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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⑬

기자명 최병헌

이차돈의 순교는 불교공인 염원했던 국왕파의 사실상 패배

신라가 불교공인한 시기는
고구려·백제 비해 150년 뒤

중국 전진과 교류 있었지만
전진의 멸망으로 교류 끊겨

고구려서 여러 번 불교전래
외교적 갈등으로 수용 안돼

신라에서 불교 도입 주체는
중앙 아닌 지방의 유력세력

왕호 사용과 율령반포에도
6부족 체제 완전히 못 벗어

왕과 관료들의 첨예한 대립
이차돈의 처형으로 이어져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한 비석. 백률사에 있었던 이 비석이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국통 혜륭 등이 이차돈을 위해 817년에 세웠다는 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차돈의 순교를 기념한 비석. 백률사에 있었던 이 비석이 ‘삼국유사’에서 언급한 국통 혜륭 등이 이차돈을 위해 817년에 세웠다는 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라의 불교공인은 3국 중 가장 늦은 23대 법흥왕 14년(527)에 이루어졌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 백제가 침류왕 원년(384)에 불교를 공인한 사실과 비교하면 150여년이나 늦은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시점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그렇게 늦은 것은 아니었다. 신라 하대에 김용행(金用行)이 찬술한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에 의하면, 고구려 승려 아도(我道)가 13대 미추이사금 2년(263) 신라에 와서 불교를 전하려다 죽음을 피하여 일선군의 모례의 집에 숨었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는데,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러나 17대 내물마립간(356~402) 때에 중국의 전진(前秦)에서 불교를 직접 받아들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며, 늦어도 19대 눌지마립간(417~458) 때부터 확실히 불교가 전래되고 있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 인용된 ‘진서(秦書)’(삼국사기에서 재인용)에 의하면, 내물마립간 26년(381) 고구려 사신을 따라 신라의 위두(衛頭)가 사신으로 파견되어 호불왕으로 유명한 전진의 부견(苻堅)을 만나서 대화를 나눈 사실이 있다. 그러나 전진이 394년에 멸망하였고, 신라와 중국 왕조의 교류가 단절돼 불교전래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다만 내물마립간 때부터 신라가 연맹왕국의 단계로 발전하면서 중국 왕조와 직접적인 교류를 시도하였던 것은 최초의 국제무대 등장이라는 점에서 주목되는 사실이다.

