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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도봉산 영국사지(寧國寺址) (끝)

기자명 임석규

서원터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대찰의 흔적과 찬란한 유물

조광조·송시열 배향했던
조선중기 대표사액 서원

수차례 파괴와 복원 거듭
19세기 서원철폐령에 폐지

복원 위한 유림의 노력으로
2010년 본격적인 발굴조사

조사결과 성보 대거 출토
고려 영국사 흔적 드러나

금강저·향로 등 유물 79점
청동솥 안에 담긴 채 발견

혜거국사비 조각들도 나와
서원터가 영국사로 밝혀져

고려시대 석경 존재 확인
가장 오랜 천자문도 출토

도봉산 영국사지.

서울시 도봉구와 경기도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있는 도봉산은 예로부터 자운봉, 만장봉 등 우뚝 솟은 백색 화강암 봉우리와 기암, 암벽이 어우러진 장관 때문에 인적이 끊이지 않는 명산이다. 특히 만장봉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오는 도봉계곡 옆(서울시 도봉구 도봉동 도봉산길 90)에는 유서 깊은 조선시대 서원터가 하나 남아있는데, 조선초기와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 조광조와 송시열을 제사지냈던 도봉서원터(서울시기념물)의 자취이다.

도봉서원은 수려한 영국동계곡(도봉계곡)을 즐겨 찾았던 정암 조광조(趙光祖, 1482∼1519)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1573년(선조 6) 영국사 터에 건립되어 ‘도봉(道峯)’이라고 사액되었다. 1696·1775년(숙종 22·영조 51)에는 우암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많은 문인들이 서원과 계곡을 찾았고 시와 글을 남겼다. 도봉서원은 임진왜란을 비롯한 여러 전란과 자연재해로 불타거나 쓸려간 건물들은 지속적으로 재건되었으나, 19세기 말 서원의 적폐를 없애기 위해 실시한 서원철폐령으로 폐지되었다. 그 후 1903년 서원 터에 다시 제단이 만들어졌고 1970년대에는 사우를 복원하는 등 서원을 복원하기 위한 지역 유림의 노력이 이어졌다. 2009년에는 ‘도봉서원과 각석군’이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28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을 계기로 2010년부터는 도봉서원의 복원정비계획을 수립하고 발굴조사, 학술대회 등을 열기도 했다.

영국사지출토 혜거국사비 탁본.
영국사지출토 혜거국사비편.

그런데 2012년 도봉서원 복원을 위한 고고학 자료를 얻기 위해 시행된 발굴조사에서 고려시대 번성했던 큰 절 영국사가 서원터 위에 자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대거 출토되었다. 도봉서원이 영국사 위에 세워졌다는 얘기는 조선시대부터 있어왔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했었기 때문에 새롭게 발견된 불교 유적과 유물은 문화재계의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서원터에서 금강령, 금강저, 향로 등 고려 때 보물급 불교공예품들이 청동솥 안에 담긴 채 쏟아져 나왔고, 서원의 핵심 건물터도 사찰의 금당자리 위에 지어진 흔적이 드러난 것이다. 당시 이 유적에서 출토된 청동제 불교공예품은 모두 79점이며, 정면 3칸, 측면 3칸 이상으로 추정되는 방형 건물지에서 출토되었다. 출토품 중에는 오대명왕 등 11구의 존상이 조각된 금강령과 금강저가 포함되어 있으며, 청동향로와 향합에는 ‘도봉사(道峯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이때까지 영국사라는 명문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유물들은 2018년 한성백제박물관에서 열린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특별전 ‘천년 만에 빛을 본 영국사寧國寺와 도봉서원’ 특별전에 출품되는데, 이 전시를 준비하며 청동 굽다리에서 ‘계림공(鷄林公)’이라는 글자가 새롭게 확인되었다. 즉 불교공예품들은 고려 숙종이 계림공에 봉해졌던 1077년(문종 31)에서 즉위 전인 1095년 사이에 제작된 것이었다.

