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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한스 홀바인의 ‘대사들’과 조선불화(끝)

기자명 주수완

미술은 동서양 초월해 인류 공통의 언어이자 정신적 다리

한스 홀바인 ‘대사들’ 작품은
프랑스 젊은 외교사절 그림

이들 발아래 비스듬한 물체
해골을 뒤틀어 그려 놓은 것

정면이 아닌 옆에서 보아야
해골의 모습이 제대로 보여

특정위치에서 보이는 기법
서양에서는 왜상 기법 불려

조선불화에도 비슷한 기법
왜곡된 인체비율이 대표적

서툰 것이 아니라 역원근법
각 방향서 부처님 시선 느껴

불교미술, 오래된 미감 아닌
현대에도 충분히 아름다워

한스 홀바인, ‘대사들’, 런던 내셔널갤러리, 1533년, 207×209.5㎝.

어느덧 연재를 시작한지 1년이 되었고 이제 마지막 회차가 되었다. 급작스레 건너뛴 느낌이 있지만, 오늘 소개해 드릴 작품은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는 한스 홀바인(Hans Holbein, 1497~1543)의 ‘대사들’이다. 홀바인은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와 더불어 르네상스 문화가 북유럽에서도 풍미했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특히 초상화 작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구교와 신교의 대립이 유럽을 먹구름 속으로 몰고 갔던 때였다.

그는 독일의 화가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18세 되던 해에 일감을 찾아 스위스로 이주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스위스는 원래부터 출판업이 발달되어 있었다. 다양한 인문학자들의 사상이 충만했었고, 더불어 다양한 서적들이 출간되던 곳이었다.

또한 그런 출판에는 삽화나 판화도 많이 들어갔기 때문에 안정적인 일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는 가운데 종교개혁의 열풍이 스위스 바젤에도 불어 닥치자 비교적 관용적이었던 바젤시조차 서적의 검열을 엄격히 강화했고 그러면서 출판계도 부진에 빠졌다. 그러던 1523년 홀바인은 종교개혁에 앞장서다 스위스로 무대를 옮겼던 에라스무스의 초상화를 그려준 계기로 그와 가까워졌는데, 마침 스위스에서 점차 일거리가 떨어졌던 그를 에라스무스는 영국의 친구였던 대법관 토마스 모어에게 추천해 주었다. 이에 홀바인은 영국으로 건너가 토마스 모어의 초상화도 그려주었는데, 그의 실력을 높이 평가한 모어가 다른 여러 지인들에게 그를 소개함으로써 새로운 일거리를 찾을 수 있었다. 2년 뒤 다시 분위기가 바뀐 바젤로 돌아온 홀바인은 그곳에서 여러 작업을 남겼지만, 결국 다시금 신·구교의 대립이 심해지자 1532년 또다시 영국행을 택했다.
 

‘대사들’의 하단 해골 부분을 옆에서 본 모습.

그러나 그곳에서의 상황도 많이 바뀌어 헨리 8세는 자신의 이혼에 반대한 토마스 모어를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 이때 홀바인은 토마스 모어가 자신이 어려울 때 천거한 은인임에도 불구하고, 과감하게 헨리 8세의 재혼 상대인 앤 불린 편에 섰다고 한다. 한편 이혼을 반대한 로마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영국만의 국교회를 세우고자 했던 헨리 8세를 달래고 로마 교황청과 중재해줄 목적으로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는 장 드 뎅뜨빌(Jean de Dinteville, 1504~1555)과 그의 친구인 조르쥬 드 셀브(Georges de Selve, 1508~1541)를 대사로 파견했다. 홀바인의 걸작 ‘대사들’은 바로 이 두 사람을 그린 것이다.

대사로 파견된 사람들이고 그림에서도 나이 지긋한 신사들로 보이지만, 이들이 헨리 8세를 방문했을 때 뎅뜨빌은 29세, 드 셀브는 25세였으며, 홀바인은 그림 속에 이들의 나이까지 구석에 적어두었다. 여하간 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헨리 8세가 성공회를 세운 것을 보면 결론적으로 이들의 중재는 실패한 모양이지만, 그림 속 주인공들은 중책이 버거운 듯 다소 긴장한듯하면서도 젊은이다운 패기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엿보인다.

배경에는 다양한 소품들이 보이는데, 장소가 이들의 터전인 프랑스가 아니라 영국이니만큼 상당히 의도적으로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홀바인의 아이디어인지, 아니면 그림 속 주인공들이 요구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하간 분위기는 이들이 상당한 지식인이며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예술적으로도 감성이 풍부한 사람들임을 보여주려고 한 것 같다.

