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3·1만세혁명, 용성 스님 있었기에 세계의 꽃으로 피었습니다”

  • 집중취재
  • 입력 2018.12.24 14:03
  • 수정 2018.12.24 14:05
  • 호수 1470
  • 댓글 2

‘용성평전’ 탈고 특별 인터뷰 김택근 작가

엄혹한 시대에 속세 물들지 않은 선각자
외롭고도 철저한 수행 끝에 수차례 오도
보임 반복하면서 깨달음 스스로 점검해

3·1만세운동은 인류사에 길이 남을 혁명
용성 스님의 만세운동 역사 검증하면서
역동적으로 운동 주도했던 사실 확신해
비밀 유지해야 했던 독립운동의 특성상
심증만 있고 물증 부족해 고증에 난관도

용성과 만해, 항일독립운동 이견은 없어
취처 왜색불교에 대해서는 의견 상반돼
용성은 취처 반대하면서 청정비구 지향

용성, 서대문교도소서 수감 생활하면서
한자 갇혀있는 경전 번역 절실히 발원해
어린이와 부녀자 위한 포교 중요성 절감
종로에 대각사 창건이후 포교 역경 실천
찬불가 보급, 부인선방은 지금도 획기적

김택근 작가는 “용성평전을 집필하면서 3·1만세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지도자가 바로 용성 스님이었다는 후학들의 증언에 대해 확신을 갖게 되었다”고 강조했다.

1919년 3·1만세운동을 견인한 용성진종 스님의 평전이 3·1만세운동 100주년이 되는 2019년 3월1일을 앞두고 출간된다. 일제 강점의 혹독했던 그 시기에 용성 스님의 수행과 독립운동, 불교 대중화를 위한 전법의 삶은 ‘성철평전’ ‘새벽-김대중 평전’을 펴낸 김택근 작가의 집필로 완성됐다. ‘용성평전’을 탈고한 작가는 용성 스님이 주도했던 3·1만세운동을 인류사에 남을 혁명적 사건으로 평하고 기록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있으면서도 한문에 갇혀있는 불교를 대중화하기 위해 경전의 한글화와 지성화를 발원한 대목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길어 올리는 관세음보살의 위없는 원력이 읽힌다. 민족사적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도 빛을 발했던 용성 스님의 포교와 수행, 독립운동은 수많은 난제에 봉착해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에 어떠한 가르침을 줄 수 있을까? 용성평전을 탈고한 김택근 작가를 만났다.

 

용성 스님은 3·1만세운동 직후 서대문형무소로 끌려가 옥고를 치렀다. 수형카드 속 용성 스님의 수감 당시 모습은 김택근 작가가 탈고 인터뷰에서 밝힌 것과 같이 지옥을 연상케 할 정도로 깡말랐다. 국사편찬위원회자료실 제공

▶ 용성 스님은 일제가 강점한 암흑기에 홀로 횃불을 들고 청정비구의 길, 민족독립의 길을 찾아 나선 선각자였습니다. 역경의 초조, 선농불교의 초조로 불릴 만큼 불교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한 스님의 행장과 사상을 담아 용성평전을 탈고하셨는데요, 먼저 탈고 소감을 말씀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탈고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아요. 용성 스님의 행적과 역사를 추적하고 고증하는 일은 실로 만만치 않았습니다. 특히 지난 두 달간 막바지 작업이 매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끝없는 미로에서 출구 하나를 찾았다는 성취감도 들었습니다. 용성 스님은 속세로 내려와 도심 포교에 진력했음에도 세속에 물들지 않았습니다. 그런 행적들을 찾아가 새로운 것들을 발견했을 때는 희열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 용성 스님은 그 법맥이 범어사를 비롯한 백양사, 해인사, 화엄사 등 한국불교 절반의 문중에 두루 미치고 있습니다. 용성 스님의 법맥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선 계율을 복원하고 선풍을 높였다는 데서 그 의미를 찾아야할 것 같습니다. 스님의 행장과 사상을 더듬어보면 ‘불교 암흑기에 어쩌면 저렇게도 반듯하게 살 수 있었을까’하는 경외심이 듭니다. 한암 스님께서 용성 스님을 ‘경·율·론 3장에 있어서 당대 제일’이라고 평하며 자신을 찾아오는 선승들에게 용성 스님에게 가서 배우라고 권하셨습니다. 이는 결코 과장이 아닙니다. 당시 용성 스님은 모두가 닮고 싶어 하는, 요즘 말로 ‘스님의 롤 모델’이었습니다. 젊은 수좌들이 꼭 한번 용성 스님을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는 게 소원일 정도로 법력이 높았습니다. 또 왜색에 물든 불교를 다시 세우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 원력이 인재불사로 이어져 이렇게 우람한 법의 숲을 이뤘다고 생각합니다.”

