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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 특집] 3.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역

기자명 이경순

용성·만해 스님 항일 선도…중앙·지방학림 출신 불교청년들 계승

교단차원서의 항일운동 없지만
3·1운동 기점으로 조직적 성격
김법린·백성욱·박민오·신상완 등
중앙·지방학림 중심으로 활동
불교계 항일운동사 재조명 필요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일제의 폭압에 항거하기 위해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저항, 근대 민족의식 성장의 기폭제, 대한민국의 법통을 세운 출발점 등 3‧1운동이 한국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킨 사건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한국불교계에 있어서 3‧1운동은 무엇인가, 더 나아가 근현대불교사에서 항일독립운동은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것의 의미는 어떠한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불교계 항일운동의 자취를 남기고 기억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몇몇 인물들이다.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이라 했을 때 전제되어야 할 것은 일제강점기 동안 한 번도 교단차원 독립운동이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3‧1운동 당시 전국 각지의 사찰 대중들이 참여한 가운데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하지만 교단적, 본사단위에서 조직적 차원의 운동은 아니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불교계 항일운동의 연구나 관심은, 자연스럽게 홀로 청정하게 피어난 독립지사, 특출한 개인에 집중되어 왔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은 두말 할 것도 없이 만해 한용운이다. 한용운은 3‧1독립선언에 참여한 민족대표 33인의 한명으로서, 불교계 항일운동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용운은 불교계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는 상징성 외에도, 3‧1운동의 실질적 주역이었던 불교청년의 성장과 각성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고 이후 불교청년들이 국내외 항일운동을 펼칠 수 있게 한 플랫폼이었다. 1910년대 벽두부터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한 한용운은 근대 불교의 선각자로서 불교교육, 불교출판, 역경, 불교청년운동 등 전방위적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또한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민족대표 33인에 이름을 올린 백용성을 떠올릴 수 있다. 김광식은 백용성의 민족운동을 직접적 독립운동과 광의의 민족운동으로 이원화하여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즉 3‧1운동에 민족대표로 참여한 것은 직접적 독립운동이고, 임제종운동, 건백서제출, 선농불교, 역경 등의 활동은 광의의 민족운동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불교계의 민족의식은 직접적 시위와 임시정부, 독립군 활동의 차원을 넘어 민족불교의 지향을 나타내는 다양한 활동을 포함할 필요가 있다.

백초월 역시 불교계의 항일독립운동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다. 백초월은 3‧1운동 직후 한국민단본부를 만들어 활동하면서 상해임시정부활동을 지원하고 ‘혁신공보’를 간행한 바 있다. 운허 용하도 출가 전부터 항일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1910년대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해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출가 후에도 승려로서 항일운동을 지속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3‧1운동 전후에 혁혁한 활동을 보인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러나 불교계 항일운동은 경술국치 이전부터도 있었다. 바로 의병운동이 그것이다. 승려출신 의병장 박순근은 정미의병 때 양주에서 봉기하여 1909년까지 큰 활약을 벌였고 후일 경봉 스님이 된 김재홍은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무주 적상산에서 일본군과 교전한 바 있었다. 후일 3‧1운동에 앞장서고 1930년대 만당 활동을 한 박영희도 1908~1909년에 소년의병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밖에도 의병의 거병과 주둔을 도운 전국 각지의 승려들이 구체적 생애나 행적이 알려지지 않고 이름만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3‧1운동 1년 전에 일어난 1918년 법정사 항일운동에는 불교계 인사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지역주민 700여명이 참여한 제주도 내 최초이며 최대 규모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이와 관련하여 현재까지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인물이 김연일 등을 포함하여 28명에 이른다. 불교계의 참여자 수에서 압도적인 법정사 항일운동은 그 배경과 참여 동기에 대해 더욱 심도 있는 연구가 필요하다.

이제까지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에서 이렇게 돌출된 선각자와 같은 인물이 부각되어 왔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3‧1운동을 기점으로 불교계 독립운동은 조직적, 집단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주장이다. 그 주체는 바로 ‘불교청년’이다. 3·1운동을 실행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사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수많은 불교청년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불교청년의 활약상과 조직력은 3·1운동 바로 다음해인 1920년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진 지역 불교청년회 설립 붐에서도 드러난다. 3·1운동 직후 폭발력을 보이며 세상에 드러나기까지 불교청년들은 1910년대 성장해왔다. 불교청년의 등장과 그를 둘러싼 담론은 돌출된 개인이 아닌 다수의 사람들을 역사의 주역으로 호명할 수 있다. 또한 불교청년운동이 3‧1운동의 결과로써 발생한 것이 아니라, 3‧1운동을 가능하게 한 배경이자 불교계 내부의 동력으로서 존재하였음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배경에는 불교계의 근대적 교육개혁이 있었다. 1906년 명진학교의 개교와 각 지방 사찰이 주도한 보통학교 설립 이후 불교계의 승려 교육개혁은 1910년대 중반 체계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1910년대 중후반이 되면 지방학림이나 중앙학림에 진학하여 불교계 청년그룹이 형성되고 있었다. 이들은 동질적 세대의식을 지닌 불교청년으로 1910년대를 거치면서 불교계를 선도할 세력으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할 수 있었다고 보인다.