서원터라고만 생각했던 곳에서 고려시대 불교공예품이 대량으로 발견되면서 조선시대 서원이 세워지기 이전에 사찰이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었고 도봉서원의 복원은 보류되었다. 2017년부터 불교문화재연구소에서는 기존 조사 층의 하부에 대한 발굴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새롭게 출토되는 유적과 유물을 통해 도봉서원 지하에 있던 사찰의 규모와 성격을 찾아가고 있다.

2017년 발굴조사의 가장 큰 성과는 고려시대 고승 혜거국사(慧炬國師)의 비석 조각이 출토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혜거국사는 10세기 중국 오월 지역으로 유학 가서 법안문익(法眼文益, 885~958) 스님에게 공부하고 돌아와 선종의 일파인 법안종을 고려에 전파한 인물이다. 법안종은 고려 4대 임금 광종(재위 949~975년)이 불교를 개혁하고 선교 양종(兩宗)을 통합하고자 들여온 종파로 혜거국사가 처음 전파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의 스승인 법안문익 스님은 법안종을 창시한 고승이다. 송나라 때 펴낸 역대 고승들의 연대기인 ‘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에는 국왕이 유학 중인 혜거 스님에게 사신을 보내어 왕사(王師)의 예로 맞았다는 기록과 함께 그가 위봉루에서 설법한 행적이 전해지고 있다.
 

영국사지출토 석각 천자문편.

혜거국사비는 지금까지 선조의 손자 이우(1637∼1693)가 현종 9년(1668)에 신라시대 이후의 금석문 탁본을 모아 엮은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88자의 탁본만이 실려 전해왔으나 실물은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새롭게 발견된 비석 조각은 화강암으로 제작되었으며 모두 281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 중 판독된 글자는 256자이고, ‘견주도봉산영국사’(見州道峯山寧國寺)라는 명문이 확인되었다. 견주는 경기도 양주의 옛 지명이다. 도봉산 일대가 고려, 조선시대에는 양주 땅이었으므로 영국사는 도봉서원터에 앞서 들어섰던 사찰임이 명확하게 확인된 것이다. 혜거국사비의 탁본을 실은 ‘대동금석서’에는 편집자 이우가 ‘영국사 혜거국사비’라고 직접 적은 명칭만 있고, 정작 탁본에는 절 이름 없이 혜거국사란 이름만 나온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탁본의 영국사가 도봉산 자락의 영국사인지, 충북 영동 영국사인지를 놓고 그동안 견해가 엇갈려왔는데, 비 조각의 발견으로 인해 해묵은 의문이 풀리게 되었다.

그리고 ‘대동금석서’에는 이런 내력을 지닌 ‘영국사’의 혜거국사비 탁본과 경기도 화성 용주사에 있던 ‘갈양사’의 혜거국사비 탁본이 별도로 실려 있다. 갈양사 혜거국사비 탁본에는 혜거 국사가 고려 최초의 국사(나라를 이끄는 큰 스님에게 붙였던 존칭)였다고 나온다. 학계에서는 불도를 닦은 절이 각기 다르게 나오는 두 혜거국사가 같은 사람인지, 다른 사람인지를 놓고도 혼선이 있었는데, 비문조각의 기록을 통해 서로 다른 인물임이 밝혀지게 됐다. 비문 내용 중에 “국사의 휘(諱:죽은 이의 생전 이름)는 혜거, 속성은 노씨고 동자성의 사람으로, 스승을 찾아다니다 드디어 도봉산의 신정선사를 찾아갔다”는 구절이 보이는데, 탁본 명문에 나오는 갈양사 혜거국사는 성이 다른 박씨로 나오기 때문이다.
 

영국사지출토 금강저.
영국사지출토 금강령.

영국사지에서는 혜거국사비편 이외에도 글자가 새겨진 돌조각들이 여러 점 발견되었는데 모두 작은 조각들이어서 판독하기가 쉽지 않았다. 우리 연구소에서는 비문판독의 권위자이신 송광사의 고경 스님께 문자편들의 판독을 부탁드렸는데, 스님은 지난 해 11월 여러 조각들 속에서 천자문 석각을 확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유일한 ‘석각 천자문’이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천자문 판본은 1575년 펴낸 ‘광주판 천자문’(일본 도쿄대 소장)이 꼽혀왔으나 이 석각본 발견으로 천자문 실물의 역사는 500년 이상 올라가게 되었다.

