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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0대 총무원장 서암 스님-상

청정승단 회복 발원했지만 ‘종정중심제’에 발목잡혀 좌절

종정 서옹 스님 간곡한 요청에
조계종 10대 총무원장에 취임
종단 부조리 제거·기강확립 다짐
조계사 선방 개원 등 종단 혁신

서암 스님에 세간 관심 커지자
종정측근들 간섭·견제도 늘어
총무원장으로서 입지 좁아지자
취임 두달여 만에 총무원장 사퇴

서암 스님은 1975년 10월7일 종정 서옹 스님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제10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다. 조계사에서의 기념촬영. 정토출판 제공
서암 스님은 1975년 10월7일 종정 서옹 스님의 간곡한 요청에 따라 제10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했다. 조계사에서의 기념촬영. 정토출판 제공

조계종 10대 총무원장 서암 스님은 역대 총무원장 가운데 가장 짧은 임기를 지낸 스님이었다. 그럼에도 쇠락한 조계사를 일신했고 청정승단 회복에 앞장서는 등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었다. 그러나 ‘종정중심제’에 발목이 잡혀 뜻을 접고 물러난 비운의 총무원장이기도 했다. 서암 스님이 총무원장에 나서게 된 것은 197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9월26일 조계종 제9대 총무원장 경산 스님은 종정 서옹 스님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총무원장 책임제를 내세우며 마지막까지 종정스님과 대립각을 세웠던 경산 스님이 사표를 제출한 것은 팽팽했던 힘의 균형이 종정스님에게로 기울었음을 의미했다. 강력한 ‘종정중심제’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특정인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은 갈등과 반목의 씨앗이 됐다. 서옹 스님의 ‘종정중심제’는 얼마 되지 않아 조계종이 조계사와 개운사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원인이 됐다.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화 된 종정중심제 논란은 1962년 4월 출범한 통합종단 조계종이 제정한 종헌에서 비롯됐다. 1954년 이승만 정권의 불교정화유시로 표면화된 ‘비구‧대처 갈등’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강압적인 조정에 의해 봉합됐고, 양측은 통합종단조계종을 출범시켰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종정은 조계사측(비구)에서, 총무원장은 법륜사측(대처)’에서 맡기로 합의했다. 양측은 통합종단을 운영하기 위한 종헌도 제정했다. 그러나 이 종헌은 상징적인 위치에 있어야 할 종정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한을 부여했다. 종단대표권을 비롯해 본말사 주지에 대한 임명권, 사찰재산 처분 승인권 등 종무행정의 실질적인 권한을 부여했으며 중앙종회에서 선출한 총무원장도 종정이 임명하도록 했다. 반면 총무원장에게는 행정실무에 대한 책임 외에는 별다른 권한이 없었다. 이는 통합종단 내에서 주도권을 쥐고자 했던 비구측의 의도가 반영된 결과였다. 때문에 대처측의 반발을 가져왔고, 결국 분종의 결과를 낳았다.

조계종은 대처측이 이탈한 이후에도 이 종헌을 유지했고, 이는 이후 종단 혼란의 불씨가 됐다. 종정과 총무원장의 첫 갈등은 1966년 경산 스님이 제3대 총무원장에 선출되면서 시작됐다. 불교정화운동과 통합종단 출범 과정에서 지대한 역할을 했던 경산 스님은 총무원장으로서 종무행정의 권한을 넓혀가려 했고, 그럴 때마다 종단의 또 다른 실세였던 종정 청담 스님과 마찰을 빚었다. 두 실력자의 갈등은 1967년 7월 해인사에서 열린 제16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표출됐고, 그 결과 종정과 총무원장이 동반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를 낳았다.

