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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공주 금학동사지

기자명 임석규

백제 성왕이 불심 천자 양무제 흠모해 창건한 대통사 추정지

성왕, 사비천도 준비하면서
공주에 대통사·흥륜사 창건

일제강점기 가루베 지온이
공주 반죽동, 대통사지 추정

시굴조사에서 허구 밝혀져
현재 금학동 일원으로 추정

석조광배 등 통일신라시기
다수의 유물들이 대거출토

출토된 석조여래좌상 등은
백제의 작품으로 평가받아

금학동 포함 제민천변 일대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필요

금학동사지 조사구역 전경.
금학동사지 조사구역 전경.

‘삼국유사’에는 백제 성왕5년(대통원년, 527)에 양나라의 무제를 위하여 웅천주에 대통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있다. 양 무제는 불심천자 혹은 황제보살로 칭송 받았던 중국 남조 양나라의 황제였다. 성왕 역시 이러한 양 무제처럼 불국토 건설을 염원하였던 것 같다.

성왕은 무령왕의 아들로서 역사적으로는 사비천도를 단행한 인물로 유명하다. 천도를 준비하면서 공주지역에 대통사 및 흥륜사를 창건하였고, 인도에서 5년 만에 귀국한 겸익 스님에게는 흥륜사에서 불경을 번역하게 하였다. 흥륜사는 일본 기록에서만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을 뿐, 국내 기록은 물론 유구나 유물도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이에 반해 대통사는 현재 대통교라는 다리가 남아있고, ‘대통(大通)’이나 ‘통(通)’이라고 쓰여 있는 기와와 와당, 당간지주, 쌍사자, 주춧돌 등에 대통사지 출토라는 명칭이 붙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대통사의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대통사지는 일제강점기 가루베 지온(輕部慈恩)의 조사를 통해 ‘대통’명 기와가 확인된 반죽동 당간지주 주변으로 알려져 왔다. 가루베지온은 대통사지와 관련해 최초로 고고학적인 방법을 동원한 인물이다. 그는 백제시기 ‘대통’명 기와의 출토지와 여기에서 수습된 와당의 분석, 그리고 당간지주와 석조(石槽) 및 주변의 각종 건축부재를 통해 현재의 공주시 반죽동 당간지주 북쪽을 대통사지로 비정하였다. 그러나 그의 견해는 시굴·발굴조사와 같은 지하에 있는 유적에 대한 조사를 하지 않고 단순히 지표조사에 의지한 결과라는 점에서 많은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었다. 이는 결국 1999년 11월에서 12월에 걸쳐 이 지역 약 2,000여 평에 대한 시굴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허구로 밝혀지게 되었다. 즉, 조사 결과 당간지주가 후대의 어느 시점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졌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당간지주 북쪽의 금당이나 강당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던 곳에서도 건물지로 판단되는 어떠한 유구도 확인할 수 없었다. 즉, 가루베지온이 대통사지라고 판단했던 곳이 사실은 대통사지가 아닐 가능성이 매우 커져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 성왕이 창건했던 대통사는 어디에 있었을까?