이러한 불교청년의 대표적 인물이 김법린, 신상완, 백성욱, 김상헌, 정병헌, 김대용, 오택언, 김봉신, 박민오 등이다. 동시에 이들은 1918년 한용운이 주도한 ‘유심’ 사옥을 드나들며 한용운의 직접적 가르침을 받았다.

이들은 경성에서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각기 본사와 연결되어 3‧1운동이 지방 사찰로 확산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의 활약으로 해인사, 통도사, 범어사, 동화사 등에 만세시위가 조직되어 펼쳐졌다. 당시 해인사 지방학림에 재학 중이던 최범술은 서울에 유학중이던 최원형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 해인사 인근 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만세시위는 이들 사찰 외에도 신륵사, 봉선사, 표충사 등으로도 확산되었다.

김법린은 범어사 출신으로 범어사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에서 신상완 등과 함께 활약하다가 프랑스로 유학 후 피압박민족대회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0년 만당을 조직하였고 1942년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렀다. 신상완은 수원 용주사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신상완은 당시 중앙학림 학생으로, 계동 유심사에 모여 한용운의 가르침을 받던 이들 중 가장 연장자였다. 3‧1운동 이후에는 상해와 국내를 오가며 불교계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는데 임시정부를 지원하는 데 큰 활약을 보였다. 이후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의 작성 및 배포에 깊이 관여하고, 승군의 전통을 살려 ‘임시의용승군헌제’를 구상하기도 했다. 또한 김상헌은 경남 양산 출신으로 범어사 승려였다. 1919년 경성에서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김법린과 함께 범어사를 중심으로 동래지역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3‧1운동 직후에는 상해로 넘어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가 독립운동 자금 모집을 위해 활약했다. 이밖에 건봉사 출신으로 독립운동단체인 대동단에 가입, 활동한 정남용,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의정원 강원도 대표를 역임하고 대한민국외교청년단을 조직한 송세호 등 독립운동 단체에 불교를 대표하여 활약한 인물들을 들 수 있다. 또한 봉선사 출신으로 불교유학생으로 북경으로 건너갔다가 조선의열단에 몸담고, 이후 중국내에서 조선민족을 위한 항일운동에 적극 활약하다가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으로 해방을 맞은 김성숙이 있다. 한편, 박달준은 해인사출신으로 1919년 해인사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수료한 후 독립자금을 모집하다가 옥고를 치렀다.

이와 같이 몇몇 대표적 불교계 항일운동의 주역들을 살펴보았다. 부족한 지면과 필자의 무지에 때문에, 더욱 분명한 것은 아직 발굴되지 못하여 이 글에서 미처 담지 못한 불교계 항일 운동가들이 존재할 것이다. 또한 이후의 친일행적의 그림자 때문에 차마 항일운동의 주역으로 드러내지 못한 인물들도 있다.

불교계 항일운동은 비록 교단 차원에서 조직되거나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몇몇 선각자나 지사들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3‧1운동 당시 근대교단의 성립과 더불어 체계적 교육으로 성장하고 있던 중앙학림과 지방학림의 불교청년들이 있었고, 전국 각 지방사찰에서 들고 일어난 수많은 불교인들이 있었다. 당시 불교계는 종교와 지역과 계층을 초월한 민족의식의 폭발에 공명했다. 이후 많은 불교인이 국내외에서 활발한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또한 3‧1운동이 기폭제가 된 불교청년운동은 1930년대 만당의 조직까지 뻗어나갔다.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일제강점기 불교계 항일운동은 불교계의 근대 교육의 확장과 불교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자각, 새로운 민족의식과 맞닥뜨려 얻어낸 열매였다. 불교계 항일독립운동은 역사에서 특출한 개개인에 대한 관심과 현양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불교계 사회의식의 전개, 세대 성장, 불교계에 존재했단 다양한 집단에 대한 이해를 통해 보다 선명히 그 면모가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1471호 / 2019년 1월 2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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