고통스럽던 자신이 염불을 충실하게 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고 소임을 열심히 보면서 그 많던 괴로움이 없어졌다면 효과를 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때까지 해 왔던 것을, 가부좌를 틀고, 자세를 똑바로 하면서, 눈을 뜨고, 벽을 대할 때,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제대로 되어 있는지 제대로 되어 있지 못한 지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 것입니다. 제대로 되어 있다면 유지하면 되는 것이고 제대로 되지 못했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아서 바로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벽을 대하면서 마음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벽을 향해 앉아 있으면 벽만 보이지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없다고 하면 송장이 앉아 있거나 고깃덩어리가 앉아 있는 것입니다. 고깃덩어리는 앞에 벽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밖에 종소리가 나더라도 종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찬바람이 불어도 찬 줄 알지 못합니다. 고깃덩어리는 송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깃덩어리, 송장 속에 각기 주인공, 말하자면 마음이라는 자가 앉아서 눈을 뜨고 있으니까 앞에 벽이 보입니다. 그때 목탁 소리가 나거나 종소리가 나면 목탁 소리나 종소리가 들립니다. 찬바람이 불면 찬 줄 압니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알기 위해서 특별한 기술이나 재주나 생각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어떤 마음을 깨닫는다는 것일까요?
마음을 깨닫지 않아도 종소리가 나면 종소리인 줄 알고 찬바람 불면 찬바람인 줄 압니다. 눈앞에 벽이 있으면 벽인 줄 압니다. 마음을 깨닫지 못해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뿐이겠습니까? 벌레, 짐승, 미물, 곤충까지 똑같이 다 압니다. 깨달은 사람만이 알고 깨닫지 못한 벌레나 짐승들이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왜 보이고 들리고 아느냐고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답을 해야 합니까? 왜 저 소리가 들리고 왜 앞에 벽이 보이고 산이 보이고, 찬바람이 불면 왜 찬 줄 아느냐고 물어보면 무엇이라고 대답을 해야 하겠습니까?

너무 간단한 질문이고 답도 간단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대답하면 그때 서야 “나도 알았다.”라고 합니다. 왜 앞의 물체가 보이고 밖의 소리가 들리고 찬바람이 불면 찬 줄 아는가 말입니다. 더러는 이 질문을 듣고 골똘히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알도록 해주기 위해서 조금 시간의 틈을 주고, 다시 묻습니다.
“다시 묻겠다. 소리가 나는데 듣지 못하고 앞에 벽이 있는데 보지 못하고 찬바람이 불면 찬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왜 그런 것인가. 자네는 잘 듣고 잘 보고 잘 알고 있는데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은 왜 그런 것인가?”
‘그런 사람이 있는가? 나는 이렇게 잘 듣고 잘 보고 잘 알고 있는데.’
혹시 귀가 먹었든지 눈이 고장 났다고 하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구든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한 참 생각해도 답이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모르겠느냐?”
알 듯 말 듯 하면서도 답을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뻔하지 않나. 왜, 잠자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잠을 깨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이다.”
잠을 자고 있거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은 종소리가 들려도 모르고 벽이 앞에 있어도 보이지 않고 찬바람이 불어도 찬 줄 모릅니다. 만일 잠에 빠지지 않고 딴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누구든지 똑같이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앞에 물체가 오면 물체인 줄 알고 찬바람이 불면 찬 줄 압니다. 그것이 자신입니다.

너도, 나도, 부처님도 알고 벌레도 미물, 곤충도 똑같이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아는 데에는 특별한 기술이나 재주나 생각이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하게 되면 소리도 듣지 못하고 보지도 못합니다. 그것이 자신이요 마음입니다. 자동으로 모든 것을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일체중생 개유불성(一切衆生 皆有佛性)’이라, 일체의 중생이 불성을 갖추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불성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알고 앞에 물체가 오면 물체인 줄 알지요. 눈이 아는 것이 아니라 눈을 통해서 빛이 들어온 것입니다. 귀를 통해서 소리가 들어온 것입니다. 피부를 통해서 찬 것이 들어왔는데 빛이요, 소리요, 차가운 줄 아는 것은 눈도 귀도 피부도 아닙니다. 자신입니다.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없는 곳이 없습니다. 엎어지면 엎어진 줄 알고 있는 놈, 괴로울 때 괴로운 줄 아는 놈이 마음이고 화가 나면 화를 내는 줄 아는 놈이 마음 아닙니까? 우리가 마음을 떼어 내고 살 수 있습니까. 골치 아픈 일이 있다고 해서 마음을 떼 낼 수 있나요. 무슨 짓을 해도 무슨 생각을 해도 무슨 모양을 지어도 자기 자신입니다. 다만 모양을 이랬다저랬다 바꾸고 있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옛 선사들이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 “마음을 깨닫기 위해서”라는 이 말도 우습습니다. 깨칠 필요도 없는데 깨닫기 위해서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깨닫고 보니 “깨칠 필요 없다.”라는 것입니다. 왜, “본래 알고 있었는데….” 이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헤매게 되겠지요.

