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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주문을 들고 나며 ② - 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어느땐 감옥문 같더니 어느땐 일주문 되고 싶었네”

1993년 12월말 말없이 마주했던
수덕사 일주문은 ‘나'를 기억할까
일주문 세상과 청산 가르는 경계
​​​​​​​
들어올땐 “내려 놓으라” 경책하고
나갈땐 “그르쳐 가지말라” 말하네
일주문에서 오가는 사람 보고싶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1993년 12월 말경, 첫새벽을 뚫고 충남 예산에 있는 수덕사 일주문을 통해 출가를 하는 이가 있었다. 생애 가장 ‘위대한 포기’이자 ‘탁월한 선택’이란 걸 그땐 알지 못했다. 그러나 무언가 새로운 길과 희망, 그리고 깨달음의 섬광을 훔쳐 본 듯했다. 말없이 선 그때의 그 일주문은 나를 기억이나 할까 모르겠다.

일주문은 세상과 청산, 승과 속을 가르는 경계이자 상징이라고 할 것이다. 어느 곳이 옳은가 묻지는 마라, 봄 광명 이르는 곳마다 꽃피지 아니한 곳이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출가 전 대학시절 영축산 통도사에 들렀다가 강원 사집반에 다니는 한 스님을 만났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 스님에게 매료되어 자주 찾아 가곤 했다. 어느 여름날인가 문득 그 스님이 무작정 보고 싶어 늦은 시간에 통도사로 향했다. 그런데 산문을 지나 솔숲 길을 따라 걸어서 일주문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9시가 넘어버렸다. 어쩔 수 없이 입구 다리 밑에서 밤을 새우고는 아침 도량석 소리에 깨어났다. 마치 한 생을 다 살아버린 느낌이었다.

아침예불을 드린 후 방으로 찾아 가서는 아무 말 없이 차담을 나누었다. 무언가 힘들다며 하소연도 하고, 길을 가르쳐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침묵했다. 차담 후 다시금 스님과 솔밭길을 따라 함께 산책하다가 산문 입구에서 아무 말 없이 헤어졌다. 모든 걸 다 안다는 스님의 미소 한 자락과 얼굴빛으로도 너무나 충분한 아름다운 시절의 추억이다.

출가 후 3년간 노스님 시봉하다가 은해사 기기암 선방으로 첫 철 동안거를 들어갔다. 은해사 일주문 지나 한참을 걸어 올라야 비로소 기기암 선원이다. 첫 철이라 심란한데 설상가상으로 온몸은 마디마디 아파만 오고 하루에도 열 두번씩 걸망을 맨 채 일주문을 지나 떠나가는 꿈을 꾸곤했다.

그때 선배 스님이 전해준 어느 선승의 이야기는 얼마나 매혹적이고 황홀했던가!

어느 철인가 정월 초하루날 아침, 눈 내린 새벽에 눈을 뜨고는 문을 여니 밤새 눈이 내려 온통 세상이 설국이었단다. 그런데 산문을 향해 난 발자국이 눈 위에 선명하기만 하더란다. 누군가 눈 덮힌 새벽을 가로질러 떠나간 것이다. 후에 그 스님에게 들으니 “첫 날에 눈 덮힌 산하에 첫 발자국을 남기운 채 그렇게 무작정 떠나가고 싶었다”라고 말하더란다. 참으로 수좌답기만 하다.

정말이지 그날처럼 눈이 왔다면 나도 그 스님처럼 걸망을 둘러맨 채, 마냥 어디론가 떠나가고 싶었다.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의 시처럼 “어딘들 상관없어! 다만 그곳이 이 세상 밖이기만 하다면!”이라고 말이다. 어쩌면 그때 일주문은 내겐 창살 없는 감옥이자, 지옥에서 보낸 한철과 같았는지도 모른다. 아니 넘사벽이자 철옹성과도 같았다. 어쩌면 그 벽을 향해 소리 없이 타고 오르는 담쟁이와 같은 인고의 과정이었을 게다.

덕숭산의 3대 보물 중 하나로 일컬어지는 보리(菩提) 스님이 계셨다. 초등학교도 안 다니고 벽초 스님 밑에서 크며 30년 넘게 일주문을 나가지 않은 천진불과 같은 분이다. 늘상 옷 한 벌에 한겨울에도 맨발로 다니는 스님은 방부도 누가 써준 것을 똑같이 그리고는 웃는 얼굴의 사인을 한다.

그래도 스님의 아침 도량석은 우렁차고 힘이 있으며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정진시간 외에는 항상 텃밭에 가서 곡식을 가꾸곤 했다. 그야말로 선농일치의 벽초 노스님 후신이 아닐 수 없다. 그 스님의 언행과 수행을 보면 나는 한없이 작고 부끄러우며 욕되기만 하다. 그와 함께한 안거정진은 내 생에 얼마나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의 꽃인지 모른다. 그런 까닭에 한때 나도 스님처럼 산문밖 출입을 하지 않으며 수행하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그러나 근기와 복력이 안되는지라 선방에서도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를 읽는 나로서는 난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선방을 다니며 시작한 해외 성지순례 겸 배낭여행은 더 넓고 크나 큰 세상을 향한 도전이며 나만의 만행이자 수행이 아닐 수 없었다. 언젠가 중국선종사찰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산문 입구의 작은 시냇가 위에 일주문과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데 들어가는 문과 나가는 문의 편액이 다른 것이 특이했다. 들어갈 때는 내려놓으라는 ‘방하착(放下著)’이 걸려 있고, 나갈 때에는 그르쳐 가지 말라는 ‘막착거(莫錯去)’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마땅히 그렇게 할 일이다.

중국 선종 초기의 두타행자 중의 어느 이름 없는 이의 일화가 생각난다. 언젠가 한 두타행의 스님이 밤늦은 시간에 어느 절 산문에 이르렀다. 그러나 밤이 늦어 대중을 깨우질 못한 채 일주문 아래에서 노숙을 하였단다. 새벽 쇠북소리에 일어나니 밤새 눈이 내려 온몸이 온통 눈으로 쌓였다는 이야기다. 눈물 나게 아름다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나는 언제나 그 스님처럼 될까?
어찌하다 보니 수도하는 수도승이 아니라 서울에 사는 수도승 신세가 되어 10여년을 살아가고 있다. 마음은 항상 수덕사 일주문을 지나 정혜사 선원으로 향하건만, 현실은 한남대교를 지나면 마치 집에 돌아가는 듯하니 영락없는 공밥 신세다. 옛말에 “진리(도)는 사람을 떠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가 스스로 산을 떠나가네”라고 하더니 내가 바로 그 꼴이 아닌가 싶다. 매양 떠나야지 하면서도 끝내 못 떠나는 것은 나의 허물이자 욕심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내가 덕숭산의 일주문이 되든지 호랑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몇날 며칠, 혹은 한 평생 말없이 그 자리에 선 일주문처럼 되어보리라. 그리하여 이 문을 오고 가는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리라. 그러다가 언젠가는 수행자를 경책하는 호랑이의 포효를 들려주리라. 그리하여 내가 일주문이 되고, 일주문이 내가 되어 그렇게 한평생 혹은 천고의 세월을 함께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472호 / 2019년 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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