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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 외면하고 기득권화 되면 불교 더 이상 설자리 없다”

불교계 낙인찍기 비판 방식 성행
타인비방,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
‘누군가가 잘못됐다’가 아니라
‘어떤 점이 잘못’으로 바뀌어야

역대 총무원장 임기, 1년10개월
불교계 기반이 허약했음을 반영
비구니 차별, 시대적 흐름에 역행
종교용어, 특정종교 전유물로 전락

이재형 법보신문 편집국장은 “불교계 내부의 비구니 차별은 남녀평등의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라며 “차별과 부조리를 해소하지 못하면 ‘신뢰받는 불교’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이재형 법보신문 편집국장은 “불교계 내부의 비구니 차별은 남녀평등의 시대적 흐름에 역행하는 일”이라며 “차별과 부조리를 해소하지 못하면 ‘신뢰받는 불교’는 요원하다”고 지적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4. 비판
지난 9월 제36대 조계종 총무원장에 원행 스님이 당선되고 일단 잠잠해지기는 했지만 지난 몇 년간 조계사 인근에서는 과격 시위가 그치지 않았다. 올해 불교단체들의 시위에서는 스님들을 향해 “꽃뱀” “도둑놈” “중놈” “호로새끼” “강도” “절도범” “표절자” “권승” 등 특정인을 낙인찍고 비난하는 구호들이 난무했다. 그리고 불교계에 이러한 낙인의 비판 방식이 점차 자리 잡고 있는 분위기다.

‘낙인(Stigma)’은 쇠붙이를 불에 달궈 찍는 도장으로 가축이 자신의 소유임을 나타내거나 범죄자임을 표시하기 위해 사용됐다. 근대 이후 ‘낙인찍기’는 학살, 탄압, 숙청을 정당화하기 위한 선동방식으로 적극 활용됐다. 특정인과 단체의 긍정적 이미지를 단박에 끌어내리고 동조자들을 결속시키는 효과가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때 인권, 남북관계 개선, 노동자 권리를 주장하면 곧바로 ‘종북’의 낙인이 찍히고, 간첩 취급받았던 것이 대표적 사례다. ‘선동은 문장 한 줄로도 가능하지만 그것을 반박하려면 수십 장의 문서와 증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반박하려 할 때면 사람들은 이미 선동돼 있다’는 나치 선정부장 요제프 괴벨스 말처럼 한번 실추된 이미지를 되돌리기란 극히 어렵다.

누군가를 향해 ‘절도범’ ‘표절자’ ‘권승’ 등 낙인을 찍어 부정적인 이미지를 무차별 확산시키면 다른 긍정적인 활동과 이미지는 다 배제되고 당사자의 인생은 그저 절도범이며 표절자에 불과할 따름이다.

불교에서는 타인을 비방하는 언어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천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렇기에 불자라면 어떤 악에 대응하더라도 자신이 청정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종교성을 상실하게 된다. 불교적인 비판은 고성과 삿대질에 있지 않다. 비판을 하더라도 “누군가가 잘못됐다”는 방식이 아니라 “누군가의 어떤 점이 잘못이다”라는 의도적인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대장엄론경’과 ‘육도집경’ 등에 나오는 여섯 개의 상아를 가진 흰 코끼리가 그리했듯 사람만 볼 것이 아니라 가사와 승단을 봐야 한다. 그럴 때 불교계에 존중의 비판문화가 정착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5. 총무원장
지난 몇 년간 불교계에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늘 총무원장이 있었다. 지난해 10월 덕숭총림 방장 설정 스님이 총무원장에 취임할 때까지만 해도 올해 종단이 이렇게까지 혼란으로 치달을 줄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나 출마 직후 불거졌던 각종 의혹들이 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되면서 지난 8월16일 조계종 중앙종회에서 총무원장 불신임안이 가결되고 8월22일에는 원로회의에서 총무원장 불신임안이 통과되면서 조계종 사상 처음으로 총무원장이 탄핵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같은 총무원장 탄핵은 조계종사에서 찾아보기 어렵지만 총무원장을 둘러싼 갈등은 늘 끊이질 않아왔다. 조계종 종정이 법의 상징이라면 총무원장은 조계종의 행정을 총괄하는 수반이다. 전국 사찰 주지 임명권을 비롯해 사찰 재산 감독 및 처분권을 갖는다. 큰 권한을 지닌 총무원장은 선망의 자리일 수는 있지만 존경받기는 쉽지 않다. 수많은 이해관계가 모이고 그 결정의 최종 결정권자가 총무원장이기 때문이다. 총무원장은 자신의 결정과 행보에 따라 찬사와 원망이 뒤따르고는 한다. 때로는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거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중도에 물러나는 사례들도 적지 않다. 역대 총무원장들 재임 기간을 살펴보면 이 같은 사실이 여실히 드러난다.

