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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특집 인터뷰] 권기종 동국대 명예교수

  • 새해특집
  • 입력 2019.01.02 14:06
  • 수정 2019.01.03 09:36
  • 호수 1471
  • 댓글 3

‘초발심자경문’에 매료 “해인사로 돌아갔다면 수행자로 살았을 것”

신심깊은 부친 영향으로
중학생 때 불교서적 탑독
고등학교 졸업 후 출가 단행

3년만에 강원 이력 모두 마쳐
“정화 혼란 시기 강원 옮기며
여러 스승 만난 것이 학문 토대”

교법사·군법사 모두 1기 진기록
“당시 군대 내의 불교 인식은
무속과도 구분 못하는 수준
‘군승’은 호칭으로 부적절
군법사로 바로 잡아야 할 것”

세수 여든인 권기종 동국대 명예교수는 “부처님께서 세수 여든까지 법을 펴셨던 것처럼 나도 올해까지만 강단에 설 계획”이라고 말한다. 후학들에게 자리를 비워주기 위함이다.

노학자의 실루엣은 여전히 우뚝했다. 줄무늬가 살짝 보이는 셔츠 위로 반듯하게 자리 잡은 넥타이와 짙은 회색 머플러, 챙이 그리 넓지도 좁지도 않은 패도라를 쓴 모습은 멀리서 보아도 흐트러짐 없이 단정했을 그의 인생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세수 여든에 이른 권기종 교수. 현재 동국대 명예교수인 그는 누구보다 많은 타이틀을 지니고 있다. 천태종 원각불교사상연구원장, 한국불교학회장,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을 역임했고 대한민국 1기 군법사이자 1기 교법사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해인사강원(승가대학) 3기 졸업생이기도 하다. 그의 발자취는 그대로 한국불교 근현대사의 한 장면이고, 불교학의 성장일기다. 아니 그의 발걸음이 한 번도 불교, 부처님의 회상을 떠난 적 없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책 한번 읽어 보거라.”

부친은 이제 갓 중학생이 된 둘째 아들 권기종에게 책 한권을 내밀었다. ‘초발심자경문’이었다. 고향 안동서도 손꼽히는 재가불자였던 부친의 법명은 ‘성산거사’였다. 안동뿐 아니라 대구, 예천, 전주 등 인근 스님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이름이었다. ‘부모은중경’을 번역해 보급했고 당시 고운사 말사였던 안동포교당 불사에도 적극 동참하셨다. 전주 연화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받으셨던 부친은 말년에는 거의 절에서 생활하다시피 했다. 덕분에 어린 시절 불교관련 책들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자문’ ‘동몽선습’ ‘명심보감’ ‘소학’ 등을 먼저 배웠다. ‘초발심자경문’은 지금껏 보았던 유학의 책들과는 결이 달랐다. 그토록 강조하던 ‘충’도 ‘효’도 언급이 없었다. 대신 ‘출가’라는 전혀 새로운 삶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 ‘초발심자경문’이 불교와의 첫 인연인가.
“모친 등에 업혀 사찰 문 넘나들었던 것을 제외한다면 처음이라 해야 할 것이다. 모친은 한국전쟁 중에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전쟁을 겪고 난 직후 더구나 한창 감수성 풍부한 사춘기였다. ‘초발심자경문’에 단박에 사로잡혔다. 그 후로는 불교 서적만 탐독했다.”
‘부모은중경’ ‘팔상록’ ‘심전개발’ 등등 책은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책만으로는 부족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출가를 결심했다. 하지만 어린 학생을 사찰에서 덥석 받아줄리 만무했다. “출가하고 싶다면 부모님의 허락장을 받아오라”는 말에 한 걸음 집으로 돌아와 부친의 허락을 구했다. 불심 깊었던 부친은 두말없이 ‘허락장’을 써주었다. 그렇게 시작한 행자생활, 공양주 소임 6개월 만에 월하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수계 다음 날로 월하 스님을 따라 나서 통도사 강원에 입학했다. 한문에 해박했고 불교소양도 깊었던 영특한 행자를 하루라도 빨리 강원에 보내려는 스님들의 배려였다.

▶ 당시 통도사 분위기는 어땠는가.
“월하 스님을 비롯해 운허, 월운, 영암, 자운, 지관 스님 같은 분들이 모두 통도사에 계셨다. 당시 강사였던 월운 스님이 내 첫 스승이었다. 대교반에서는 비구니 묘엄 스님과 명성 스님이 통도사 인근 보타암에 머물며 운허 스님 강의를 듣기 위해 통도사강원으로 통학을 하고 있었다.”