신라 성덕왕(702~737) 때의 귀족학자인 김대문(金大問)이 찬술한 ‘계림잡전(鷄林雜傳)’(삼국사기에서 인용)에 의하면, 19대 눌지마립간 때에 사문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신라 땅에 들어와 일선군의 모례의 집에 숨어 불교를 전도한 적이 있다. 그리고 21대 비처(소지)마립간(479~500) 때에는 아도(阿道)가 시자 3인과 함께 역시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전도하였는데, 신봉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로서 눌지마립간 때부터는 고구려로부터 불교가 전래되고 있었으며, 불교를 받아들인 주인공이 소백산맥을 넘어오는 교통의 요지인 선산 지역의 지방 세력가였음을 알 수 있다. 철기 농경문화를 기반으로 부족적인 전통을 이은 읍락공동체가 해체되고 가부장가족장이 지방의 주체세력으로 대두하는 사회변화 과정에서 선산 지역의 모례 같은 인물이 불교수용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있었음을 나타내주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 사금갑조(射琴匣條)에 의하면, 비처마립간 10년(488)에 왕궁 내전에서 승려가 궁녀와 사통한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있었음을 보아 소지마립간 때에는 신라 왕실까지 불교가 침투되었으나, 불미스런 사건으로 왕실에 대한 전도는 크게 타격을 입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구려로부터 여러 차례 불교 전래가 이루어졌음에도 신라에서 불교가 활발하게 수용되지 못한 원인은 고구려와 신라 사이의 외교·군사적 갈등 때문이었다. 신라는 내물마립간 26년 고구려의 도움으로 비로소 중국 왕조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후 45년(400) 광개토왕이 파견한 5만 군대의 도움으로 경주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할 수 있었고, 그것을 계기로 한 동안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과 영향을 강하게 받게 되었다. 그러나 광개토왕을 계승한 장수왕의 적극적인 남하정책으로 백제와 함께 신라도 위기의식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눌지마립간 17년(433) 신라는 백제와 나제동맹을 체결하였고, 20대 자비마립간 18년(475) 고구려가 백제의 한성을 공략한 이후인 소지마립간 15년(493)에는 백제와 결혼동맹을 통하여 고구려의 남침을 공동으로 저지하려고 하였다.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한 나제동맹은 뒷날 진흥왕 14년(553)까지 지속되었는데, 그 사이 고구려로부터의 불교전래도 순탄할 수 없었다. 국도(國都)에서 국도로, 왕실(王室)에서 왕실로의 국가사이의 공적인 불교전도는 이루어질 수 없었고, 민간에서의 개인적인 전도행위만이 여러 차례 단속적으로 이루어졌을 뿐이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고기(古記)’에 의하면, 법흥왕 때의 아도에 앞서 고구려의 승려 정방(正方)과 멸구자(滅垢玼)가 전후 신라에서 각기 전도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는 사실을 보아 여러 명의 순교자가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이로써 고구려와 신라사이의 군사적 갈등관계는 불교의 공적인 전래를 불가능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전도 활동도 어렵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신라에서 불교를 수용하기 어렵게 한 근본적인 원인은 고구려와의 갈등이라는 대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불교를 공인하기 위해서는 왕경 지배자공동체의 성격 변화, 즉 6부체제의 변화라는 조건이 요구되었다. 이른바 연맹왕국 시기는 6부가 각각 독자성을 강하게 지닌 단위 공동체로서 정치사회적 기반을 갖고 있었으며, 국가의 중요한 사안을 결정하는 회의체에 공동으로 참여하고 집행하는 등 6부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지배체제를 근간으로 하였다. 그러나 22대 지증마립간(500~514)과 23대 법흥왕(514~540) 때에 지배체제를 정비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6부 체제에 변화를 일으켜 단위 정치체제로서의 독자성이 점점 약화되어 왕경의 행정구역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과정에서 지증마립간 4년(503)의 ‘신라’라는 국호제정과 중국식의 왕호사용, 법흥왕 7년(520)의 율령의 반포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6부체제의 전시대적인 성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는 계속되어 국왕의 위상이 초월적인 지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불교공인 문제가 제기되었는데, 직접적인 계기는 법흥왕 8년(521) 백제의 사신에 딸려 중국 남조인 양(梁)에 사신을 파견하고, 보살황제로 일컬어지던 양무제의 사신으로 승려 원표(元表)가 신라에 온 것이었다. 내물마립간 26년(381) 전진에 사신을 파견한지 실로 140년만이었다.

불교 공인에 대한 자료로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삼국사기’에 인용된 김대문의 ‘계림잡전’과 ‘삼국유사’에 인용된, 헌덕왕 12년(817) 남간사(南澗寺)의 승려 일념(一念) 찬술의 ‘촉향분례불결사문(髑香墳禮佛結社文)’, 그리고 같은 시기의 ‘백률사석당기(栢栗寺石幢記)’ 등이다. 이 중에서 가장 간명하게 정리된 ‘계림잡전’의 내용을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

