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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보리심 발하여 일향으로 염불하라

중국 정공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 ㉚

극락세계 보살은 세상일에 초연
하루종일 한가롭게 노닐며 자재
그러나 마음속은 게으르지 않아
일심으로 쉼없이 아미타불 염불

정공 스님은 마음이 치우치지 않고 중하면 평등하고 마음이 치우치면 불평등하여 편애가 있고 편차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정공 스님은 마음이 치우치지 않고 중하면 평등하고 마음이 치우치면 불평등하여 편애가 있고 편차가 있다고 말씀하신다.

“극락세계 보살은 자유자재하게 출입하면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경법을 지혜로 관하여 일상에서 도를 실천한다(出入供養 觀經行道).”

극락세계 보살은 타방세계로 가서 제불여래께 공양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본사 아미타여래께 공양합니다. 이렇게 출입 공양하면서 복을 닦습니다. 지혜로 관조하여 경전의 의미를 철저히 이해하고, 신구의 삼업으로 행하여 심성과 완전히 상응합니다. 이렇게 관경 행도하면서 지혜를 닦습니다.

“오랜 시간 훈습하여 법희 충만하고 좋아하며, 재주가 뛰어나고 용맹하고 지혜롭다(喜樂久習 才猛智慧).”

일문에 깊이 들어가 법희가 충만하고 즐겨하며 오랜 시간 훈습하여 더욱 깊이 들어갑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인지(因地)에서 뛰어난 재주와 용맹 명석함을 드러내 보이셨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고 어리석습니다. 그러나 극락세계에 가서 아미타부처님 위신력의 가지를 받으면 우리도 그렇게 바뀝니다.

“신심이 견고하여 도중에 물러나지 않고 게을리하지 않는다(心不中回 意無懈時).”

제불여래께서 시방세계에서 성불하고 수학하는 방법은 같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참선을 배우고 어떤 이는 밀교를 배우며, 어떤 이는 계율을 배우고 어떤 이는 현교를 배웁니다. 극락세계 보살은 날마다 겉으로는 시방제불을 참방하고 만나서 그들이 경전을 강설하고 설법하는 것을 듣습니다. 여전히 착실히 아미타불을 염하면서 그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참선도 괜찮아 보여 이들을 따라서 참선하고, 밀교도 괜찮아 보여 이들을 따라서 주문을 외운다면 이런 마음은 중도에 물러나는 것입니다.

이는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53분의 선지식을 참방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선재동자는 어떤 법문을 닦았습니까? 염불하며 정토에 태어나길 구하였습니다. 53분의 선지식 중에서 덕운 비구, 선현 보살 두 보살이 염불법문을 닦은 것을 제외하고 그밖에 선지식은 자신이 배우는 법문이 각각 서로 달랐습니다. 선재동자는 그들이 각양각색으로 또렷하게 닦는 모습을 보아도 여전히 착실히 염불하여 바꾸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선재동자의 스승이 문수사리보살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문수사리보살께서는 ‘화엄경’에서 정토에 태어나길 구하겠다고 발원하였습니다. 스승이 정토에 태어나길 구하였는데, 스승의 가장 촉망받는 문하생이 다른 법문을 배우겠습니까? 스승은 당연히 견줄 수 없이 수승한 정토법문을 학생에게 전해줄 것이고, 학생도 반드시 염불하여 정토에 태어나길 구할 것입니다.

가장 처음 만난 덕운 비구는 선재동자에게 염불하길 권하였습니다. 먼저 들은 말은 중요하게 여기게 마련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도 보현보살께서 십대원왕(十大願王)으로 극락으로 인도하여 돌아가십니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 부처님 명호를 염불하여 왕생하였습니다. 선재동자는 마음이 중도에 바뀌지 않았습니다. 극락세계보살은 날마다 모두 53참을 닦습니다. 그들이 참방하는 것은 보통의 선지식이 아니라 일체 제불여래입니다.

극락세계 보살은 한마디 부처님 명호를 끝까지 염하니, 완전히 대세지보살과 같습니다. 그들은 하나의 목표, 하나의 방향으로 일미로 정진합니다. 진실로 보리심을 발하여 일향으로 전수염불합니다.

“겉으로는 한가롭고 느릿느릿하게 보여도, 속으로는 쉼 없이 빨리 달려가고 있다(外若遲緩 內獨駛急).”

극락세계 보살은 매우 한가하여 아무런 일없이 하루 종일 세상일에 초연하여 한가롭게 노닐며 자재합니다. 이들 보살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유유자적할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진실로 열심히 노력하고 있고 지금껏 게으른 적이 없습니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있을까요? 일심으로 중단 없이 ‘아미타불’을 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매우 한가하고 자재하며 매우 즐거워서 하루 종일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도 한마디 부처님 명호를 염하길 가늘고 길게 이어져 끊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 심량은 허공과 같이 청정광대하여 일체를 포용하고, 꼭 알맞게 중도에 들어맞는다(容容虛空 適得其中).”

여기서 ‘용용(容容)’은 공경심으로 화합한다(和敬)는 뜻으로 절집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계율 조항인 ‘육화경(六和敬)’입니다. 그것은 견해로 화합하여 함께 이해하고(見和同解), 계행으로 화합하여 함께 닦으며(戒和同修), 몸으로 화합하여 함께 머물고(身和同住), 입으로 화합하여 다투지 않으며(口和無諍), 뜻으로 화합하여 함께 기뻐하고(意和同悅), 이익으로 화합하여 함께 나누는 것(利和同均)입니다.

이것은 바로 극락세계 보살의 모습입니다. 그들은 대단히 화목하며 함께 지내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한 곳에 있어도 매우 사랑하는 부자형제와 같아 조금도 다른 주장이 없고 화목할 뿐입니다. 또한 사람마다 마음이 모두 청정하여 허공 가운데 한 물건도 없습니다. 마음이 청정하고 마음이 광대하여 사람마다 모두 이러합니다. 심량이 광대하고 청정함이 견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중도(中道)를 말씀하셨고, 유학자는 중용(中庸)을 말합니다. 세간 출세간의 대성인은 모두 중(中)을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중은 치우지지 않는 것으로 원융중도를 말합니다. 중을 쓸 수 있으면 이사무애·사사무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치우치지 않고 중하면 평등하고, 마음이 치우치면 불평등합니다. 편애가 있고 편차가 생깁니다. 중은 편차가 없습니다. 우리는 중을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극락세계 보살은 각자 모두 중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속마음과 겉모습이 하나로 상응하여 위의가 저절로 엄정하다(中表相應 自然嚴整).”

여기서 ‘중(中)’은 속마음이고, ‘표(表)’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여기서의 중은 위의 중과 뜻이 완전히 다릅니다. 위의 중은 중도의 뜻이고, 아래의 중은 중심의 뜻으로 겉과 속이 일여하여 절대로 허위가 없음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과 바깥으로 드러낸 일체 조작이 완전히 상응합니다. 이것이 겉과 속이 일여한 경계입니다.

진실로 이러한 경계는 우리가 늘 말하는 만법원융이고 사사무애입니다. 극락세계 보살은 모두 이러한 경계에 도달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에든 상관없이 모두 저절로 장엄하여 그 모습이 바르고 단정합니다.

허만항 번역가 mhdv@naver.com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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