▶ 통도사강원에 입학했지만 표충사, 동화사를 거쳐 결국 해인사강원을 졸업한 이유는?
“당시는 조계종정화로 불교계가 어수선할 때였다. 통도사에 계시던 스님들이 표충사나 동화사, 해인사로 소임을 맡아 옮겨갈 때마다 강원 학인들도 스승을 따라 강원을 옮겨 다녔다.”
그렇게 여러 강원을 옮겨 다니는 과정에 운허, 관응, 월운, 지관 스님 등이 두루 스승이 되어주었다. 그 시기가 평생 학문의 토대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특히 해인사에서는 법정 스님과 한방을 쓰는 인연을 맺기도 했다. 일본어에 능숙했던 법정 스님은 당시 국내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일본어 불서들을 소개해 주기도 했다. 그렇게 3년에 걸쳐 강원 이력을 마친 후 곧바로 대학 문을 두드렸다.

▶ 환속했다는 뜻인가.
“아니다. 대학을 다녔지만 여전히 해인사에 승적을 두고 있었다. 당시 인환 스님과 무진장 스님 등이 함께 동국대서 공부했다. 인환 스님과 무진장 스님은 삭발염의 했지만 나는 대학문에 들어선 후로는 승복을 벗어두었다. 다만 졸업 무렵 해인사에 계시던 지관 스님과 법정 스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두 스님의 답장이 판이했다. 지관 스님은 ‘할 일이 많으니 어서 내려오라’ 했지만 법정 스님은 ‘그곳에서 할 일이 있다면 더 하고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결국 법정 스님의 편지가 해인사로 가려던 발길을 돌려세웠다. 그때 만약 해인사로 갔다면, 장담할 수는 없지만 출가자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지만 인생에서 한번 즈음 만약을 떠올려도 좋은 순간이 있다면 바로 이런 때일 것이다. 그때 해인사로 향했다면, 지금 쯤 대강백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선택이 아쉽지 않다. 어쩌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대학원에 진학, 석사논문이 완성될 무렵이던 1968년 최초로 교법사 공채시험이 열렸다. 선발된 1기 교법사 가운데 그가 있었다. 1등이었다. 교법사 자격증 번호도 1번이다. 교법사로 동국대부속고등학교에 배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해 군법사 제도가 생겼다. 아직 군복무를 마치지 않은 그는 군법사에 자원했다. 비록 승복은 벗은 상태였지만 승적이 있었고 독신이었으며 대학까지 졸업한 ‘완벽한 조건’이었다. 단숨에 1기 군법사로 임관했다.

▶ 1기 군법사로서 무슨 역할을 해야 할지 막막했을 것 같다.
“베트남전쟁이 한창이었다. 임관하고 주월(베트남)한국사령부로 배치 받았다. 가보니 직속상관인 군종감이 목사였는데 계급이 대령이었다. 갓 임관한 중위였으니 군종감은 하늘같은 상관이었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좋은 말이 있는데 불교에는 뭐가 있는가’라고 내게 물었다. ‘그렇습니까? 불교에는 원수가 없습니다’고 대답을 하니 그가 말문을 닫았다. 군대 내 불교에 대한 인식은 무지 그 자체였고, 스님을 무당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불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것이 가장 시급했다.”
지난해 11월30일 군승파송 50주년을 맞이해 열린 군승의 날 기념식에서 51기 군법사들로부터 감사패를 받았다. 그의 첫 발자국이 어느새 50년의 세월을 건너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배들을 향한 자랑스러움과 고마운 마음 가득하지만 1기 군법사의 따끔한 충고가 뒤따른다.
“군승이라는 표현은 옳지 않다. ‘승’은 ‘상가’의 음역으로 승가를 뜻한다. 개인에게 쓸 수 없다. 법사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지금이라도 바로잡길 바란다.”
영락없는 학자의 안목이다. 그렇다. 제대 후 곧바로 동국대와 인연을 맺었다. 정해진 길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불교 새 역사의 장이 열리고 있을 때였다.
4년간의 군복무를 마칠 즈음 동국역경원장 운허 스님의 부름을 받았다. 한글대장경 편찬 작업에 합류한 것이다. 보조 지눌 연구의 대가 이종익 박사가 ‘화엄경’을 번역하고 있었다. 이종익 박사의 번역 초고를 완성된 문장으로 정리하는 것이 그의 소임이었다.