1962년 4월11일, 조계종 통합종단이 출범한 후 초대 총무원장 석진 스님을 시작으로 현재 36대에 걸쳐 총무원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이중 서울 칠보사 조실이었던 석주 스님이 3회, 청담, 경산, 영암, 월주, 의현, 자승 스님이 2번씩 맡았으므로, 지금까지 29명이 총무원장직을 수행한 셈이다. 또 통합종단 출범 이후 총 66년 6개월 동안 5명의 권한 대행(탄성, 도법, 원택, 선용, 현고 스님) 직무기간 약 9개월을 제외하면 총무원장의 평균 재임 기간이 약 1년 10개월에 불과하다. 심지어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난 총무원장도 전체 35대 중 18대로 절반이 넘는다.

그렇다면 총무원장 스님들의 재임기간이 이토록 짧았던 것은 왜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불교계 기반이 허약하고 늘 요동쳤다는 사실이다. 1960년대는 불교정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1970년대는 종단 내부 갈등으로, 1980년대는 10‧27법난 등 외부 요인까지 겹치면서 내홍은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총무원장의 짧은 임기는 불교계의 혼돈과 낮은 위상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지금까지의 통계상으로만 본다면 4년의 임기를 마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11월13일 취임사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제36대 총무원장의 소임을 시작하는 이 자리에서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승가는 승가답게, 불자는 불자답게, 사부대중 모두가 주어진 책임과 역할을 다하고, 함께 수시로 탁마함으로써 한국불교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총무원장이 되겠습니다”라고 밝혔다.

총무원장 원행 스님이 4년 뒤 박수를 받으며 떠날 것인지 아닌지는 원행 스님 스스로 밝혔듯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대중들과 소통으로 화합을 도모하는지 여부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스님과 불자들이 “끝까지 지켜보겠다”는 날카로운 매의 눈이 때때로 필요하겠지만 깊은 신뢰와 따뜻한 시선도 총무원장스님이 4년간 종교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데 큰 힘이 될 것임이 분명하다.

6. 평등
종교계는 남녀 중 누가 불평등하냐는 논란이 무색한 곳이다. “남자라는 성별이 대한민국 최고의 스펙”이라는 고 노회찬 의원의 지적이 종교계보다 더 적절한 곳은 찾기 어렵다. 종교와 관련된 숱한 제도, 문화, 관습에서 혹독한 여성차별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는 불교계도 마찬가지다. 여성으로 태어나 출가했기에 받아야 하는 차별은 일생을 따라 다닌다.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대다수 비구니스님들은 신심 하나로 살아가는 일꾼에 가까웠다. 불경을 배울 곳이 마땅히 없었고 배움에 뜻을 세웠더라도 온갖 냉대와 괄시를 견뎌야 했다. 혹시나 벌어질 성추행이나 성폭행에 떨어야 했고, 행여 불미스러운 일이라도 있으면 고스란히 비구니스님에게 책임이 전가됐다. 근래에도 비구스님들이 ‘팔경법’을 내세워 비구니스님들을 무시하는 일이 태반이었고, 비구니는 비구보다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는 글을 썼다가 비구강원 스님들이 단체로 몰려와 압박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 같은 불교계 내부의 비구니 차별은 남녀평등의 시대적 흐름을 역행하는 일이다. 동시에 ‘이 법은 평등하여 위아래가 없다(是法平等 無有高下)’는 불교의 평등정신과도 위배된다. 전 세계적으로 여성 대통령과 총리들이 활약하는 시대에 ‘82년생 김지영’보다 더 노골적인 차별을 감수해야 하는 여성출가자의 길을 누가 선뜻 택하겠는가.

