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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30주년 특별 인터뷰] 최승천 조계종출판사 부문사장

  • 창간특집
  • 입력 2018.11.27 14:28
  • 수정 2018.11.27 17:18
  • 호수 1466
  • 댓글 0

정론직필·위법망구 품은 ‘법보 범종’ 부조리 사회 일깨우길 기대

시류에 억눌린 불심 추슬러
‘우리 목소리’ 담고자 창간
불교 대중화·사회 민주화
실현 위해 열정 쏟아 부어

호법·비판 충돌은 언론 숙명
설득력·애정결여 일방적 비판
눈 뜬 독자가 먼저 ‘외면’
종교편향 견제는 대표적 호법

최고만 살아남는 언론환경
깊이 담보한 종이 신문에
SNS 등 새로운 도구 결합
정보·속보 위력 배가해야

‘쓴 소리’ 귀 기울여 지면 반영
새 지평 개척에 외연확대 필수
“놀아도 취재 현장서 놀아라!”
선원빈 국장 기자정신 이어가길

최승천 조계종출판사 부문사장은 “30년 세월을 지탱해 온 것만도 대단한 일”이라며 “이제 종이신문의 한계를 극복할 청사진을 치밀하게 준비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사진=남수연 기자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며 뉴스 소비가 급증하고 있는 반면 광고는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언론의 생존마저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교계언론 역시 이 선상에 놓여 있는 가운데 ‘법보신문’도 ‘생존·전법’이라는 은산철벽을 마주하고 있다. 그러나 “길을 떠나라!”는 부처님 전도 선언은 오늘도 지면을 통해 끊임없이 실현해 가야 한다. 30년 전 첫 발을 내딛으며 품었던 초심(初心)에서 화두의 실마리를 찾아보려 ‘법보신문’ 창간 멤버였던 최승천 조계종 출판사 부문사장을 만나 대담을 나눴다.

‘주간불교’의 전신인 ‘불교회보’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해 ‘법보신문’, ‘천태종보’, ‘월간 금강’ 등에서 기자직을 수행했다. 조계종출판사 편집부장을 거쳐 현재 대한불교조계종지주회사(주)도반HC 산하 조계종출판사에서 부문사장직을 맡고 있다. 1996학년도 석사학위(동국대 불교대학원) 논문인 ‘불교포교에 있어서의 대중매체 활용 방안’을 통해 작금의 현실을 예견하며 불교 언론의 역할과 가야할 방향을 제시한 바 있다.

최 사장은 대담을 통해 교계언론의 숙명이라 할 수 있는 ‘비판·호법’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설득력과 애정이 결여된 일방적 비판은 독자들이 외면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종이신문의 한계점에 다다르고 있는 현재 영상과 인터넷, 모바일 시대에 걸맞은 청사진을 철저하게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아울러 외연확대를 통해 법보신문의 지평을 좀 더 넓혀주기를 당부했다.

 

최승천 조계종출판사 부문사장은 “기자라면 놀아도 취재 현장서 놀아야 한다고 호통 쳤던 선원빈 국장의 기자정신을 후배들이 계속 이어가주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1988년 법보신문사가 첫 닻을 올릴 때 창간 멤버였습니다. 교계 언론과의 인연이 궁금합니다.
“선원빈 창간 편집국장과의 인연에서 비롯됐습니다. 내키지 않는 전공(기계공학) 수업보다 불교학생회 선후배와의 만남이 더 좋았던 학창시절을 보냈지요. 학교 운동장 너머 백운암에서 서옹 큰스님의 법문을 들었고, 철야정진 한다며 가끔 절에서 먹고 자던 생활을 했습니다. 그때 절에 오는 신문이 격 주간으로 발행된 ‘불교회보’였습니다. 궁금했던 불교교리와 신행활동, 스님들의 이야기 등을 밑줄 쳐가며 읽었습니다. 졸업을 앞둔 85년 여름 ‘불교회보’에 기자모집 공고가 났습니다. 바로 지원해 필기시험과 면접을 거쳐 합격통보를 받았지요. 당시 편집국장이 3년 뒤 ‘법보신문’을 창간한 선원빈 국장이었습니다. 40대 중반의 백발이 성성한 선 국장은 선비 스타일이었습니다. 첫 출근한 저에게 “6대 1의 경쟁을 뚫고 들어온 인재”라며 축하와 격려의 말을 건네주셨습니다. 그 말 한마디가 오늘의 저를 있게 한 근원이었습니다.”