 

 

 

 

“방편에 머물면 불교의 본질 놓쳐…시대 위기 감지하는 종교 돼야”

 

직역에 충실했던 한글대장경
읽는 경전으로 다시 다듬어야

불교는 중층으로 이뤄진 종교
불법 전하기 위해 방편 쓴 후엔
반드시 본질의 단계로 이끌어야

기도비 내며 대가 바라는 것은
시장에서 주고받는 거래와 같아

사회에서도 이해될 수 있는
어른다운 불교의 가르침 절실

“경전 속 불보살님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한 등장인물이다. 불보살의 말씀과 행을 배우고 따라해야지 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맡기면 안된다.” 노학자의 지적은 날카롭고 단호하다.

▶ 한글대장경 편찬에 합류한 감회가 컸을 것 같다.
“감회보다는 운허 스님의 평생원력을 돕는다는 생각이었다. 역경원을 동국대에 설치한 것도 역경불사가 중단 없이 지속돼야 한다는 스님의 의지였다. 최현배, 이숭녕씨 등 당시 손꼽히는 한글학자들이 모여 회의를 했다. 불교용어를 우리말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에 대한 합의된 결론이 없었다. 그래서 용어집을 먼저 만들었다. 한자 원문에 충실하게 직역을 하는 것이 운허 스님의 원칙이었다. 첫 역경이었던 만큼 우선은 원문에 가까운 책을 만들어 놓자는 것이었다.”

▶ 추가 작업이 필요하다는 뜻인가.
“당시 역경은 읽기에 편한 문장은 아니었다. 원전에 충실한 번역을 바탕으로 읽히는 경전을 만드는 작업이 지속돼야 한다. 또한 당시의 번역에 오역이 없었는지를 지속적으로 재검토해야 한다.”

▶ 한글대장경 편찬과 더불어 불교대학에서 경전을 배우는 불자들도 많이 늘어났다. 덕분에 불자들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보는가.
“사찰마다 불교교양대학이 늘어나면서 지적 수준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교는 중층적 구조를 갖고 있는 종교다. 교육의 지향점이 명확하지 않으면 방편과 본질이 혼재될 수 있다.”


▶ 중층적 구조란 무엇을 뜻하는가.
“불교는 여러 층으로 이뤄진 집이다. 각 층을 차례차례 거치고 충분히 이해해야만 다음 층으로 올라갈 수 있다. 불교에서는 3가지 외도를 말한다. 첫째는 불교가 아닌, 불교와는 전혀 다른 외도로 경전에서는 98가지가 제시돼 있다. 또 하나는 불교에 속해 있지만 외도인 ‘부불법외도(付佛法外道)’다. 불교는 무아와 공을 설하는데 그 실체가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불교 안에 들어와 있는 외도다. 세 번째는 ‘학불법성외도(學佛法性外道)’다. 불법을 배우고 있지만 외도의 길로 가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여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발생하는 이유가 바로 불교의 중층적 체계 때문이다. 그 중층의 기본은 연기와 인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부처님의 깨달음은 연기였다. 그런데 불교를 믿으면서 인과를 안 믿는다면 이는 불교는 배우지만 외도로 가는 길이다. 부처님을 신이라고 여기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을 관장하며 우리에게 복도 주고 화도 준다고 생각한다면 기독교와 다를 바가 없다.”

▶ 하지만 기복은 모든 신앙의 출발점이라는 의견도 있다.
“물론이다. 그래서 불교에도 방편이 있다. ‘부처님께서 가피를 주신다’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주신다’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혀 모르는 이들에게 불교를 전할 수는 있다. 이 같은 방편은 건물의 지하 1층인 셈이다. 하지만 그렇게 불교를 접한 이들을 마냥 지하 1층에 두어서는 안 된다. 방편에 묶여 있다면 죽을 때까지 불교를 접하지 못하게 된다. 방편이 궁극적으로 진실, 본질을 향하지 않고 방편 자체에 머문다면 그 방편은 거짓이다. 방편을 창안하신 분들, 불교선지자들은 대단한 능력과 안목을 가진 분들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그 방편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오히려 방편을 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 여러 불보살을 중심으로 신행이 이뤄지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단언컨대 불교는 석가모니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많은 경전에 지장, 관세음, 약사, 미륵 등 불보살이 등장한다. 이들은 분명 실존인물이 아니다. 경전을 편찬한 이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경전에 등장시킨 인물이다. 그러니 경전에 등장한 이들의 역할, 즉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전하려는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작가는 드라마를 쓰면서 주인공을 만들고 배우를 등장시킨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연기자를 실존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경전 속 불보살의 등장은 경전을 편찬한 이들은 어마어마한 아이디어였다. ‘화엄경’에 등장하는 무수한 불보살들이 전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에 주목해야 한다. 관음보살, 지장보살은 믿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전하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그들의 행동을 통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배워야 한다.”