그래서 같은 마음이로되,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 이렇게 두 사람이 있다고 봅시다. 깨달은 사람도 깨닫지 못한 사람도 똑같습니다. 똑같다는 것은 만약 종소리가 났다고 하면 깨달은 사람도 종소리인 줄 알고 깨닫지 못한 사람도 종소리인 줄 압니다. 그 외에도 똑같습니다. 그런데 깨달은 사람과 깨닫지 못한 사람이 다른 것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종소리인 줄 알지만, 종소리가 나자마자 이러쿵저러쿵 ‘무엇을 해서 깨닫겠다.’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환경에 부딪히면 마음이 흔들리며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리고 취사분별을 합니다. 뜻대로 안 되니까 감정이 일어나고 괴롭습니다. 바보가 아니기에 종소리인 줄은 똑같이 알지만, 온갖 쓸데없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종소리가 들릴 때마다 귀찮다, 시끄럽다, 보내버려라, 어떤 것은 쫓아버려라, 이렇게 취사분별을 합니다. 그것이 뜻대로 안 되면 괴롭고 답답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종소리가 났다고 해서 괴롭거나 좋을 것도 없고 어떤 물건이 왔다고 해서 괴롭거나 좋을 것이 없습니다. 그때그때 환경에 맞춰서 너무 춥다면 얼어 죽지 않도록, 너무 더우면 더위를 먹지 않도록 자신을 알고 적절하게, 일상생활 행주좌와(行住坐臥)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재주가 있고 머리가 좋지만 어리석은 짓을 합니다. 안되는 짓을 하는 것이 어리석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깨달았다고 하면 무엇을 깨달았다고 합니까? 마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무엇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까? 마음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깨닫지 못한 사람은 마음이 도망가서 없어지고 깨달은 사람은 멀리 있던 마음이 돌아온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야 깨달았거나 깨닫지 못했거나 똑같이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그다음에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복잡해지고 괴로워지고 답답해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괴롭고 답답한 생각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처음 선방에 왔을 때도 “마음을 깨닫기가 세수하다가 코 만지기보다 쉽다.”라고 들었습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이렇게 잠을 자지 않고 애를 써도 깨달아지지 않는데 만약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전생에 공부를 많이 해서 그렇겠지. 우리가 이제 선방에 들어왔는데 그렇게 쉽게 되겠는가.’라고 생각을 해보신 적도 있으실 겁니다. 훗날 어떻게 노력을 해서든지 무엇인가 알아차리고 깨달았다고 보면, 그 말은 100% 맞는 말입니다.
깨달았다는 것은 본래 알고 있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서 아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과 관계없이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벌레도 알고 나도 알고 너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옛 기록에, 이런 문답이 있습니다.
“차 마셔보라. 맛이 어떠냐. 차 맛을 알고 있지? 그래. 차 한 잔 마시고 가라.”
“이 차 한잔 마시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닙니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불법을 깨닫기 위해서 왔습니다.”
“자네가 말한 불법은 이름이 불법이지, 불법의 내용에 대한 실제 것은 모르는군. 그 불법을 나는 알기 때문에 너에게 알게끔 하기 위해서 차를 권했다. 차 맛을 알고 있기에 되었다고 한 것이다.”
“스님께서는 되었다고 하지만 저는 된 것이 없습니다.”
“차를 마시고 차인 줄 아는 그것이 네가 알고자 하는 불법이니라.”