한얼문화유산연구원 조원창 원장은 제민천 일원에 분포하고 있는 유적, 특히 불교유적의 분포 현황을 통하여 대통사지의 위치를 새롭게 비정한 바 있다. 그는 대통사지가 현재 반죽동 당간지주가 위치하고 있는 반죽동 300-3번지 일원이 아닌 공주교육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금학동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대통사지는 일제강점기 가루베 지온의 조사를 통해 ‘대통’명 와편이 확인된 반죽동 당간지주 주변으로 알려져 왔다. ‘대통’은 양 무제시기의 연호인 ‘중대통’으로 추정되며, 이곳 뿐 아니라 부여 부소산성에서도 동일 명문의 와편이 발견된 바 있다. 이후 대통사에 대한 검토는 대체로 가루베 지온이 조사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사역 자체나 관련 유물에 대한 정확한 판단보다는 오히려 주변에서 발견된 유물 대부분이 대통사지와 관련된 것으로 인식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즉 반죽동 당간지주를 현재 대통사지 당간지주라고 부르고 있으며, 공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거대한 석조 2기 또한 대통사 석조라고 불리고 있다. 그러나 1999년도에 실시된 반죽동 당간지주 일원에 대한 발굴조사 시에는 그 일원을 대통사지로 판단할 수 있는 유구가 확인되지 않았고, 당간지주 역시 원 위치가 아님이 판명되어, 대통사지의 실체를 밝힐 수 있는 근거가 불확실해졌다. 그런데 금학동 일원에서는 일제강점기에서 근래에 이르기까지 석조광배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확인되었고, 1970년대~1990년대에 이르기까지 공주교육대학교를 중심으로 한 주변 일원에서 다수의 통일신라 건물지들이 발견되고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발견된 석조광배가 제민천변에 거대한 석불과 함께 매몰되어 있었다는 점을 통하여, 이 주변에 규모가 큰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즉, 여러 정황으로 보아 공주교육대학교 일원에는 통일신라시대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 추정되며, 제민천변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비정되고 있는 ‘대통사지’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라고 하였다.

현재 ‘금학동사지’로 지칭되고 있는 공주교육대학교 일원은 이미 도시화가 진행되어 지표 위에서는 유구 및 유물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그러나 공주교육대학교 뒤에 있는 일락산 일원에 서혈사지 등 불교유적이 다수 존재하고 있으며, 그간 간헐적이지만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규모 사지의 존재가 비정된 바 있다. 개발로 인해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유적의 명확한 성격을 규명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유적뿐만 아니라 반죽동, 봉황동, 금학동 일원의 넓은 영역을 폭넓은 관점에서 학술조사 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하여 제민천변에 분포하고 있는 불교유적들의 성격을 규명하고, 웅진시기 백제 사지에 대한 심층 연구를 진행하여 아직 밝혀지지 않은 대통사지의 전모 및 금학동 사지의 성격에 대해서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금학동사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유물로는 석조광배, 석조여래좌상 2구, 석조보살입상, 석탑재, 석정개석(石井蓋石), 초석 등이 있다. 유물은 모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현재 석조광배, 석조여래좌상 2구, 석조보살입상은 박물관 옥외전시장에 있다.

금학동사지 조사구역 전경.
금학동사지 석조여래좌상1(국립공주박물관 소장).

석조광배는 높이 251㎝, 최대 폭 146㎝로 우측 하단 일부가 파손되어 있다. 이 광배가 국립공주박물관에 이관되게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광배는 원래 뒤집힌 상태로 제민천의 석교로 사용되고 있었다. 1927년경 하천이 범람하며 석교가 유실되어서 제민천변 제방 위에 석불과 함께 세워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1930년 가루베 지온에 의하여 일본 ‘고고학잡지(考古學雜誌)’에 소개되었고, 일시적으로 공주군청 정원으로 옮겨졌다가 1940년에 국립공주박물관으로 이관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가루베 지온은 이 광배에 대하여 익산 연동리 석조여래좌상(보물 제45호) 광배 및 일본 호류지(法隆寺) 석가삼존상 본존의 광배와 유사한 형식을 갖춘 백제 6세기 무렵의 광배로 판단하였다. 형태는 연꽃잎 모양이고, 하부는 거칠게 다듬어져 있다. 광배의 중앙에는 이중 동심원으로 두광을 표현하였고, 그 주변으로 간엽이 있는 8엽의 연꽃무늬를 배치하였다. 그 외곽으로는 다시 2줄의 음각선으로 테두리를 두르고, 당초문도 새겨 놓았다. 두광 아래로는 당초문이 양각된 신광대가 연결되어 있다. 두광과 신광 외곽으로는 화염문이 새겨져 있다. 이 광배는 당초문이 있는 두광, 신광대의 배치, 외연의 화염문 형태 등에서 백제의 전형적인 광배 형태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다.

