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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녹지, 타협해선 안 될 공간

기자명 최원형

마야·아나사지 등 옛 문명 몰락 공통점은 ‘삼림파괴’

‘문명의 붕괴’가 주는 교훈
소비지향주의에 대한 경고
개발·성장만이 우선되는 건
공멸을 재촉하는 것일 뿐

제레드 다이아몬드가 저술한 ‘문명의 붕괴’에는 한때 흥했던,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문명들의 ‘옛’이야기가 몇 편 실려 있다. 책은 제목 그대로 이스터 섬, 핏케언 섬과 핸더슨 섬, 아나사지 문명과 마야 문명 그리고 저 북쪽 그린란드에서 노르웨이인들의 몰락까지 다양한 ‘문명의 붕괴’를 보여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문명이 몰락하게 된 공통점에 삼림 파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먹고 사는 문제 때문이었든 목재를 활용해서 집을 짓는 문제였든 또는 통치자의 권위를 드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목재를 소비했든 어쨌든 숲을 지속가능하지 못하도록 방치한 결과인 것만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이런 문명 붕괴사를 얘기하는 와중에 미국을 짤막하게 언급한다. 그렇게 망해버린 문명 중에는 현재 미국의 역사보다 훨씬 긴 시간 동안 유지된 문명도 있었다고. 미국의 소비지향적인 현재 모습을 에둘러 꼬집은 것이다. 어디 미국뿐일까? 소비주의의 광폭함이 전 세계를 휩쓸고 있다. 이런 소비주의에 내일에 대한 고려는 없다. 그러니 미래세대에 대한 배려는 있을 턱이 없다. 단연코 없다. 누가 한 그루의 나무라도 더 가져다 쓸까만 궁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사실이 그러할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겠지, 인공위성이 보내주는 정보로 살고 있는 세상에 무슨 숲 따위를 걱정하느냐고. 그런데 우리가 숨 쉬는 것마저 과학의 힘으로 해결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적절한 해수 온도와 저 거대한 해류의 흐름 그리고 적당한 빙하량을 과연 과학의 힘으로 조절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을 만능처럼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우리의 생존조건 가운데 얼마만큼을 과학이 대신해 줄 수 있는지 묻고 싶다.

도시에 살고 있으면서 단 한번이라도 숲을 생각해본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될까? 2012년 기준 우리나라의 도시인구는 전체 인구의 91.04%이다. 도시에 살고 있는 인구가 10명 가운데 9명이 넘는다는 얘기다. 이 통계치가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다양하겠으나, 나라 인구 거의 대부분이 도시에서 단조로운 삶을 사는 게 아닌가 하는 내 나름의 해석을 내려 본다. 여기서 단조롭다는 것은 오가는 공간이 단조롭다는 뜻이다. 집, 직장(혹은 학교) 그리고 과외시간에 사람들과의 친분을 나눌 공간이 도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의미다. 대체로 도시는 자연생태를 일상적으로 접하기가 쉽지 않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과 소원해질 것이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도시에 녹지가 잘 형성된 곳도 물론 있을 테지만 인공 조경이 대부분일 테다. 그나마 서울 도심에는 다섯 개나 되는 고궁 덕분에 녹지 공간이 확보돼 있긴 하다. 숲에서 새들의 지저귐을 듣고 나무 향을 느낄 때와 자동차로 꽉 찬 도로에 빼곡한 회색 빌딩숲을 만날 때 우리의 심리상태는 판이하다.

숲에서 조화로운 ‘우리’를 경험한다면 빽빽한 빌딩숲에서는 긴장하고 전투태세를 갖춘 경쟁적인 ‘나’를 만나게 되지 않던가. 우리의 일상을 돌아보면 늦은 밤까지 인공조명 아래서 사람들을 만나기는 쉬워도 나무 그늘 아래서 빈둥거리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연과 격리되어 콘크리트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도시인들에게 숲이란 얼마나 낯설고 추상적인 단어일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니 육식으로 숲이 줄어들고 있다는 얘기가, 팜유가 숲을 집어 삼키고 있다는 말이 가슴에 와 닿기란 요원한 일이 아닐까 싶다.

올해 12월 초, 여의도 면적의 116배에 달하는 부지가 군사시설 보호구역에서 해제됐다. 남북 간 평화교류를 쌍수 들고 환영하면서도 한편에서 혹시나 했던 일들이 현실화되는 것 같아 불안하다. 사유재산이 제대로 재산권행사를 할 수 없었던 부분이야 당사자로서 안타깝기 짝이 없는 일이지만 소유자들이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제한구역 해제 말고는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남북긴장 상태였기에 유지가 될 수 있었던 녹지, 왕조시대의 흔적인 도심의 궁궐 덕분에 갖게 된 녹지는 참으로 아이러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산해야 할 시대의 유물이지만 그로인해 오히려 녹지가 보존될 수 있었다니. 성장을 빌미로 녹지가 계속 줄어든다는 것은 우려스럽기 짝이 없다.

이렇게 저렇게 이유를 든다면 녹지를 개발할 이유는 천 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속가능하게 대대손손 이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기정사실로 녹지를 바라보면 어떨까? 정말 개발만이 우리가 살 길이고 성장만이 선택지일까? 혹시 공멸로 가는 길을 재촉하는 행위는 아닐까? 내 생애만 누리다 가겠다는 생각이 아닌 다음에야 녹지야 말로 마지막까지 타협해서는 안 될 공간, 미래 세대들에게 고스란히 물려줘야할 공간이 아닐지.

최원형 불교생태콘텐츠연구소장 eaglet777@naver.com

 

[1468호 / 2018년 1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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