▶ 대승불교와 배치되지는 않는가.
“대승불교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임이 분명하다면 더욱 명확해진다. 경전의 불보살들은 부처님 가르침 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다. 관세음보살의 가르침을 배우고 관세음보살의 행을 따라야지 관세음보살이 내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는 대행자는 아니다. 이것을 간과하면 경전의 근본에 접근하지 못하게 된다. 불교가 체계적인 종교, 중층적 종교라는 것은 이런 의미다.”

▶ 신심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신심은 의심의 반대말이다.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신심을 ‘결정심’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더 의문할 것 없이 확정, 결정한다는 것이다. 결정하기 이전에는 방황할 수 있다. 하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고 ‘이것이 옳다’고 결정하는 마음이 신심이다. 그런데 여전히 신심과 욕심을 구별하지 못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절에서 입시기도를 하는 신도의 마음은 신심인가, 욕심인가. 사업성취를 바라는 마음은 신심인가, 욕심인가. 이것을 구분해야 한다.”

▶ 사찰운영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신심을 갖게 되었다면 그 신념체계 안에서 의무가 생긴다. 그것이 불사금이다. 그것이 만원이든 10만원이든 내가 불자로서 의무를 다하는 것이다. 사찰은 이런 불사금에 의해 운영돼야 한다. 만원 내고 십만원어치 복 달라는 것, 십만원 내고 자식 대학 가게 해 달라는 것, 천만원 내고 사업 잘되게 해달라는 것, 그것은 불교도 아니고 보시도 아니다. 불사금은 복의 대가가 아니라 불자의 의무다. 가계부를 쓰면서 난방비 얼마, 식비 얼마를 정하듯 불자라면 불사금 얼마를 정해야 한다.”

▶ 무주상보시가 필요하다는 뜻인가.
“‘열반경’에서는 보시를 하면서 대가가 전제되거나 대가를 기대한다면 보시가 아니라 ‘시역법’이라고 했다. 시장에서 거래를 하는 것이지 보시가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다르다. 보시는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지만 보시바라밀은 보시의 완성이다. 육바라밀은 그 자체가 완성된 세계다. 완성으로 가는 수단이 아니다. 보시, 지계 등등이 항상 하는 것, 어떤 조건도 없이 이뤄지고 있는 그 상태가 육바라밀이고 깨달음의 세계다. 육바라밀이 수단이라면 육바라밀을 실천해 보살이나 부처가 된 후에는 보시, 지계, 인욕 등을 실천하지 않아도 되겠는가? 간단한 이치다.”

▶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불자인가.
“1년에 네 번, 정월 초파일 백중 동지 때만 절에 가면 불자라고 한다. 사실 그 정도면 1등 불자에 든다. 초파일, 백중에만 절에 가도 2등 불자는 된다. 3등은 초파일에만 절에 가는 정도다. 심지어는 수학여행 때 절에 가본 사람, 어머니나 할머니가 절에 다니기만 했어도 불자라고 한다. 그러니 불교교양대학에 다닌 정도면 특등 불교신자라고 긍지를 가질만하다. 하지만 사찰에서는 중층적 불교의 체계 안에서 불자들이 궁극적인 단계에 도달할 수 있도록 교육체계를 잘 짜야 한다. 교수 섭외도 신중하게 해야 한다. 신라, 고려 시대의 스님들은 수행자이자 뛰어난 불교학자였다. 학문을 떠난 불교는 위험하다. 또한 불자들은 내가 올바른 불교를 하고 있는지, 스님이나 사찰에서 행해지고 있는 일들이 법다운 것인지 관심을 갖고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 불자·출가자 감소가 큰 고민이다.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으면 어느 나라, 어느 종교에서나 감소현상이 나타난다. 숫자가 많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종교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성찰이 더욱 중요하다. 인류의 위기가 어디서부터 올 것인가를 먼저 감지하고 그것을 대중에게 알려줘야 할 책임이 종교인들에게 있다.”

▶ 불교계에 당부하고 싶은 말은.
“불교계의 큰스님들이나 지도자들이 일반인들의 가슴에 와 닿는, 이해될 수 있는 말씀을 해주셨으면 좋겠다. 그 말씀 속에는 우리사회 나아갈 바를 제시하는 권위가 있어야 한다. 또한 정치의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시정할 수 있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 내 이익, 불교만의 이익이 아닌 국민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들에게 이익되는 말을 해야 한다. 스스로 우리 사회의 어른으로서의 역할, 민중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한 해가 되길 바란다.”

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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