석조여래좌상1은 높이 93㎝의 아담한 상이다. 머리는 소라모양이고, 낮은 육계가 솟아 있으며, 얼굴은 둥근 편이다. 이목구비는 마모가 심해 명확하지 않다. 목에는 삼도의 흔적이 있다. 대의는 양 어깨를 모두 가리는 통견으로 입었고 대의자락을 복부에 끼워 넣은 모습이 확인되며, 열린 가슴 사이로 승기지와 군의 같은 내의와 띠 매듭이 확인된다. 옷 주름은 층단식으로 표현되어 있다.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어 촉지인을 취하였으며, 왼손은 복부 위에 두고 있다. 이 불상은 인근 서혈사지에서 출토된 공주 서혈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979호)와 많이 닮아있어서 동시기 혹은 조금 늦은 시기인 9세기 후반~10세기 초반 무렵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좌상2는 광배와 같은 돌에 새겨져 있다. 전체 높이는 101㎝이고, 불상의 높이는 87㎝이다. 머리는 소발이며, 육계는 낮고 넓게 솟아 있다. 얼굴은 방형에 가까운 형태이고, 이목구비는 거의 마모되어 코와 눈썹의 윤곽, 백호공만 확인된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다. 어깨는 무릎에 비하여 폭이 좁게 표현되어 있다. 대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어 편단우견으로 입었다. 옷 주름은 층단식으로 새겨져 있다. 오른손을 다리 위에 두고 왼손은 복부에 둔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으며, 오른쪽 발 일부가 노출되어 있다. 양 다리 사이에 부채꼴형의 옷 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이은 형태로, 두께 7㎝의 원형테두리를 지니고 있다. 두광의 최대 직경 52㎝, 신광의 최대 직경 72㎝이다. 이 상은 앞서 살펴본 석조여래좌상1과 유사한 크기이며, 제작 시기는 동일하거나 조금 늦은 시기인 고려전기일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금학동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보살입상은 명확한 출토위치가 전하지 않아 본 사지와 관련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높이 271㎝, 두께 28㎝의 판석형 석재의 앞면에 보살상을 선각에 가깝게 새겨놓았다. 머리에는 원통형 보관을 쓰고 있다. 얼굴은 장방형에 가까운 타원형이고, 이마에 직경3㎝, 깊이2㎝의 백호공이 새겨져 있다. 눈썹은 활처럼 휘어 깊게 새겼고, 눈은 일자로 음각하였다. 코는 없어졌으며, 입과 우측 뺨 부위는 파손되었는데 현재는 접합되어 있는 상태이다. 귀는 비교적 크게 새겨져 있으며, 보발 한 가닥이 중앙에 걸쳐 있다. 보발은 어깨에 세 가닥으로 드리워져 있으며, 나선형으로 머리카락 형태를 묘사하였다.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다. 양 어깨에 천의를 걸쳐 입었고, 가슴에는 연주문대가 새겨진 흉식을 착용하고 있다. 흉식의 중앙에는 2×3㎝ 크기의 보주형 홈이 있는데, 별도의 장식물을 감입하였던 흔적으로 추정된다. 팔목에는 연주문의 팔찌를 착용하고 있다. 현재 상 하부에 있는 대좌 정면에는 보살상의 발이 정면향으로 새겨져 있다. 이 상은 선각의 기법과 이목구비의 표현 방식, 대좌에 발을 별도로 새긴 방식 등으로 보아 고려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난 5월 문화재청은 공주시 반죽동 ‘대통사터 추정지’에 추진 중인 한옥 신축을 불허한 바 있다. 건축 부지를 발굴 조사한 결과 해당 부지에서 ‘대통(大通)’명 기와편, 나한상으로 추정되는 소조상편과 다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특히 백제시대로 보이는 문화층에서 수기의 폐와무지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이 유적이 대통사지인지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러할 가능성이 높고, 또는 백제사의 최대 난제로 꼽히는 백제 웅진도읍기의 왕경을 찾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향후 학술조사가 주목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68호 / 2018년 12월 1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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