홀바인은 특히 초상화에 있어 등장인물들의 터럭 하나, 눈빛 하나까지 그대로 재현하고, 입고 있는 옷의 질감이나 장신구의 반짝임까지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탁월한 재능이 있는 화가였다. 나아가 이런 섬세한 묘사를 통해 주인공의 성격까지 드러내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이 그림에는 희한한 물체가 하나 등장한다. 바로 이들의 발아래 비스듬히 놓인 돌덩이처럼 생긴 물건이다. 정교한 묘사가 특기인 홀바인이 그린 이 추상적이고 기괴한 것은 무엇일까? 실은 이 물체는 그림의 정면에서가 아닌 비스듬한 측면에서 바라봐야 정체를 알게 되는데, 바로 해골을 그린 것이다. 이렇게 상의 형태를 비틀어 놓아 특정한 위치에서 보아야 정상적인 모습으로 비춰지게 그리는 기법을 왜상기법(anamorphosis)이라고 한다. 홀바인은 왜 여기에 해골을 숨겨두었을까? 이런 기법이 흔한 것은 아니었던 만큼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이런 것을 홀바인이 그릴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른 상태에서 그려달라고 부탁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어쩌면 그림의 주문자가 무엇인가를 요구했고, 그것을 표현할 적당한 방법으로 이런 기법을 활용할 줄 알았던 홀바인이 이것을 그 답으로 제시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 주문자는 누구였을까? 그림 속 뎅뜨빌과 드 셀브였다면, 왜 이 그림을 프랑스에 가져가지 않고 영국에 남겨두었을까? 혹은 헨리 8세가 이들을 기록에 남겨두고 은근 조롱하고 싶었던 것일까?

여하간 현재 이 해골은 비록 특이한 방법으로 그려지기는 했지만 당시 초상화에 소품으로 해골이 종종 등장했기 때문에 그러한 일반적인 해골의 의미, 즉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의 뜻으로서 그림 속 인물이 삶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는 경건한 인물이었음을, 혹은 유한한 삶을 낙천적으로 바라보려는 인물이었음을 암시하는 알레고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비록 홀바인이 해골을 왜 이렇게 수수께끼 적으로 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런 독특한 기법 덕분에 이 그림은 더욱 유명하게 되었으니 여하간 홀바인은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형태를 왜곡시켜 다른 방향에서 볼 때 특정한 효과를 거두는 유사한 방법이 불교미술에도 있었던 것 같다. 당나라 때 활동했던 오도자와 같은 유명한 화가들이 벽화로 그린 보살들은 사람들이 지나감에 따라 눈동자를 돌려 사람들을 쳐다보기도 했다는데, 이를 ‘전목시인(轉目視人)’이라 표현하고 있다. 벽화 속 보살의 눈동자가 움직였다니 허황한 이야기로 들릴 수 있지만 실제 그렇게 느껴지게끔 표현하는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역(逆)원근법이다.
 

내소사 ‘영산회괘불도’. 1700년, 천신 비구 외 제작. 9.55×9.13m. 협시보살과 달리 중앙의 본존부처님은 어느 각도에서 보나 마치 ‘나’를 향해 정면으로 서계신 것처럼 보인다. 왜곡된 공간에 인체를 재구성한 효과이다.

원근법에서는 멀리 있는 것이 작아 보이는 것이 상식적인 것이지만 동양화에는 이상하게 멀리 있는 것이 더 커보이게 표현하는 역원근법이 자주 사용되고 있다. 그런데 이 역원근법은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그림이 마치 관찰자를 향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특징이다. 비록 당나라 때의 ‘전목시인’ 벽화들은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조선시대의 불화들을 통해 비슷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 불화들은 고려불화 속 불·보살의 인체 모델링에 비해 매우 서툰 듯한 왜곡된 인체묘사를 볼 수 있는데, 이는 기법이 퇴보한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그림 속의 공간을 전체적으로 일종의 역원근법적으로 벌려놓은 것이라 하겠다. 때문에 조선불화 속 주인공 특히 중앙의 부처님은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마치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내소사 영산회 괘불탱을 보면, 정면에서 보나 측면에서 보나 비교적 동일한 부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주변의 보살들은 방향에 따라 다른 방향을 보고 계시는 것 같지만, 부처님만큼은 어디서 보더라도 마치 ‘나’를 보고 계시는 듯하다.

이것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억불숭유 정책 때문에 절의 수가 줄고, 법회의 수가 줄면서 한 번의 법회에 참여하는 불자의 수가 갑작스레 많아졌기 때문에 생긴 변화로 생각된다. 즉, 과거에는 불화 앞에서 은밀히 부처님을 만나 기도하는 것이 일상적인 예불이었다면, 조선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불을 드려야하기 때문에 각각 부처님을 바라보는 각도가 달랐던 것이다. 이것을 고려해 비스듬한 옆에서 볼 때도 부처님이 ‘나’를 보시는 듯한 불화가 만들어졌으니, 홀바인의 왜상기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다.

옆에서 볼 때 진실을 알 수 있는 왜상기법은 어쩌면 화가가 사람들을 놀래키는데 사용했던 장난에 불과했을지도 모르지만, 최소한 조선에서는 부처님의 자비가 누구에게나 똑같이 돌아간다는 것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으니 참으로 아름다운 기법이 아닐까.

지난 1년간 비교한 서양미술과 불교미술의 관련성은 직접적으로 영향관계가 있어 비교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서로 무관한 것도 아니겠지만, 오히려 미술의 보편적인 현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었다. 서양의 거장들이나 불교미술의 거장들이나 궁극적으로 표현하려고 했던 점은 유사했다. 우리는 그것을 통해 미술은 세계 공통의 언어이며, 서로를 통하게 만들어주는 정신적 다리임을 실감할 수 있다. 또한 불교미술의 미감이 오래되고 낡은 것이 아니라, 미켈란젤로의 작품처럼 현대인에게도 얼마든지 멋진 아름다움으로 읽힐 수 있음이 조금이나마 전달되었다면 더 없는 보람이겠다. 1년간 읽어주신 독자제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주수완 문화재전문위원 indijoo@hanmail.net

 

[1469호 / 2018년 12월 1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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