한동안 소강상태에 있던 ‘종정‧총무원장 갈등’은 1974년 제4대 종정 고암 스님과 제9대 총무원장 경산 스님의 갈등에 이어 1975년 7월 제5대 종정 서옹 스님과 경산 총무원장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조계종 종헌‧종법 개정사(박부영)’에 따르면 서옹 스님과 경산 스님이 대립한 세 번째 ‘종정‧총무원장 갈등’은 1975년 7월 단행된 제주 관음사 주지 인사 문제로 빚어졌다. 이 무렵 경산 스님은 제주 관음사 주지를 전격 교체했는데, 이는 종정 서옹 스님이 “주지를 바꿔도 좋으나 사표를 받아놓고 후임자를 발령하라”는 지시를 거부한 조치였다. 그러자 서옹 스님은 “경산 총무원장의 인사는 직권남용”이라면서 종정 직인 반환을 요구했다. 서옹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총무원이 보관하고 있던 종정 직인의 무효를 선언하고 문공부에 새로운 직인을 등록하는 ‘개인계(改印屆)’를 접수했다. 8월26일 ‘행정지침1호’(종령)을 발표해 종헌에 따른 종정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행사하겠다는 뜻도 전달했다. 경산 스님은 종정스님의 행정지침을 거부하며 반발했지만, 뒤이어 불거진 사찰토지처분금 유용 문제로 총무원 재무부장이 구속된 데 이어 자신도 수사선상에 오르면서 수세에 몰렸다. 결국 경산 스님은 9월26일 총무원장에서 물러났다.

총무원장과의 대립국면에서 완승한 서옹 스님은 종정이 중심이 된 종단운영을 표명했다. 때를 같이해 총무원장 공백에 따라 소집된 조계종 중진회의도 10월2일 “비상사태에 따라 종단의 모든 권한을 종정에게 일임한다”고 결의했다. 이를 계기로 서옹 스님은 ‘종정의 지명으로 중앙종회의 동의를 얻어 총무원장 선출, 총무원장 및 각 부장의 임기조항 삭제’ 등을 골자로 한 종헌개정을 추진했다. 강력한 종정중심제의 예고였다.

평생 수행에 전념하던 서암 스님이 총무원장에 거론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서옹 스님은 경산 스님의 사퇴로 공석이 된 후임 총무원장 인선에 착수했다. 종단 중진회의가 모든 권한을 종정에게 일임한 상태였기 때문에 중앙종회가 후임 총무원장을 선출할 때까지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서옹 스님은 서암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낙점했다. 서암 스님은 50대에 문경 봉암사 조실로 추대될 만큼 뛰어난 수행력으로 선방 수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선승이었다. 김용사 강원을 나와 독학으로 일본유학을 다녀올 만큼 학식도 깊었기에 서옹 스님은 혼란한 종단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적임자로 판단했다.

그러나 서암 스님은 종정스님의 몇 차례 간곡한 부탁에도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며 한사코 고사했다. 서옹 스님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서옹 스님은 서암 스님과 친분이 두터웠던 원로 대희, 비룡 스님에게 친필 서한을 보내 “반드시 서울로 모셔와 달라”고 부탁했다. 서암 스님 구술 회고록 ‘그대, 보지 못했는가(이청 지음)’에 따르면 대희, 비룡 스님은 1975년 10월초 원적사로 찾아와 종정 서옹 스님의 편지를 건네며 함께 서울로 올라가자고 재촉했다. 그러나 서암 스님은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두 노장스님은 돌연 “늙은이들이 여기까지 찾아왔으면 일을 맡든지 말든지 하는 것은 올라가서 결정할 일이고, 사람 얼굴을 봐서라도 따라나서 주는 것이 예의 아니냐”고 역정을 냈다. 할 수 없이 서암 스님은 두 스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

서옹 스님은 밤새 설득했지만, 이번에도 서암 스님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며 극구 사양했다. 서암 스님으로서는 종무행정과 거리가 먼 선승의 삶을 살았던 자신이 총무원장을 맡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는 입장이었다. 혹여 총무원장으로서 의욕이 넘칠 경우 앞선 총무원장이 그랬듯 종정스님과의 갈등으로 이어져, 종단 혼란만 가중될 수 있다는 염려도 있었다.

그러나 서옹 스님은 1975년 10월7일 “서암 스님이 총무원장직을 수락했다”고 언론에 공표했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서암 스님으로서는 당혹스런 일이었다. “일이 이렇게 됐다면 더 이상 총무원장을 하니, 안 하니를 밝히는 것은 우습고, 이것도 운명”이라고 여겼다. 마지못해 총무원장직을 수락했다.

