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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산청 범학리사지(泛鶴里寺址)

기자명 임석규

터는 논밭이 돼 사라지고 국보로 지정된 삼층석탑만 덩그러니

9세기 조성 범학리 삼층탑
일제강점기 도괴된 채 반출

대구서 골동상에 매각됐다
조선총독부 박물관 옮겨져

경복궁 공사로 수장고 소장
최근 진주박물관 이관 결정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작품
제대로 된 연구는 아직 안돼

사지는 계단식 경작지 개간
사찰 관련 유구 찾기 힘들어

문화재는 있던 자리 있어야
사지보존 중요한 이유일 것

산청 범학리사지 조사구역 전경.

최근 언론에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이 77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다는 기사가 났다.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던 국보 제105호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을 국립진주박물관이 전시하기 위해 터파기 공사를 시작해 오는 30일께 복원을 완료한다는 내용이었다. 범학리 삼층석탑은 9세기 무렵 조성된 후 조선시대까지 사찰과 함께 경호강이 바라보이는 둔철산 자락에 자리해 있었다. 원 자리에 허물어져 있던 석탑을 일본인 골동품상이 사들여 산청을 떠나게 되는데, 그동안의 사정은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문서에 자세하게 적혀있다. 그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본 석탑은 산청군 범학리에 있던 삼층석탑으로서 수백년 전 도괴된 신라시대의 지호사 경내에 있었으나 약 30년전 무너져 일부는 땅속에, 일부는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다. 진주사람 정점도가 이 탑에 눈독을 들이고 마을 주민들에게 매각을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었다. 그러자 정씨는 100원을 마을회관 건립비로 기부하였고 주민들은 매각 대신 반출하는 것을 묵인해준다. 농사짓는데 방해되는 석탑을 귀찮게 여긴 것이다. 석탑은 대구까지 운반되었고 대구시내 골동상에게 매각되었다고 한다. 이후 석탑은 대구의 공장 공터에 해체돼 보관됐다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실태조사 때 발견돼 1942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 삼층석탑은 1946년 미군 공병대의 도움을 받아 경복궁 안에 세워졌으나, 1994년 경복궁 정비사업으로 다시 해체되어 23년간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돼 왔다. 진주박물관이 석탑의 진주 이관을 요청해 2017년 2월 이전이 결정되었다.

범학리 삼층석탑이 있던 산청군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군으로서 국립공원 지리산 천왕봉에서 뻗어 내린 여러 줄기의 산세가 군의 서부에 남부에 발달되어 있어 인근 함양군을 비롯하여 거창군, 하동군, 합천군과 서로 경계를 이루고 있다. 산청군에도 불교가 전래되어 많은 사찰이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신라 때 응진(應眞)스님이 창건하고 고려시대엔 선종 5대 산문의 하나로 꼽히던 지곡사지를 비롯하여 ‘삼국유사’에도 등장하는 단속사지, 비로자나불로 유명한 내원사, 신라 때 연기조사가 세운 법계사와 대원사, 심적사 등이 알려져 있다. 범학리는 본래 산청군 수곡면에 속하였는데 범학사라는 절이 있으므로 범학, 범학동이라 하였다고 한다. 범학이라는 이름은 ‘산청지명고’에 의하면 “옛날에는 범학사가 있었고, 범학이라는 명당이 있다하여 풍수설에서 생긴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범학사’라는 사찰의 명칭이 정확한 것은 아니다. 1968년도에 간행된 ‘한국탑파연구자료’에 의하면 범학리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범호사(泛虎寺)’ 경내에 건설되었던 것이라 하고 있다. 범학사에 대한 명칭은 아직 이견이 분분하지만 ‘경상북도속찬지리지(慶尙北道續撰地理志)’(1469년)에 의하면 “현의 유산에 있는 지곡사는 선종에 속하고, 범액산에 있는 범액사는 교종에 속한다.(중략) 현의 동쪽에 범액리가 있다”고 되어 있다. 현재의 범학리는 산청읍의 동쪽에 있으므로 범액리는 범학리를 말하고, 범액사는 범학리 삼층석탑이 있던 사찰임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1469년 이전 즉, 조선초기까지는 범학사가 범액사로 불렸음을 알 수 있다.

산청 범학리사지 지표유물.

범학리사지는 둔철산 서쪽 산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범학마을 북동쪽의 경작지 일원으로 지형적으로는 능선에 둘러 쌓여있다. 이곳에는 석비 1기가 세워져 있는데,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국보 제105호)이 있던 곳이며, 현재 서울 경복궁에 보존되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2006년 지표조사보고서에서는 사지는 논으로 개간되어 절터 유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고 하며, 지표에 사선문, 종선문, 어골문, 집선문 와편을 비롯해 토기편과 분청자편, 백자편 등이 확인되었다고 한다. 사역으로 알려진 곳은 현재 계단식 경작지로 개간되어 이용되고 있다. 오랜 경작으로 인해 지표상에서 사찰관련 유구는 찾아 볼 수 없으나, 밭 일대에서 기와편이 상당수 확인된다. 지표상에 흩어져 있는 유물은 대부분 통일신라말기~조선중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평기와편이다.