이 소리를 듣고 홀연히 깨달은 사람도 있습니다. 이 소리를 알아들으면 여기에서 마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것이라고 알면 예불을 하든, 일상생활을 하든, 배고플 때 밥 먹을 줄 알고 목이 마를 때 물 마실 줄 알면 된다고 했던 옛 선사의 법문을 확인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보같이 물속에 있으면서 물을 찾고 있었다는 비유에 딱 맞습니다.
이 이외에 진리니 불법이니 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생각이요, 망상분별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용케 그런 말씀을 듣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깨달았다고 봅시다. 자신의 도반들은 여전히 애를 쓰고 헤매는 모습이 보이잖아요. 어떻게 해 주어야 할까요? 혼자 편안하게 차나 마시고 편안하게 있을 수도 없잖아요. 조금 전 자신도 깨닫지 못한 사람처럼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말 한마디 듣고 모든 생각을 벗어나 버리고 해탈의 경지에서 일상생활을 보고 듣고 생각하고 있는데 깨닫지 못한 사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만히 들여다보니까 ‘아, 이런 차이가 있구나.’ 하고 발견하게 됩니다. 모든 학문, 지식, 불법이라는 것이 머릿속에 너무 꽉 차 있습니다. 결국, 지식이라는 것은 알음알이, 생각들입니다. 거기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그것을 불법이라고 생각하고 불성이다, 부처다, 열반이다, 조사다, 선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름에 불과할 뿐입니다. 실제 그런 것은 없습니다. 모두 환상입니다. 하지만 망상분별이 너무 심합니다. 설명해줘도 다시 이렇게 저렇게 분석을 합니다. 거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계속 헷갈려서 그런 것이지, 그것을 말 한마디로 몽땅 알아듣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차분하게 하나하나 알아듣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옛 조사 스님께서는 모든 망상분별, 마음이 모든 생각에 흐트러져있는 것을 100이라고 한다면 90으로 줄이고 80으로 줄이고 50으로 줄이고 30, 20, 10, 5, 2, 1이 되었다고 봅시다. 하나만 있을 때는 천 가지, 만 가지 헷갈릴 때보다는 낫겠지요. 일체 생각이 없는 것까지 끌어다 놓으면, 그때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라, ‘무념처’라는 것은 생각이 끊어진, 생각이 없는 자리입니다. 여러분, 생각이 없는 자리에 대해 생각해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지금은 이것을 해야 할까, 저것을 해야 할까, 화두를 들어야 할까, 전부 생각이 있습니다. 아까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생각 때문에 소리도 듣지 못했고 앞의 물체를 보지 못했고 찬 것도 찬 줄 몰랐습니다. 왜 몰랐는가 하면 잠자고 있거나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몰랐지, 잠에 빠져 있지 않고 복잡한 생각에 가리지 않으면 마음을 저절로 아는 그것이 마음입니다.

모든 생각이 떨어져 버리니까 여태까지 앞에 안 보이던 벽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말 이해됩니까? 그 무엇인가를 챙기느라고 벽이고 뭐고 소리고 뭐고 귀찮고 오직 그 챙기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차츰차츰 다른 생각들이 줄어들고 그 일념조차 없어져 버리니까 소리도 저절로 들어오고 앞의 물체도 보입니다. 그런데 왜 이때까지 안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것일까요? 무엇인가 마음을 가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리고 있던 것이 혼침(昏沈)이고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입니다. 염불이고 기도고 생각이라는 것은 몽땅 망념입니다. 그것이 떨어져 버리니까, 없어지니까 저절로 벽이 보이고 저절로 소리가 들리고 저절로 찬 줄 압니다. 그것을 무심(無心)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으니까 소리도 들리고 물체도 보입니다.