▶ 용성 스님의 수행과 정진의 기록들을 살펴보다 보면 4차례 이상 오도를 증득하시고 다시 깨달음을 점검하는 보임(保任)의 시간을 되풀이 하면서 정진을 계속하시는 대목이 나옵니다. 용성 스님이 깨달음과 보임을 반복적으로 가진 것에 대해 어떻게 보시는지요?
“정계율의(淨戒律儀)가 무너지고 사자상승 전통의 맥이 끊긴 상태에서 용성 스님은 경전에 길을 물어 외롭게 구도의 여정을 이어갔습니다. 용성 스님이 설파하신 깨달음의 경지를 보면 참으로 구체적입니다. 이는 체험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용성 스님이 수차례 깨닫고 다시 보임을 한 것은, 스스로 끊임없이 이를 점검한 이유는 스승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느 때는 법거량을 자기 자신에게 한 적도 있습니다. 참으로 외롭고도 처절한 수행을 했습니다. 스님은 육조 혜능을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 깨달음의 경지를 스스로 점검했을 것이고 그 경계를 기록해 두고 무한히 반복해 점검했을 것입니다.”

▶ 일제강점기 당시 용성 스님은 일제에 맞선 비폭력 평화운동이었던 3·1만세운동을 견인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독립운동사에서 3·1만세운동이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만세운동에 있어서 용성 스님이 미친 영향은 어떠했나요?
“3·1만세운동과 시위는 가히 인류사에 남을 혁명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3·1만세시위는 운동이 아닌 혁명이라는데 동의합니다. 일제강점기는 3·1절을 계기로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고 생각합니다. 민족대표 33인이 거사 후에 변절했다며 3·1운동과 함께 평가 절하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무엄한 일입니다. 33인 중 구체적으로 변절한 사람은 3인에 불과합니다. 일제의 무단통치가 극에 달했던 엄혹한 시기에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을 한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어요.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살아있음을 만방에 알렸고, 백성들에게 독립에 대한 믿음을 심어주었습니다. 또한 3·1비폭력혁명은 이후 강압적인 폭력과 지배에 시달렸던 많은 나라와 민족에게, 세계 곳곳에 용기와 영감을 주었습니다. 용성 스님의 3·1혁명에 관한 역할은 아직 제대로 규명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번 평전 작업을 하면서 용성 스님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3·1혁명 당시 활약을 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거사 이틀 전에 만해의 요청을 받고 참여했다’는 기존의 설은 이제 수정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에 관한 증좌들을 ‘용성평전’에 밝혀놓았습니다. 아마 독자 여러분들께서도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 민족대표 33인으로 3·1만세운동 후 용성 스님은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셨습니다. 투옥 생활이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았는데요, 투옥생활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용성 스님은 56세에 옥에 갇혔습니다. 당시로서는 고령이었고 수감생활이 고통스러웠을 겁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그 고통을 토로하지 않았습니다. 당대 선승을 대표하는 큰스님이었기에 품격을 지켰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실제로 서대문 감옥은 분명 지옥이었습니다. 수감카드에 나와 있는 용성 스님을 보면 얼굴이 반쪽입니다. 그 사진을 보면서 저도 많이 아팠습니다. 출감 후에 용성 스님은 병마에 시달립니다. 그럼에도 왕성한 전법 활동을 하면서 결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수행자가 아니면, 깨달은 스님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는 일들이었습니다.”

▶ 용성 스님은 승려들의 취처육식을 반대하는 건백서를 조선총독부에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만해 한용운 스님은 용성 스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자이면서도 취처를 청하는 건백서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상반된 건백서를 보낸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두 분의 관계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만해가 승려의 결혼을 주장한 것은 아마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일본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용성 스님은 그런 만해의 주장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만해를 용성은 ‘마구니’란 표현을 쓰며 크게 경책하기도 하셨습니다. 반면 용성은 당시 대처육식의 풍토를 개탄하면서 이를 금해달라는 건백서를 보냅니다. 하지만 항일에 관해서는 이견이 없었습니다. 평전 집필을 위해 자료를 검토하면서 용성의 항일행적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습니다. 3·1혁명 당시 용성에 비하면 만해는 불교계 영향력이나 지명도에서 일천했습니다. 용성은 빛이 나는 스타였고, 15살 아래 만해는 신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 만해의 빛이 훨씬 강한 것은 다른 요인이 있어서 일 것입니다. ”