이 사지에 있던 삼층석탑은 2중 기단부 위에 3층의 탑신을 배치한 전형적인 신라시대 석탑이다. 하층기단은 4매의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 면석에는 2개의 탱주와 양 모서리에 우주가 모각되어 있다. 상층기단은 4매의 면석과 1매의 갑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면석에는 1개의 탱주와 우주를 표현하였으며, 탱주로 분할된 8면에는 팔부신중이 조각되어 있다. 3개의 탑신은 모두 단일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우주가 표현되어 있다. 초층탑신 각면에는 보살상 또는 천부상이 조각되어 있다. 3개의 옥개석 또한 모두 단일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4단의 각형 옥개받침이 표현되어 있다. 상륜부는 모두 결실되었다.

산청 범학리 삼층석탑은 팔부신중과 천, 보살 등으로 화려하게 장엄되어 있고, 옥개받침이 4단으로 표현되는 점 등으로 보아 9세기에 건립된 석탑으로 추정되며, 이 석탑이 있던 사찰이 교종계열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하대 경상남도 지역 사찰의 성격을 밝히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그러나 아직 이 석탑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최근 23년간 국립박물관 수장고에서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진주박물관에서 이 탑을 배견할 수 있게 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용산박물관에서 진주박물관으로 이전되는 것이 진정한 귀향인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2010년 전국폐사지 기초조사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사지에 소재하거나 혹은 소재했던 문화재’를 뜻하는 ‘소재문화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조사하고 있다. 문화재보호법에서는 사용하지 않는 소재문화재란 용어까지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지의 현황을 조사하면서 빈번하게 목격하게 되는 문화재의 이동과 반출 때문이었다.

문화재는 원위치에 있을 때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있다. 이는 ‘문화재보호법’ 제3조에 명시된 “문화재의 보존관리 및 활용은 원형유지를 기본원칙으로 한다”라는 문화재보호의 기본원칙과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며, 원위치에 남아있을 때 그 문화재의 역사적, 예술적, 학술적, 경관적 가치가 상승한다는 점에서 최대한 지켜져야 할 부분이다. 이에 우리 연구소에서는 이동·반출된 문화재의 원소재지를 찾고, 사지에 있다가 망실된 문화재를 조사하여 사지의 역사성을 제대로 따져서 밝히고자 하였다.

현재까지의 학술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의 사지는 5393개소로 파악되었다. 이중 사명만 확인되고 소재지를 알 수 없는 사지 등을 제외하면 조사대상 사지는 4436개소로 잠정 집계 된다. 조사대상 사지에 사지소재문화재가 남아 있는 곳은 2543곳이며, 조사대상 사지의 57.33%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 사지에는 출토품을 포함하여 총 31814건 / 44958점의 사지 소재문화재가 전하고 있다.

산청범학리 삼층석탑.

전국의 사지 내 소재문화재 31,814건 중 법적·제도적 보호를 받고 있는 지정문화재는 총1160건(3.6%)에 불과하며, 비지정문화재는 30654건(96.4.%)에 달한다. 또한 전체 31814건 중 사지에서 출토된 출토품을 제외한 소재문화재는 17248건이다. 이 중 지정은 1157건(6.7%)이고 비지정은 16091건(93.3%)이다. 출토품을 제외한 소재문화재 17,248건 중 사역 내에 잔존하고 있는 소재문화재는 11937건이며, 전체의 69.2%이다. 사지를 벗어나 다른 장소로 반출된 문화재는 2663건 15.4%를 차지한다. 반출된 문화재 2663건 중 가장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곳은 박물관·미술관으로 1107건으로 41.6%에 달한다.

소재문화재의 이동 및 반출의 이유는 다양하다. 첫째, 주변 개발, 발굴, 정비 등을 이유로 사지에서 이동‧반출하여 공공기관 및 박물관, 연구시설, 사찰에 보호‧보존되고 있는 경우를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러한 기관에 특별한 이유 없이 이동‧반출이 이루어진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 외, 사지가 개발되어 도심이 형성되거나, 경작지 개간, 등산로 개설 등이 원인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이동‧반출시켜 보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앞서 서술한 모든 경우도 포함해서 어떠한 경우라 할지라도 사지로부터 소재문화재를 반출하여 보존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소재문화재란 사지 내에 존재할 때 그 역사성을 더욱 더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이나 청와대에 있는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 ‘산청 범학리사지 삼층석탑’ 등 제자리를 벗어나 있는 문화재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려 놓자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과 더불어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 있다면, 소재문화재의 보존현황은 사지의 보존현황과 분리하여 생각하면 안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재문화재 보존관리의 원칙과 방향은 사지의 정비와 활용방안에 대한 이념과 기본방침을 세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야 하고, 그것을 실행할 수 있도록 의무화하는 법적 규제마련부터 고민해야 할 것이다. 특히, 현재의 문화재 보존을 위한 제도는 문화재보호법을 바탕으로 지정된 문화재만을 보호‧보존하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역사적‧예술적 가치를 가진 비지정 소재문화재를 지정문화재로 승격시켜 제도권 내로 편입하는 방안을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그 다음으로는 비지정 소재문화재까지도 제도적 관리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제도장치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66호 / 2018년 11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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