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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코삼비 비구들의 다툼

기자명 김정빈

"잘 보거라! 다툼의 밑에는 아상이 있느니라

강사 저지른 사소한 파계로 다툼
율사가 강사 허물 제자들에 공개
두 스승 서로 반박하며 갈등 커져
제자들도 서로 패 갈라 싸우게 돼
부처님 간곡한 당부에도 싸우자
결국 부처님 홀로 숲으로 들어가
신자들은 비구들에게 공양 거부
결국 화해후 부처님께 용서 구해

그림=근호
그림=근호

코삼비 지방의 고시타 수도원에 각기 오백 명의 제자들을 거느린 학식 높은 두 비구가 있었다. 두 스승 중 한 비구는 계를 가르치는 율사였고, 다른 한 비구는 경을 가르치는 강사였다.

어느 날 강사 비구가 화장실을 사용하고 나오다가 사소한 계율을 범했다. 계율이 정한 바에 따르면 화장실을 사용한 다음 준비된 물통의 물을 쏟아 변기를 깨끗하게 씻고 나서 물통을 거꾸로 해놓고 나와야만 하는데, 이 비구는 급한 나머지 완벽하게 뒤처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율사 비구가 그 뒤에 바로 화장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율사 비구가 강사 비구에게 물었다.

“형제여, 이것이 계율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모르셨습니까?”
“미처 몰랐습니다.”
“그것은 계율에 저촉됩니다.”
“그렇다면 제가 참회하겠습니다.”

그러자 율사 비구가 말했다.

“행위 자체는 계율에 어긋납니다만,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었기 때문에 반드시 허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율사 비구가 자기 제자들에게 이 일을 말한 데서 시작되었다. 그 말을 들은 율사 비구의 제자들은 강사 비구의 제자들에게 당신들의 스승은 사소한 계율 하나 지키지도 못하느냐며 꾸짖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강사 비구는 율사 비구를 찾아가, 전에는 의도적인 행위가 아니므로 허물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니 일이 이렇게 되도록 만든 까닭이 무엇인지를 따져 물으며 항의했다.

그에 대해 율사 비구는 자기 나름의 반박을 했고, 반박은 재반박을 불러와 언쟁으로 번졌다. 일은 점점 커져만 갔다. 마침내 율사 비구는 자신의 직권을 행사하여 강사 비구가 범계자라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그는 이 허물에 대한 벌로써 모든 비구들은 강사 비구에게 말을 걸지 말아야 하며, 또 그가 무엇을 묻더라도 대답하지 말아야 한다고 판결했다.

두 스승의 불화는 두 스승을 따르는 천 명의 제자들과 그 제자들을 따르는 수 많은 신자들 간의 불화로 점점 확대되었고, 마침내 부처님께서도 이 일을 아시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이 화해할 것을 권하셨다. 초하루와 보름날마다 있는 우포사타를 통해 비구들에게 서로 화합할 기회를 주기도 하셨다. 하지만 그들은 부처님의 간곡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식당과 강당에 모여 끊임없이 상대방을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여러가지 방법을 사용하신 끝에 부처님께서는 극단의 처방을 내리셨다. 부처님께서는 어느 날 코삼비에서 탁발을 하신 다음 홀로 팔릴레이카 숲속으로 들어가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시자인 아난다 비구와 함께 행동하셨지만 그때는 아난다 존자까지도 부처님을 수행하지 못했다. 그 숲속에서 부처님은 팔릴레이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코끼리의 수발을 받으셨다.

코삼비에 사는 재가신자들은 부처님을 뵈러 수도원에 갔다가 부처님이 계시지 않은 것을 알고 비구들에게 부처님이 어디 가셨는지를 물었다.

“부처님께서 숲속에 계신다오.”
“왜 거기에 홀로 계신 것입니까?”

비구들은 사실을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신자들은 화를 내며, 자기들끼리 의논한 끝에 비구들에게 음식 공양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럼으로써 비구들은 큰 곤란을 겪게 되었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두 집단 간에 화해 움직임이 생겨났다.

마침내 두 비구 집단은 화해했다. 그러자 신자들은 비구 스님들이 부처님께로 나아가 용서를 받을 것과 부처님을 다시 수도원으로 모셔올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때가 우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에 그들은 부처님께로 나아갈 수 없었다. 우기가 끝난 다음 비구들은 아난다 존자와 함께 부처님께로 나아가 사죄드리고 나서 부처님으로부터 화해에 관한 설법을 들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다툼을 일으키면 그 피해는 결국 자신에게로 돌아오게 마련이며, 화해를 한다면 그 공덕이 자신의 미래를 훌륭하게 만들게 된다는 내용의 설법을 하셨다. 부처님은 그 사례로서 다른 왕에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자기 아들에게 적왕을 용서할 것을 권한 브라흐마닷타 왕 이야기를 드신 다음 게송을 읊으시었다.

어리석은 자들은 목숨에 끝이 있음을 알지 못하고 무의미한 다툼을 계속한다.
그러나 현자는 이 사실을 잘 알아
모든 다툼을 쉬어버린다.

코삼비 비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들의 잘못을 참회함으로써 초기불교 승단에서 일어난 첫 번째 대규모 불화 사태는 마침내 해결되었다.

다툼이 일어나는 것은 ‘아상’이 있기 때문이다. 다투는 마음의 가장 밑바탕에 ‘나라는 생각’이 있는 것이다. 그 생각에 의해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게 되고, 다시 그 생각에 의해 ‘나’가 침해받았다고 여기는 순간 화를 내게 되며, 화는 다툼으로 이어진다.

“목숨에 끝이 있다”는 것은 내가 ‘나’라고 여기는 그것이 유한하다는 것이다. ‘나’가 유한한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기 때문이며, 변화는 조건에 따라 일어난다. ‘나’를 분석해보면 물질, 느낌, 생각, 의지, 인식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것들 각각은 더 세밀하게 분석되어질 수 있다. 물리학은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면 마침내 가장 작은 입자에 이르지만 그 입자는 입자인 한편으로 파동이라고 말한다. 그것 또한 고정된 형태로서의 ‘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이치를 정신의 수많은 요소들에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의 장(場)에서 수많은 입자들은 조건에 의해 이것이 원인이 되어 저것이 생겨나며, 저것이 원인이 되어 이것이 소멸한다. 조건에 의해 일어났기에 그것은 일어난 것이 아니며(無起), 일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정말로는 소멸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하여 물리적, 정신적인 법계의 모든 사상(事象)들은 불생(不生)이며, 불생이기 때문에 멸할 수 없다(不滅).

난 바 없기 때문에 죽는 바 없는 이 도리 앞에 떳떳하게 세울 만한 ‘나’는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거늘 하물며 사소한 계율을 지키는 것이 그 무엇이며, 지키지 않는 것은 그 무엇인가! 내가 누구의 제자인 것이 그 무엇이며, 내가 그의 제자가 아닌 것은 또 그 무엇인가! 코삼비 비구들의 사례와 현금 우리 불교계와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여러 다툼들을 보면서 우리는 '금강경'이 설하는 ‘아상’을 재삼 음미하게 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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