▶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김구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해방 직후 용성 스님이 주석하셨던 대각사를 찾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당시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은 용성 스님을 어떻게 평가했을까요?
“평전을 마쳤지만 그 부분은 여전히 분명하지 않습니다. 임시정부 요인들이 대각사를 찾아와 용성 스님을 참배하고 독립운동 지원에 고마움을 표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일들이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몇 조각의 사실만을 평전에 옮겨놓았습니다. 앞으로 계속 발굴해내고 증명해야 할 대목입니다. 제가 보기에 용성 스님은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심증은 가나 물증이 없는 부분이 안타깝습니다. 요시찰 인물이었기에 워낙 감시가 삼엄했을 것이고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비밀을 유지해야 했을 겁니다. 따라서 용성 스님의 행적도 알려지지 않았을 것이라 추론해 봅니다.”

▶ 용성 스님은 특히 ‘삼장역회’를 결성해 경전의 한글번역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셨고, 근대적인 도심포교를 위한 교당 개설 등 획기적인 포교 방안들을 많이 시도하셨는데요, 당시 이러한 용성 스님의 포교와 교육이 갖는 의미에 대해 설명해 주세요.
“용성 스님의 역경사업은 불교사에 한 획을 긋는 위대한 불사입니다. 스님이 감옥에 갇혀서 살펴보니 다른 종교의 경들은 알기 쉬운 한글로 되어 있지만 불교만은 어려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용성 스님은 그때 감옥에 갇혀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불경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불경이 한문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원을 세워 석방 후 역경사업에 주력합니다. 아무도 주목을 하지 않고 불가에서도 이를 비웃었지만 멈추지 않았습니다. 또 선승이 홀로 서울 종로 도심에 대각사를 세우고 도심포교에 나선 것은 아마 조선시대 서울에서 사찰이 사라진 이후 처음일 겁니다. 당시 불교는 교세가 극히 위축되어 있었고 일반인들은 불교를 미신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길 위의 포교활동은 여러 제약이 많았고 늘 현실의 벽에 부딪혀야 했으니 고단했습니다. 그래도 도심포교를 통해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실제로 대각사를 세우고 수많은 인재를 얻었습니다. 그들이 한국 선불교를 다시 세웠다고 감히 평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로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찬불가를 보급하고 부인 선방을 개설했습니다. 또 우리말로 예불 의식을 진행하고 그 절차를 간소화했습니다. 하나 같이 무릎을 치게 만드는 탁견이었습니다.”

▶ 용성 스님은 대각교(大覺敎)를 창시하셨습니다. 대각(大覺)은 부처님 또는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대각교를 세운 배경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대각교 창시는 세속에 물든 기존의 불교와 절연을 선언한 것입니다. 승려의 대처육식이 공식화되자 아예 불교를 뛰쳐나온 것입니다. 너무 과하다는 선승들의 만류가 있었지만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청정비구들을 위한 새로운 둥지를 만들겠다는 원력이 금강석 같이 굳었던 것입니다.”

▶ ‘성철평전’에서도 기록했던 것과 같이 ‘봉암사 결사 공주규약’의 모범이 된 용성 스님의 결사 규약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용성 스님의 결사 규약은 어떤 것이며 봉암사 결사 공주 규약에 미친 영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도봉산 망월사에서 결행한 ‘만일참선결사’가 있었습니다. 사견이지만 봉암사 결사는 망월사 결사를 이어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간화정로, 동구불출, 오후불식, 묵언수행 등 수행법이 매우 흡사합니다. 봉암사 결사의 주역인 자운, 성철 스님 등이 용성 스님의 제자, 손제자들이며 아마도 용성 스님의 결사에 직간접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실제로 혜총 스님은 자운 스님으로부터 평소 “봉암사 결사는 망월사 결사를 이어받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이는 매우 중요한 증언입니다. 확실히 망월사 결사는 예사롭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를 간과하고 있지만 앞으로 새롭게 조명하여 불교사에 편입시켜야 할 것입니다.”

▶ 용성 스님께서 지금 이 시대에 오신다면 우리 불교계와 사회를 향해 어떠한 가르침을 내리셨을까요?
“글쎄요, 참으로 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편을 가르고 이분법에 매달려 있는 종단과 사회를 향해 죽비를 드신다고 한다면 아마도 “너희는 아직도 있고 없음에 머물러 있는가?”하고 꾸짖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남배현 도서출판 모과나무 대표 nba7108@beopbo.com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