“법흥왕이 또한 불교를 일으키려고 하니, 군신(群臣)은 믿지 않고 입으로 떠들기만 함으로 왕은 주저하였다. 근신(近臣) 이차돈(異次頓, 혹은 處道)이 아뢰기를 ‘청컨대 신의 목을 베어 중의(衆議)를 결정하소서’ 하니, 왕은 말하기를 ‘본시 도를 일으키려 함이어늘 죄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없다’고 하였다. 이차돈이 대답하되, ‘만일 도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죽어도 유감이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이에 군신을 불러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지금 보건대 중들은 머리를 깎고 이상한 옷을 입고 언론이 기괴하고 거짓스러워 상도(常道)가 아니오니, 지금 만일 이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혹 후회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신들은 무거운 죄를 지을지라도 감히 어명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차돈만은 홀로 말하기를 ‘지금 군신의 말은 옳지 못합니다. 대개 비상한 사람이 있은 연후에 비상한 일이 있는 것이니, 듣건대 불교는 그 뜻이 깊다 하오니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왕은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깨뜨릴 수 없고 너 혼자 다른 말을 하니 두 주장을 모두 따를 수는 없다’ 하고 드디어 그를 형리에게 내리어 장차 목을 베려고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하기를 ‘나는 불법을 위하여 형벌을 받음이니 부처가 만일 신령이 있다면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상한 일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그의 목을 베매, 잘라진 데서 피가 용솟음치는데, 핏빛이 젖과 같이 희었다. 여러 사람이 보고 괴이히 여기어 다시는 불사를 반대치 아니하였다.”

이상에서 자료를 좀 장황하게 인용한 것은 불교공인 문제로 왕과 관료들이 모여 회의를 개최하고 치열한 논쟁을 전개하는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주기 때문이다. 국왕과 논쟁을 전개한 군신(群臣)을 ‘촉향분례불결사문’에서는 조신(朝臣)으로 표현하였는데, 같은 의미이다. 앞서 법흥왕 11년(524)의 ‘울진 봉평비’에서는 탁부의 부장으로서 모즉지매금왕(뒷날의 법흥왕), 사탁부의 부장으로서 사부지갈문왕, 그리고 이외 탁부·사탁부·잠탁부·본피부 등 4부의 부장 및 11등 나마 이상의 관등을 소지한 관료 등 14인이 공동으로 회의를 실시하고 그 결과를 함께 교(敎)의 형식을 빌어서 실시케 하는 주체로서 등장하고 있었음을 보았다. 이번의 불교공인 문제로 논쟁을 전개한 회의도 각부의 부장과 관등을 소지한 관료들이 공동으로 참여한 것으로서 군신이나 조신은 바로 이들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추측컨대 특정 지역의 사건을 처리하기 위한 법흥왕 11년의 14인 회의보다는 탁부의 모즉지매금왕과 사탁부의 사부지갈문왕을 비롯하여 더 많은 부와 관료들이 참여하였을 것으로 본다. 부족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무속종교를 초월하는 세계종교인 불교를 공인하는 문제는 전국가적인 중요성을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향전(鄕傳)’에서는 불교 공인을 반대한 대표적인 인물로서 공목(工目)과 알공(謁恭) 등 2인의 이름만을 전해주고 있다.

불교공인의 문제에 대한 일차의 논쟁에서는 봉불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이차돈이 처형당한 것으로 보아 국왕 중심의 찬성파가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율령이 반포되고 관등체계가 더욱 중시되어 가고 있었지만, 아직 국왕의 위상이 탁부라는 특정부의 부장으로서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존재였다는 한계 때문이다. 이차돈의 순교와 불교 공인의 시기에 대해서 ‘삼국유사’에서는 법흥왕 14년(527), ‘삼국사기’에서는 법흥왕 15년(528), ‘해동고승전’에서는 법흥왕 16년(529) 등 3종의 이설을 전하고 있는데, 오늘날 학계에서는 법흥왕 14년 설을 정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봉불파의 패배로 인하여 이차돈이 처형당하였고, 법흥왕 16년에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린 점 등을 고려할 때, 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 이후에도 수차의 논의를 거쳐 어느 시점에 마침내 공인이 결정되고, 그 결과로서 법흥왕 16년 살생을 금지하는 왕명을 통해 공인을 확정하기에 이른 것으로 본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69호 / 2018년 1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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