어떤 사람은 무심이라고 하면 아무 생각도 없이 눈 감고 소리도 못 듣고 보지도 못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것이 무심은 아닙니다. 마음을 영특하게 아는 것이 마음입니다. 마음이 알지 못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가린 것입니다. 무슨 생각이라도 가리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괜히 우리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심이려고 하면, 생각을 털어버리면 그만입니다. 앞의 벽이 보이게 하려면 아무런 생각 없이 눈 뜨면 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을 못 본다면 틀림없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남대문에 가고 있거나 어딘가에 놀러 가고 있거나 아니면 어떤 적멸보궁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환상 속에 묻힌 것입니다. 환상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이 지어낸 것입니다. 환상이 가리면 눈앞의 실제 산이고 나무요 종소리가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무심은 소리가 들리고 보일 때입니다. 아까 여러분들에게 왜 보이는지와 안보이는지 물었습니다. 그리고 혼침이나 딴생각에 묻히면 소리도 보지 못하고 물체도 보지 못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역력히 들려옵니다. 이 이상 아무런 허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자세에서 가만히 벽을 보고 있으면, 벽을 보고 있을 때 벽이 보인다고 하는 것이 자기 자신이고, 만약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딴생각에 사로잡혀 있거나 혼침에 빠져 있거나 둘 중 하나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역력하게 보입니다. 또 소리가 난다면 소리가 들립니다.

이것이 얼마나 유지가 되는지 알기 위해서 잠시 앉아보자고 합니다. 잠시뿐입니다. 10분만 앉아 있어도 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왜, 잠에 빠진 것입니다. 아니면 딴생각을 사로잡힌 것입니다. 마음이 온전치 못하다는 것은 산란심(散亂心)에 빠져 있거나 또 혼침에 빠진 것 둘 중 하나입니다. 산란하지도 않고 혼침도 아니며 똑똑히 역력히 아는 것을 공적영지(空寂靈知)라고 합니다. 공적은 텅 비어 있다는 것입니다. 텅 빈 속에서 똑똑히 알기 때문에 허공과 다릅니다. 허공은 텅 비어 있지만, 알지 못합니다. 마음은 허공처럼 모양 없이 텅텅 비어 있는 모습이지만 허공과 다른 것은 허공은 찬 것이 와도 찬 줄 모르고 종소리가 나도 종소리인 줄 모릅니다. 마음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지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눈만 뜨면 알기 시작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으로 산란합니다. 산란 속에 종소리도 듣고 모든 물체를 보다 보니 온갖 마음속 좋고, 나쁘고, 취사분별로 마음이 답답하고 괴로운 것입니다.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답답하고 괴로운 것이지 마음이 산란하지 않다면 괴로울 것이 뭐가 있습니까. 편안하게 살면 되지 왜 산란하게 하는 것입니까. 또 피곤하면 자기도 모르게 혼침에 빠집니다.

일단 마음을 먼저 확인해야 합니다. 가만히 앉아서 일체 생각을 딱 털어버리고 앉아 있을 때 종소리 나면 종소리인 줄 아는 이것이, 앞에 물체가 오면 물체인 줄 아는 이것이 자신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남의 마음입니까? 자신의 마음 아닙니까? 이것은 깨닫고, 깨닫지 않고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도 이것이 자기의 마음이고 깨달은 사람도 이 마음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것을 무시하고 이것 이외에 따로 무엇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생사윤회(生死輪廻)를 하며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천 번 만 번 생각하다 생각하다 결국 기진맥진해서 ‘아이고, 모르겠다.’ 하고 뻗었을 때, 갑자기 종소리가 ‘땅’ 하고 나자, ‘아, 이제야 보니 종소리로구나.’ 하고 알아차립니다. 어제도 그저께도 종소리였는데 자신이 몰랐다는 것은 마음속에 무엇을 얻고자, 깨닫고자, 구하고자 하는 생각이 가리기 때문에 종소리가 들어오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은 기진맥진해서 다 놓아 버리니 저절로 종소리가 들어오는 것이지요. 그래서 ‘중생본래성불(衆生本來成佛)이라는 말이 이런 뜻이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면 설사 한 생각 돌이켜서 이 자리에서 깨달았다고 봅시다. 깨닫기 전에 욕심이 많고 온갖 감정을 가진 사람이 순간적으로 깨달았다고 해서 옛날의 그렇게 많은 욕심이 동시에 없어지겠습니까? 그 습관은 그대로 있을 것입니다. 습관을 속에 지니고 있으면서 종소리를 듣고 물체를 보았습니다. 종소리 듣고 보고 있을 때는 순간적으로는 욕심의 감정이 일어나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 자리에서 알았다고 해서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바깥에서 온갖 소리가 난다고 하면, 사람에 따라 같진 않겠지만, 돈에 대한 욕심, 먹는 것에 대한 욕심, 기타 여러 가지 욕심을 가진 사람은 바깥의 소리만 들어도 벌써 마음이 그리로 갑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깨닫기 전 평소에 담박하고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은 깨달음과 동시에 그런 소리를 들어도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워낙 거기에 젖은 사람은 깨달았지만, 술 냄새를 한번 맡아도 생각이 술집에 가 있고, 고기 얘기 들으면 고기 생각이 납니다. 그때는 벽도 안보이고 소리도 들리지 않지요. ‘앗 이렇게 하면 안 되지, 그런 생각을 일으키면 안 된다.’라며 다시 앉아보지만, 벽이 보이지 않습니다. 자신의 욕심에 생각이 가로막힙니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할 수 없이 욕심이나 감정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악이라고 본다면, 그것을 대처하는 선한 마음, 욕심이 탐심이라면 반대는 보시하는 생각, 남을 죽인다면 구제해야 한다는 자비심으로 바꿔서 악심을 선심으로 교체하는 것 밖에 안 됩니다. 이렇게 선심을 오래오래 지니고 있다가 악심이 사라져버리면 선심도 버려야 합니다. 악심이 남아있는데 선심을 쓰지 않으면 악심이 점점 나타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악심이 떨어질 때까지 선심을 절대 버리지 말고 챙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욕심이나 감정이 없다면 딱 털어버리면 됩니다. 명실공히 마음속에는 선심도 없이 일체 마음이 없을 때 벽이 바로 들어오는 것 아닙니까. 그것이 무심입니다.

