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6. ‘법성게’제14구 : “잉불잡란격별성 (仍不雜亂隔別成)”

기자명 해주 스님

삼세와 십세가 비록 동시이나 삼세와 십세를 잃지 않는다

삼세와 십세가 상입하지만
각각의 지위를 잃지 않으니
쥐면 하나의 주먹이 되지만
다섯 손가락 있는 것과 같아

법성은 본래 생함이 없으나
나타내 보여서 생함이 있어

연기된 모든 것들은 공해서
차별 존재 분별로 있는 것

​​​​​​​십세가 찰나의 일념에 있고
삼세와 십세가 동시이므로
매순간 현재에 충실하면 돼

연기제법이 시간적으로 무량겁이 한순간이고 한순간이 무량겁이며, 삼세가 동일하고 구세 십세가 상즉함을 앞에서 보았다. 그러면서도 “그로 인해 뒤섞여 어지럽지 않고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고 한다. ‘법성게’ 제14구 “잉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이다.

‘뒤섞여 어지럽지 않다[不雜亂]’는 것은 시간이 체가 없고 체가 없어 상이 없는 까닭이다. 이를 설잠 스님은 “체(體)가 있으면 곧 섞임이 있고 상(相)이 있으면 곧 어지러움이 있다. 체가 없으면 곧 상이 없는 까닭에 무용(無用)이 용(用)이 되고, 무용이 용이 되는 까닭에 그 용이 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 용의 측면에서 삼세·구세가 상입하게 되는 것이다.

‘나뉘어져 따로 이룬다[隔別成]’는 것은 ‘구세십세호상즉’의 삼세간 법이 각각의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분명히 드러나, 십세가 완연함을 말한다.(‘법성게과주’)

이 ‘잉불잡란격별성’은 십현문중 ‘십세가 법과 떨어져 달리 이루는 문(十世隔法異成門)’의 뜻을 기준한 것으로 간주된다.(‘일승법계도원통기’) 삼세·십세가 구분됨이 격법(隔法)이고, 십세가 분명히 드러남이 이성(異成)이다.

이처럼 삼세와 십세가 비록 동시이나 삼세와 십세를 잃지 않는다. 격법이성은 십세가 그 각각의 자리에 있으니 그래서 서로 상입하는 측면에서 십세를 말한 것이라고도 하겠다.

다섯 지위로 삼세와 십세를 말할 경우에도 그 다섯 지위가 하나이지만 또한 각각의 지위를 잃지 않으니, 비유하면 마치 다섯 손가락을 구부려 쥐면 하나의 주먹이 되나 그렇다고 다섯 손가락이 없어진 것은 아닌 것과 같다고 한다.(‘일승십현문’)

‘화엄경’에서는 과거가 미래이고 미래가 과거이며, 현재가 과거이고 미래임을 설하면서, 다음과 같이 또 과거·현재·미래가 서로 들어감(相入)도 설하고 있다.

과거미래겁입현재겁(過去未來劫入現在劫) 현재겁입과거미래겁(現在劫入過去未來劫) 과거겁입미래겁(過去劫入未來劫) 미래겁입과거겁(未來劫入過去劫) 장겁입단겁(長劫入短劫) 단겁입장겁(短劫入長劫) (‘十地品’)
(과거와 미래겁이 현재겁에 들어가고 현재겁이 과거와 미래겁에 들어가며, 과거겁이 미래겁에 들어가고 미래겁이 과거겁에 들어가며, 긴 겁이 짧은 겁에 들어가고 짧은 겁이 긴 겁에 들어간다.)
일체중생심(一切眾生心) 보재삼세중(普在三世中) 여래어일념(如來於一念) 일체실명달(一切悉明達). 일체 중생의 마음이 널리 삼세 가운데 있으니, 여래가 일념에 일체를 다 밝게 요달하시도다. (‘보살명란품’)
불일모공중(佛一毛孔中) 무량중생주(無量眾生住) 각자수고락(各自受苦樂) 이부지거래(而不知去來). 부처님의 한 털구멍 가운데 한량없는 중생이 머물러서, 각각 스스로 고락을 받으나, 가고 옴을 알지 못한다. (‘노사나품’)

위와 같이 삼세겁이 서로 들어가고, 일체 중생심이 삼세 가운데 있으며 무량중생이 고락을 받기도 한다. 삼세의 삼세간이 원융하여 하나이지만 낱낱 삼세간 법이 각각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삼세간중 지정각세간은 교화하는 주체이고, 중생세간은 교화 받는 대상이다. 기세간은 의보로서 국토 등 소의처(所依處)이다.

‘세계성취품’에서는 일체 세계가 이루어지는 열 가지 인연을 설하고 있는데, 그중에 여래의 위신력과 보살의 원력, 그리고 중생의 업력 등이 주목된다. 여래와 보살 등 지정각세간과 중생인 중생세간이 있고, 불보살의 위신력과 원력 그리고 중생의 업력 등으로 인하여 기세간이 펼쳐지는 것이다.

균여 스님은 ‘지귀장원통초’에서 일승에서는 법이 원만함을 세우는 까닭에, 시간이 법과 나뉘어 있으나 법이 흘러가지 않으므로 시간도 흘러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해를 돕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이야기를 전한다.

그 하나는 부처님께서 범마달왕에게 왕 앞에 누워있는 개는 왕의 과거 몸이고, 부처님은 왕의 미래라 하셨다는 ‘영락경’ 말씀이다. 또 하나는 지통 스님이 태백산 미리암 굴에서 나무로 빚어진 존상을 모시고 화엄관을 닦고 있었는데, 존상이 “방금 동굴을 지나간 멧돼지는 그대의 과거 몸이고 나는 곧 그대의 당래 과보의 부처이다”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삼세가 하나임을 깨달아 의상 스님에게서 ‘법계도인’을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균여 스님은 과거의 개에 사람과 부처를 갖추고, 현재의 사람에 개와 부처를 갖추고, 미래의 부처에 개와 사람을 갖춘다고 한다.