▶ 그러니까 ‘법보신문’ 입사는 경력기자로서 한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불교회보’ 재직 중 제호가 ‘주간불교’로 바뀌었습니다. 부모님은 작은 신문의 기자직이 장남인 저의 안정된 자리가 아님을 늘 걱정하셨습니다. 부친의 강력한 권유로 친척이 운영하는 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하기 위해 부득이 9개월 만에 퇴사했습니다. 하지만 낮에는 회사에서 일하고 저녁과 주말에는 견지동 조계사와 인사동 주변을 맴돌았습니다. 그때도 선 국장님을 자주 찾아뵈며 교계와의 인연을 이어갔습니다. 1988년 초 ‘법보신문’ 창간 준비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선 국장께 다시 불교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반가운 마음을 내시더군요.”

▶월산 스님의 원력이 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종상 스님이 사장직무대행, 정휴 스님이 주간·주필이셨습니다.
“월산 스님은 창간 준비를 하면서 처음 친견했습니다. 첫 만남에도 저절로 머리를 숙이게 하는 위엄을 갖추신 스님이었습니다. 불국사에서 직원들에게 보살계를 내리면서 ‘틈나는 대로 참선수행을 해보라’는 권유를 하시곤 했습니다. 종상 스님 역시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소유한 분이었습니다. 실질적인 사주로 직원들을 격려하는 자리에 자주 참여했지만, 지면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지면에 관한 책임은 정휴 스님이 지고 있었습니다. 주제를 정한 뒤 한두 시간 만에 칼럼과 사설 원고를 건네는 집필력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초년병 기자인 제게 무한한 감동을 주었던 스님입니다.”

▶얼마 전 입적하신 설악산 오현 스님이 상임논설위원을 맡으셨지요?
“오현 스님은 당시 절문 밖에 사는 야인이었습니다. 정휴 스님과 허물없이 지냈지요. 분명히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데도 두 분은 마치 어릴 적 친구같이 편한 농담을 하시곤 했습니다. 제겐 재가와는 다른, 스님 세계를 한발 다가가 엿보는 계기가 됐습니다. 상임논설위원이었지만 논설은 쓰지 않았습니다. 대신 광고 수주에 열심이셨죠. 교구 본사와 수말사에 전화를 걸어 광고를 약정하고 나서 ‘내도 오늘 밥값 했지요!’라며 크게 웃으시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창간호 머리기사는 ‘새롭게 일어서는 불교구현’이었습니다. 한국불교의 좌표를 제시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습니다.
“한국불교는 조선왕조의 숭유억불 정책으로 인해 숨죽이며 살아야 했는데, 6.25 한국전쟁 전후 급속히 들이닥친 서구종교 유입으로 위기마저 맞이했습니다. 그 고난을 극복하기도 전에 군사·독재 체제 속에서 또다시 움츠리고 있어야 했지요. 그렇게 보낸 세월이 600년입니다. ‘새롭게 일어서는 불교’란 시대적 분위기에 억눌려왔던 불자들의 마음을 추슬러 세상을 향해 우리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자는 선언이었습니다. 이웃종교는 날로 성장하고 불교 세는 점점 위축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한국불교의 통합 또는 연합의 기치를 내건 것입니다. 한국불교 전체를 아우르는 범불교지로 출발한 연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또한 민주화 시대를 열어가는 길목에서 불교가 제 역할을 수행해 가겠다는 의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6·10 항쟁 직후 타오른 국민적 민주화 열망을 올곧이 품겠다는 것이었지요. 아울러 무속·산중불교에 고착화한 풍토를 변화시켜보자는 원력도 담겨 있습니다. 창간 초기부터 청소년·도심포교, 보시·봉사, 교리강좌, 재야단체 등의 관련 기사가 비중 있게 다뤄진 이유입니다. 무위도식·막행막식 하며 승단을 호구지책으로 생각하는 세력에는 ‘임제 할(臨濟 喝)’을 과감히 내리겠다는 용기(?)도 배어있습니다. 머리기사는 선 국장이 쓰신 걸로 기억합니다.”