10세기께 고려 초기 것으로 판명된 이 천자문 석각은 5~6세기 중국 양나라 문인 주흥사가 지은 ‘천자문’ 250구 가운데 163구와 165구, 167구의 앞 구절 일부가 새겨진 것으로 드러났다. ‘다스림은 농사로서 밑바탕을 삼는다’는 뜻의 163구 ‘治本於農’(치본어농)의 ‘治本…’ 부분과 165구 ‘남쪽 이랑에 나가 일을 한다’는 뜻의 ‘俶載南畝’(숙재남무)의 ‘俶載…’, 167구 ‘익은 곡식에 구실을 매기고 햇것을 공물로 바친다’는 뜻의 ‘稅熟貢新’(세숙공신)의 ‘稅熟…’ 부분이 반듯하고 골격 잡힌 해서 글씨체로 표기되어 있다.

국내 학계는 주흥사의 ‘천자문’이 한반도 삼국에 곧장 전해졌다고 짐작해왔다. 일본사서 ‘일본서기’에는 3세기 백제 박사 왕인이 일본에 ‘천자문’을 전했다는 기록이 전하지만, 주흥사의 ‘천자문’보다 일러 다른 종류의 천자문을 전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천자문 실물의 경우 널리 알려진 명필 한호의 ‘석봉천자문’(1583년 초간)을 비롯해 조선시대 판본들만 전해져왔고 삼국·고려시대 것들은 전무했다. 15세기 안평대군의 해서·초서본과 사육신 박팽년이 썼다는 초서본이 가장 오래된 글씨본으로 꼽혀왔는데, 후대 계속 판각돼 쓰였다. 가장 오래된 판본은 1575년 펴낸 ‘광주판 천자문’(일본 도쿄대 소장)이 꼽혀왔으나 이번 석각본 발견으로 천자문 실물의 역사는 500년 이상 올라가게 됐다.

그리고 석각 천자문과 함께 ‘묘법연화경’을 새긴 고려시대 석경의 존재도 확인되었다. 현재 국내에 남아있는 고대 석경은 구례 화엄사의 ‘화엄석경’과 경주 창림사터에서 나온 ‘법화석경’, 경주 남산 칠불암에서 나온 ‘금강석경’뿐인데, 모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고 고려시대 석경은 영국사지에서 출토된 것이 유일하다. 지금까지 판독된 것은 ‘묘법연화경’ 권제1 방편품, 권제1 서편품, 권제2 비유품 등이다.
 

영국사지 출토 청동불구.

도봉서원을 복원하기 위해 시작한 2011∼2013년 발굴조사에서 도봉서원은 많은 부분이 파괴되고 유실되어 명확한 배치를 확인할 수 없었다. 유적의 보존과 정비 방향은 서원 복원과 하층 영국사 발굴 등으로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정비에 앞서 유적의 역사성을 밝혀야 한다는 불교계의 의견에 서울시와 도봉구, 유교계가 뜻을 함께 하였다. 2017년 시작한 하층 발굴조사에서 조선시대 영국사를 비롯해 예상도 못한 혜거국사비편과 고려시대 영국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영국사와 도봉서원의 명확한 범위를 확인하였으며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어졌던 영국사와 이곳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혜거국사의 행적을 일부나마 밝히게 된 것이다. 사라졌던 유적을 발굴해서 고려시대 전기 사상사를 한층 더 윤택하게 할 수 있었다. 2018년 발굴조사에서는 문루와 강당지로 추정되는 남쪽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였으며, 영국사와 도봉서원의 실체는 중심부에서 주변으로 이어지는 연차조사를 통해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조사의 바탕위에 불교와 유교가 상생할 수 있는 정비계획이 마련되길 기대한다.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유적연구실장 noalin@daum.net

 

[1470호 / 2018년 12월 2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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