총무원장 원행 스님은 선거과정에서 비구니특별교구 설립 등 비구니스님들의 위상 강화를 약속했다. 차별과 부조리를 해소하지 못하고 ‘신뢰받는 불교’는 요원하다. 한국불교는 비구니차별이라는 역주행을 멈춰야 한다. 비구니스님들도 이제 목소리를 높여야 할 때다. 평화는 저절로 오지 않으며 권리는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7. 종교용어
한국현대사에서 불교를 비롯한 전통 종교는 약자였고,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기독교는 종교 인구수를 떠나 처음부터 강자였다. 그렇기에 전통종교를 향한 수많은 차별과 왜곡은 필연적이었다. 이는 종교용어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기독교 번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꼽히는 ‘하느님’ ‘하나님’은 ‘한울님’과 더불어 수천 년을 이어온 한민족의 용어였다. 유대의 신인 ‘야훼(여호와)’는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1992년 원주 지역의 전통종교 대표자가 가톨릭 서울대교구장과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를 상대로 ‘하느님 명호 도용 청구의 소’를 법원에 제소하는 일도 있었다. ‘갓(God)’이라고 쓰면 될 것을 한민족의 고유명사를 쓰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고유한 경배심을 가로채는 참칭이며 도용이라는 것이다.

그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기독교계에는 상대 종교에 대한 배려를 찾기 힘든 용어들이 적지 않다. ‘성탄절’ ‘성경’ ‘교인’ ‘교황’ ‘성가’ ‘복음’ 등 용어는 결코 특정 종교의 전유물이 될 수 없다. 다른 종교에도 종조나 교주의 성스런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과 그분의 가르침을 담은 ‘성경’,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교인’이 있기 때문이다. ‘교황’도 가톨릭교의 황제일 뿐이지 모든 종교의 황제가 될 수는 없다. 설령 기독교계 내에서 이런 용어를 사용하더라도 일반 언론까지 비판 없이 쓰는 것은 무책임에 가깝다. 기독교인들이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른다고 언론에서도 일요일을 ‘주일’이라 부르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언어의 점유는 사유의 점유’와 직결된다. 제국주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종교 용어를 둘러싼 제국주의 사고와 차별은 여전히 팽배하다. 여기에 학계와 언론까지도 합세하고 부추기고 있다. 세월이 간다고 이러한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불교계에서 지적하고 개선시키려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바뀔 수 있다.

불교가 대중을 외면하고 기득권화 되면 불교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점을 강조했다. 달라이라마도 ‘종교를 넘어’라는 저서에서 “무관심은 그 자체로 이기심의 한 형태”라고 지적하며 “우리가 도덕에 접근하는 방식이 진정으로 의미 있으려면 당연히 세상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재형
법보신문 편집국장

2012년부터 조계종 사노위가 환경, 노동, 인권 등 사회 전반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사노위를 비롯한 불교계의 이 같은 사회참여 노력은 불교의 위상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만 의미가 있지 않다. 오히려 불교에 끊임없이 생명력을 불어넣은 일이며 불교의 가치를 세상에 구현하는 길이라는 점에서 보다 큰 뜻이 있다. 그 길은 열어가는 것은 스님들과 불자들의 역할일 것이다.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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