▶‘천수천안의 거보(巨步)’ 제하의 창간 사설에서는 ‘사회 비리를 묵인하는 아세(阿世)의 지성을 배척할 것’이라고 천명했습니다. 진보색채가 짙어서인지 발행 초기부터 기관원들의 필독지였다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전두환 정부가 막을 내렸다고 하지만 민주화는 이제 막 뿌리를 내리던 시기였습니다. 군사·독재 잔재가 여전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을 때였습니다. 민주화 기틀에 맞는 사회 구조 변화도 꾀할 때였습니다. 기획기사, 칼럼을 통해 사회 부조리를 심도 있게 파헤치며 부처님 말씀에 기반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정부 집권층에서 보면 달갑지 않은 기사가 1면 머리를 장식하기도 했지요. 당시 안기부, 보안사, 치안본부, 종로서 등의 ‘관선기자’(정보 수집 활동을 하는 기관원의 별칭)들은 이번 신문엔 어떤 기사가 나오느냐며 물어오는 일도 빈번했습니다. ‘법보신문’ 기사의 크기나 논조, 그리고 기자들의 움직임이 기관 정보 보고의 대상이 되는 시절이었습니다. ‘한겨레’ 신문 사회부 종로서 출입 기자는 ‘법보신문’이 아예 그의 출입처였습니다. 틈만 나면 ‘법보신문’ 기자들과 어울렸고, 그 덕에 ‘법보신문’과 ‘한겨레’가 동시 특종을 하는 일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창간 사설은 정휴 스님이 쓰셨던 거로 기억합니다.”

▶편집국은 ‘정론·직필’을 캐치프레이즈로 걸었습니다. 기자들의 자긍심도 대단했을 듯합니다. 특히 선원빈 국장님의 역할이 지대했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취재 현장에 나가면 반가워하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아마 ‘법보신문’ 기자들이 다른 신문 기자보다 좀 더 부지런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불교계 청년·재야단체와 태고종, 천태종, 진각종 등 조계종단 밖에서 ‘법보신문’ 기자들을 환영했습니다. 새 신문 프리미엄도 있었겠지요. 앉아서 자료를 받기보다는 최대한 현장에 가보라는 것이 선 국장님의 가르침이었습니다. 기자들이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 “취재 안 하고 뭐 하는 거냐!”며 호통을 치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놀아도 취재 현장에 가서 놀아라”라는 말로 다독이기도 했습니다. 방송과 인터넷이 지배하는 지금과 달리 그때는 종이신문의 1단 기사도 힘을 발휘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상대적으로 ‘법보신문’에 기사가 나가는 걸 불편하게 여기는 분들도 있었지요.”