‘지통기’의 이본으로 간주되는 ‘화엄경문답’에서는 이를 구세·십세와 연관시켜 설명하였다. 과거의 삼세 중 과거의 과거란 곧 스스로의 당체가 축생이고, 과거의 현재는 곧 그 축생이 현재의 사람이며, 과거의 미래는 곧 그 축생이 미래의 부처임을 말한다. 현재의 삼세 중 현재의 과거란 곧 현재의 사람이 과거의 축생이고, 현재의 현재는 곧 이 사람이 스스로의 당체가 사람이며, 현재의 미래는 곧 현재의 사람이 미래의 부처임을 말한다. 미래의 삼세중 미래의 과거는 곧 그 부처가 과거의 축생이고, 미래의 현재는 곧 그 부처가 현재의 사람이고, 미래의 미래는 곧 미래의 부처가 스스로의 당체가 부처임을 말한다. 이 구세법이 곧 일념이기 때문에 제십세가 되고 총별을 합하여 십세가 된다. 이것은 즉문에 의한 설명인데 중문(中門)도 준해서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한다.

‘총수록’ 남악관공기에서는 십세격법을 법계의 유전하는 도리라고 한다. 이 유전하는 연기도리가 매우 깊음을 ‘보살문명품’에서 문수보살과 각수보살의 문답으로 잘 보여준다. 문수보살이 각수보살에게 ‘심성은 하나인데 어찌하여 갖가지 차별이 있는지(心性是一 云何見有種種差別)’를 질문하다. 말하자면 선취에도 가고 악취에도 가며, 제근이 원만하기도 하고 모자라기도 하는 등이다. 이어서 또한 업과 마음 내지 지혜와 경계 등이 서로 알지 못하는 점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해 각수보살이 연기도리로 대답하니, 심성은 하나이나 인연 따라 차별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법이 작용도 없고 체성도 없어서 서로 알지 못한다고 한다.

이에 “법성은 본래 생함이 없으나 나타내보여서 생함이 있으니, 이 가운데는 나타내는 이도 없고 또한 나타나는 사물도 없다.(法性本無生 示現而有生 是中無能現 亦無所現物)”고 한다. 심성은 불보리지혜의 법성으로서 본래 무생이다. 그런데 중생들이 다르고, 중생이 사는 곳도 다르고, 6근이 다르고, 즐거움과 괴로움도 다 다르다. 그 차별적인 것은 인연 따라 생긴 것이다.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 따라 없어진다. 그래서 인연 따라 생긴 차별상은 환과 같은 가유이고, 연기된 모든 것은 공해서 자성이 없는 무성이다. 그러므로 차별적 존재는 단지 망심 분별로 있는 것일 뿐, 망심분별을 버리면 무분별 지혜가 드러나고 평등한 불세계에서 안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의상 스님과 그 법손들은 이 심성 즉 법성심이 ‘습기를 지나는 바다[濕過海]’의 마음이라고 한다. 바다에 의해 일어난 파도파도가 다 삼세간이니, 융삼세간의 삼세간인 것이다. 삼승에서는 바다가 습기를 자성으로 하는 물을 본체로 하므로 바다가 습기에 머무르지만, 일승 화엄에서는 바다의 체성이 무성(無性)이므로 바다가 습기를 지난다고 한다. ‘대기’에서는 원효 스님이 의상 스님을 만나서 이 습기를 지나는 바다의 갖가지 마음[濕過海種種心]의 뜻에 대한 의심을 해결하였다고 전한다.

아무튼 이러한 “잉불잡란격별성”의 경계에 대하여 설잠 스님은 다음과 같이 주석을 이어가고 있다.

“삼세를 건립함도 나에게 있고 한 순간에 거두어들임도 나에게 있으니, 삼세(三世)가 일시(一時)이고 일시가 삼세이다. 예전과 다르지 않으면서 곧 새롭고 새로움과 다르지 않으면서 바로 예전이니, 일체(一體)로 뻗쳐 있어 고금(古今)에 간격이 없다. 소림의 소식이 끊어졌는가 했더니, 복숭아꽃은 여전히 봄바람에 웃고 있다.(將謂少林消息斷 桃花依舊笑春風)” (‘법계도주’)

삼세가 한 때이나 삼세로 이어지고, 예와 지금이 간격이 없이 하나이나 고금이 여전히 이어짐을 알 수 있다.

십세가 찰나 일념에 다 들어있고 삼세와 십세가 동시이니 매순간 현재에 충실하면 된다. 그러면서도 또한 삼세와 십세가 없지 않고 각기 완연하다. 그러므로 매사 오늘의 나에게만 기준을 둘 것이 아니라 각자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해야 할 것이다. 예로 ‘눈높이 교육’이라든지 ‘역할 바꾸기 놀이’ 등도 그러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하겠다.

모든 연기된 존재는 가유이고 무성이다. 착각하면 없는 뱀 때문에 다치기도 하고, 깨달으면 무상 속에서 영원을 살기도 한다. 매일 같은 해인데 또 새해가 되었다. 새마음으로 새롭게 맞이하여 새 삶을 펼칠 불기 2563년 새해가 온 것이다. 새해를 맞아 나날이 공덕 짓는 새로운 날이 되길 바란다.

해주 스님 동국대 명예교수 jeon@dongguk.edu

 

[1472호 / 2019년 1월 9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