청산첩첩 미타굴(靑山疊疊彌陀窟)이라, 푸른 산이 부처가 될 리 있나요? 푸른 산이 보일 때 그 마음을 부처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이해되시지요? 확인해 보십시오. 각자 벽을 보고 있으면 벽이 보입니다. 이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금방 이 생각 저 생각 뭐도 챙겨야 하고 각자 무엇엔가 사로잡힙니다. 여기서 “이렇게 벽을 보기만 하면 뭐합니까? 마음을 깨달아야지요.” 이렇게 반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면 어떤 마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벽은 누구든지 볼 수 있는데 이것을 깨달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경우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네가 깨달은 사람을 찾아가서 물어보거라.” 그래서 그 사람이 깨달은 자를 찾아갔다고 합시다.

“당신은 무엇으로 깨달았습니까? 솔직하게 가식을 붙이지 말고 일러 주십시오.”
“자네가 내 말을 믿겠느냐?”
“네. 믿겠습니다.”
그러면 깨달은 자는 차를 한 잔 따라주면서,
“이것이 차인 줄 알지?”
“네.”
“이것을 알았느니라.”

이렇게 말할 겁니다. 벽이 보이는 이것, 바로 이것이라는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말 한마디 듣고 알 수 있는데 10년 동안 왜 그렇게 고생을 해야 했습니까? 설사 말 한마디로 알았다고 봅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60분 동안 앉아 있어 보면 60분 내내 이 벽이 자신의 눈을 떠나지 않고 지켜보고 있습니까? 금방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버릇입니다.

소리가 나면 자연스럽게 알듯이 찬 것이 오면 자연스럽게 알듯이 우리는 자연스럽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닙니다. 앉아 있으면 자연스럽게 다른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쁜 버릇이 있습니다. 그럴 때, ‘앗 이러면 안 되지.’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됩니다. “정신 차려라.”라는 표현은 이럴 때 하는 말입니다. 정신 차리려고 해도 벌써 잠에 빠지고 남대문, 서울, 자갈치로 돌아다니기 때문에 “정신 차려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사람마다 다릅니다. 심한 사람도 있고 전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전혀 없는 사람은 깨닫자마자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하겠지요. 일상생활을 배고플 때 밥 먹고 목마를 때 물 마시면서 즐겁게 사는 것이 그대로 수도자(修道者)입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놀기만 했던 사람은 온갖 욕심, 감정으로 마음의 기복이 심할 것입니다. 그것이 벽을 지켜보고 있으면 어떤 현상이 있는가, 벽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하면 눈을 감고 있거나 졸고 있거나 아니면 다른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생각을 안 하면 벽이 보이는데, 마음속의 온갖 생각의 그림자가 환하게 보입니다. 생각은 환상이기 때문에 환상의 그림자를 통해서 벽이 보이고 푸른 산이 보입니다. 그것을 오래 지켜보면 행주좌와 중에 앉아 있을 때는 앉아 있는 모습, 일하고 있을 때는 일하는 모습, 글씨를 쓰고 있을 때는 글씨를 쓰는 모습이 그대로 보이는데 일반 사람들은 생각에 사로잡혀서 글씨를 쓰면서도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고, 벽을 보고 있으면서도 마음은 다른 곳으로 가 있습니다. 이제는 마음이 다른 곳으로 가고 있진 않지만, 이 속에서 온갖 생각들이 오고 가는 이것이 보입니다.