‘대한불교신문(1975년 10월12일자)’에 따르면 종정 서옹 스님은 10월7일 오후 4시 총무원에서 제10대 총무원장 취임식을 열어 서암 스님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당시 서암 스님은 총무원장 서리 상태였지만, 서옹 스님은 임명을 강행했다. 서암 스님을 총무원장으로 기용하겠다는 서옹 스님의 결심이 얼마나 컸는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서옹 스님은 “일련의 사태로 종단이 다소 공백을 면치 못하고 있으나 이제 서암 스님의 총무원장 취임으로 일대전환이 모색될 것”이라며 “사부대중이 합심해 종단 재건운동에 진력하자”고 당부했다. 10대 총무원장으로 취임한 서암 스님은 “오늘날 종단이 비상사태를 맞게 된 것은 승려가 승려 본연의 자세를 망각한 데서 비롯됐다”며 “참회와 정진으로 부조리를 제거하고 기강확립으로 승풍을 진작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수행전통을 회복해 승려의 자질을 향상하고, 포교원 설치와 역경기관 지원 확대 등 종무계획도 발표했다.

서암 스님의 총무원장 취임으로 혼란으로 치닫던 조계종은 곧 안정을 찾는 듯했다. 그러나 서암 스님이 추진하려던 사업들은 번번이 종정스님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종단 운영과 관련해 서옹 스님은 서암 스님과 합의한 내용을 뒤집는 일들이 반복됐다. 그럴 때마다 종정스님에 대한 서암 스님의 신뢰도 점차 줄어갔다.

서암 스님 평전 ‘태어나기 전의 너는 무엇이었나(이청 지음)’에 따르면 서암 스님은 종정스님이 쉽게 흔들리는 이유가 그의 측근들 때문이라고 여겼다. 총무원장의 영향력이 커질수록 종단의 주도권을 쥔 그들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 있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으려 했다는 것이다. 서옹 스님과 서암 스님의 갈등은 조계사 운영을 두고 표면화됐다. 수행전통 회복으로 종단 개혁을 추진하려 했던 서암 스님은 첫 사업으로 조계사 정비를 추진했다. 이 무렵 조계사는 도심에 위치한 탓에 이미 세속의 때가 깊이 스며있었다. 스님들의 방사에는 밤낮으로 TV소리가 ‘왕왕’거렸고, 승복을 갖추지 않은 스님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서암 스님은 ‘양복 입은 중’들의 출입을 엄금했고, 새벽마다 짚신을 신고 나가 마당을 청소하며 예불과 참선을 진행했다. 조계사 경내에 있던 정화기념관에 선방도 개설했다. 조계사 도량이 정비되자 신도들의 반응도 좋아졌다. 언론은 총무원과 조계사에 부는 ‘신선한 바람’을 주목했고, 그럴수록 서암 총무원장에 대한 호평도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종정스님 측근들에게 ‘눈엣가시’였다. 종정스님 주변에서는 “서암 스님은 보통 중이 아니니 가만 놔두면 종권까지 좌지우지할 양반”이라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종정스님이 주관하는 회의에서 서암 스님이 배제되는 일도 있었다. 서암 스님은 총무원장에 부임한 지 한 달 무렵 서옹 스님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종정스님이 자신 때문에 불편해한다면 더 이상 머물러 있을 까닭이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서옹 스님은 다시 원로들까지 동원하며 만류했다. 종정스님의 거듭된 만류에 서암 스님은 “나를 총무원장으로 부려먹으려면 종정스님이 각서 한 장을 써주어야겠다”고 했다. 각서 내용은 “종정스님은 총무원장이 원만하게 종단 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적극 협조한다”는 것이었다. 서옹 스님은 흔쾌히 각서를 써서 건넸다.

그러나 그로부터 얼마 뒤 서옹 스님은 “급히 만드느라 격식을 갖추지 못했으니 돌아가 붓글씨로 다시 써서 보내겠다”며 각서를 되찾아갔다. 각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종정스님측은 서암 스님을 간섭하는 일이 더 많아졌고, 서암 스님이 조계사 주지로 임명한 휴암 스님마저 내보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총무원장으로서의 입지도 점점 줄어들었다. 서암 스님은 바랑을 짊어지고 그길로 서울을 떠나 원적사로 돌아왔다. 서암 스님이 총무원장에 선출된 지 채 두 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69호 / 2018년 1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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