▶창간 직후 1년 동안 시론 필진이 매주 바뀌었습니다.
“기사도 중요하지만 칼럼이 지면의 색깔을 결정합니다. 시대의 변화를 읽고 독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글, 그리고 그 변화에 대비하는 내용의 글들이 지면을 장식했습니다. 필진 선정을 위해 정휴 스님과 선 국장께서 애쓰셨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젊은 기자들의 시각을 이해하고 받아준 두 분의 넓은 품과 지면에 간섭하지 않는 사주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불교언론의 역할, 또는 지향점은 어떤 것일까요.
“일반적으로 신문의 기능을 논할 때 보도, 논평, 오락, 광고의 기능 등으로 나눠 이야기합니다. 불교언론은 무엇보다 독자들에게 불교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객관적으로 알리는 일이 가장 중요하겠지요. 다음은 일어난 사실들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뉴스와 사설 등을 통해 논평하며 여론을 환기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불교신행에 도움이 되는 다양한 읽을거리를 제공해 즐거움을 주고, 나아가 불교공동체의 경제순환을 위해 광고의 수단을 제공하는 일입니다. 첫 번째의 정보전달과 함께 중요한 기능이 논평, 즉 비판의 기능입니다. 이 부분의 강도(强度)에 따라 매체의 성격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불교계 내부의 잘못된 점을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아주 기본적인 불교언론의 역할입니다. ‘법보신문’ 창간 이후 언론매체가 다양해지면서 상대적으로 불교언론의 비판기능과 역할이 매우 활발해진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든 비판에는 비판대상에 대한 설득력과 애정이 담겨 있어야 합니다. 행여나 사견이나 감정이 들어갈 경우 눈 밝은 독자들은 외면하기 마련이지요.”

▶ 비판·감시 기능과 함께 전법(傳法)·호법(護法)의 역할도 중요하다고 보는데요.
“그렇습니다. 일반 상업언론과 다른 점이지요. 헌법이 보장하는 종교의 자유 범위 내에서 불교언론은 마땅히 포교와 전법, 그리고 호법의 도구여야 합니다. 불교의 장점을 널리 알리고, 법망을 벗어난 종교편향에 대해 외호하며 교계 안팎에 비판여론을 형성하는 일이야말로 불교언론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역할이라는 생각입니다. 언론 현장에서는 비판 기능과 호법 기능이 서로 충돌할 때도 있을 겁니다. 어디까지 비판하고 외호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늘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불교 언론인들이 고민해야 할 과제이겠지요. 다만, 승가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한 호법이어야 하고,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의 수행공동체로 거듭나기 위한 비판이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해 주었으면 합니다.”

▶ 법보신문의 30년을 평가한다면?
“한 언론을 평가하는 일은 간단치 않습니다. 여러 학술적인 기법이 동원돼야 합니다. 언론학자의 몫이지요. 창간 멤버로서, 인생의 중요한 시기인 30대의 전부를 그곳에서 보냈던 사람으로서 무한한 애정을 품고 있습니다. ‘법보신문’은 불교계에서 영향력이 큰 언론으로서 우뚝 섰습니다. ‘법보신문’ 이후 ‘해동불교’, ‘대한불교’, ‘동국불교’, ‘국제불교’, ‘시대불교’, ‘중앙불교’ 등 여러 신문 매체들이 생겼다 사라져갔습니다. 30년의 세월을 지탱해 온 것만도 대단한 일입니다. 당부할 게 있다면 종이신문의 한계를 극복할 청사진을 철저하게 준비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영상과 인터넷, 모바일 시대에 걸맞은 다양한 도구들을 활용해 보완해야겠지요. 깊이를 담보한 종이신문에다 SNS 등 새로운 도구들을 결합해 정보와 속보에서 위력을 발휘하도록 하는 게 최근 추세입니다. 교계 밖 언론계에서는 ‘최고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이 회자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최고를 지향해야 할 법보신문이 풀어야만 할 과제가 하나 있다면 외연확대라고 봅니다. 창간 때나 지금이나, 그리고 30년 후에도 법보신문에게 주어질 화두일 것입니다. 그리고 넓은 포용력으로 쓴 소리 하는 사람이 있다면 찾아가 차 한 잔 대접하며 귀담아 들어주세요. 법보신문의 지평을 조금이라도 더 넓게 열어주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정론직필·위법망구의 창간 정신을 잃지 않는 한 ‘법보신문’은 세상을 일깨우는 범종으로 남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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