이것을 오래 보면 차차 없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안개 속에서도 단풍 구경을 하라고 하면 단풍 경치가 보여서 기분이 좋다고 하는데 만약 그 안개가 없어지면 어떻습니까. 안개 속에서 보고 있는 빛깔과 안개 없을 때 빛깔이 같겠습니까? 하늘과 땅 차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극락세계입니다.

‘일심이 청정하면 국토가 청정해지고, 일심이 흐리면 국토도 흐리다.’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맑으면 몸은 마음의 그림자여서 몸도 맑아지고, 마음이 혼탁하고 어두우면 몸도 그림자이기에 혼탁하고 병이 난다. 마음이 맑아지면 일체 병이 사라진다.’라는 말도 같은 뜻입니다. 앉아 있을 때 벽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렇게 ‘정신이 혼탁한가.’ 이렇게 알아야 합니다. 벽에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은 정신이 너무 혼탁하다는 뜻입니다. 너무 바쁘게 돌아다녔다는 뜻입니다.

정신이 맑은 사람은 한 시간 동안 그대로 앉아 있습니다. 종소리도 잘 들리고 잘 보입니다. 얼마나 속이 시원합니까. 예불 때가 되면, “자, 예불하러 갑시다.” 공양 때가 되면 “공양하러 갑시다.” 울력할 때가 되면 “일하러 갑시다.”라며 하나도 놓치지 않고 소소영영(昭昭靈靈)하게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여기에 비추어보면 자신이 어느 단계에 있는지 환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면벽관심, 벽이 보이지 않는다면 벽이 보이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 시간 동안이라도 자신의 눈에 벽이 사라지지 않도록 보고 있다면, 이때까지 보지 못했던 자신과 지금 벽을 보고 있는 자신은 몸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이때까지 몸이 찌뿌둥하고 무엇인가 박혀 있는 것 같던 것이 싹 바뀌고 기운이 새로워집니다. 마음이 맑아졌기 때문입니다. 모든 근본은 바로 이 에너지 파워입니다.

제가 너무 시간을 오래 끈 것 같아서 이 정도에 마치고 마지막으로 ‘수심결(修心訣)’ 한 구절을 설명하고 내려가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질문했습니다.
“어떤 식으로 공부를 해야 한번 생각을 돌이켜서 자기 마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좋은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여기에 대한 답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찾는데 거기에 무슨 수단이 있고 방법이 필요한가. 만약 방편을 지어서 깨닫기를 구하고자 한다면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눈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눈이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눈을 보려고 하는 것과 같도다. 이미 자기 눈이 아닌가. 어리석은 놈이 눈을 보려고 하지, 아는 사람은 눈을 보려고 하지 않는다. 보는 것이 눈이지만 눈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이 소리를 듣고 자신에게 눈이 있는 줄 알았다면 다시는 눈을 보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만 알면 그것이 곧 눈을 본 것이 된다. 그렇다면 다시 보려고 하는 생각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보지 못한다는 생각이 있겠느냐. 우리 마음도 이와 같다. 이미 자기 마음 아닌가.”
소리가 나면 소리인 줄 알고 찬 것이 오면 찬 줄 아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놓고 새삼스럽게 무슨 방편이 필요하냐는 말입니다.
“만일 여기에서도 이것을 무시하고 따로 무엇을 알려고 애를 쓴다면 절대 알 수 없다. 다만 마음을 알지 못하는 줄 알면 이것이 곧 견성(見性)이다.”

오늘은 더 상세하게 말씀드리지 못하고 이 정도로 마칩니다.

정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이 법문은 금정총림 범어사 방장 지유 스님이 11월22일 금정총림 범어사(주지 경선 스님) 보제루에서 봉행된 ‘불기 2562년 동안거 결제 법회’에서 설한 내용입니다.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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