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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10대 총무원장 서암 스님-하

불교적 방식 개혁 추진하다 반개혁 인사로 내몰린 비운의 선승

50대 후반 봉암사 조실로 추대
원로의장 때 종단쇄신안 발표
의현 총무원장 수용거부로 무산
94년 ‘비불교적 승려대회’ 반대
수용 않자 종정 사임하고 떠나

서암 스님

서암 스님은 조계종사에서 총무원장과 종정을 모두 지낸 몇 안 되는 스님 가운데 한 명이지만 재임기간은 여느 스님에 비해 짧았다. 총무원장 2개월, 종정 4개월에 불과했다. 총무원장과 종정은 누구에게나 선망의 자리였으나 서암 스님은 ‘감투’에 연연하지 않았다. 어느 때든 먼저 그 자리를 맡겠다고 마음을 낸 적도 없었다. 종단 안정을 원하는 대중들의 요구에 따라 자리에 올랐다가 본인의 역할이 다했다고 판단되면 언제든 그 자리에서 홀연히 내려왔다. 이는 평생 수좌로서의 강직함을 잃지 않았던 스님의 삶과 맞닿아 있다.

서암 스님은 1914년 10월 경북 풍기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독립운동에 투신했던 아버지가 일경에 쫓기던 탓에 스님의 어린 시절은 넉넉하지 않았다. 안동‧단양‧예천‧문경 등지에서 고달픈 유랑생활로 추위와 배고픔을 달래야 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아들 하나만은 가르치겠다’는 어머니의 헌신으로 스님은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고, 보통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힐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사색하기를 좋아했던 스님은 어느 날, 예천 뒷산에 있던 서악사에서 화산 스님을 만나면서 불연을 맺었다. 서암 스님은 “모든 고통으로부터 초연한 것과 같은 분위기, 삶과 죽음의 비밀을 모두 알고 있는 듯해 보이는” 화산 스님에게 마음이 끌려, 그길로 출가했다. 스님의 나이 15세 되던 해였다.

3년이라는 긴 행자생활 끝에 스님은 1932년 문경 김용사에서 낙순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법명은 속명과 같은 홍근이었다. 이후 김용사 강원에서 금오 스님으로부터 비구계와 보살계를 받고, 대덕법계를 품수했다. 이때 금오 스님에게 받은 법호가 서암이었다.

스님은 배움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고된 행자생활 속에서도 ‘초발심자경문’과 ‘치문경훈’ 등을 홀로 익혔고, 김용사 강원을 마친 뒤에는 독학으로 일본 유학의 길에 올랐다. 그러나 일본 유학은 순탄치 않았다. 변변한 후원자가 없었던 탓에 늘 학업과 힘든 노동을 병행해야 했다. 하루 한 끼는 고사하고 며칠씩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폐결핵’ 진단을 받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결국 학업의 꿈을 접고 귀국했다.

사형선고와 같았던 병명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구도열정을 꺾지 않았다. 오히려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은 헛되다. 이제부터 생사의 근본도리를 놓치지 않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김용사 선원에서 수선안거를 시작했다. 이후 계룡산 나한굴을 비롯해 정혜사, 상원사, 해인사, 망월사, 복천암, 대승사 묘적암 등 이름난 수행처를 찾아다니며 안거 정진했다. 지리산 칠불암에서는 금오 스님과 ‘공부하다 죽겠다’는 결사 서약을 맺고 생식으로 연명하며 장좌불와 용맹정진을 거듭했다.

치열한 구도행은 스님이 50대 후반의 나이에 봉암사 조실로 추대되는 배경이 됐다. 그러나 스님은 이를 사양하고 스스로를 선덕으로 불렀다. 자신을 낮추고 대중과 함께 생활하며 봉암사 수좌들을 이끌었다. 선원대중들이 유독 서암 스님을 신뢰하고 따랐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1975년 12월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뒤에도 서암 스님은 원적사와 봉암사를 오가며 선원대중들을 지도하는 데 매진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총무원장을 지내며 종단스님들의 타락상을 목격했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청정승단을 회복하는 게 우선이라 여겼다. 낙후된 봉암사를 새롭게 중창했으며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지정케 했고, 수행환경을 위해 일반인들의 출입을 막았다. 오롯이 부처님 법에 따라 운영되는 수행도량으로 변화시켰다. 봉암사가 오늘날 ‘수좌들의 고향’으로 불리게 된 것도 ‘청정승단 복원’을 염원했던 서암 스님의 원력이 만든 결과였다.

서암 스님이 다시 종단의 전면에 나서게 된 것은 1991년 종정 성철 스님의 연임문제로 조계종이 극심한 혼란을 겪을 때였다. 이 무렵 조계종은 종정선출 방식을 두고 원로회의와 중앙종회 측이 대립했다.

‘조계종단 종정의 역사상(김광식)’에 따르면 조계종은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 종정선출 방식을 몇 차례 변경했다. 1962년 통합종단이 출범하면서 공포된 최초의 종헌에서는 “종정은 종정추대조례에 의해 중앙종회에서 추대”하도록 했다. 임기를 5년으로 하되 중임이 가능하도록 했다. 그러나 1980년 ‘10‧27법난’에 따라 종권을 이양받은 정화중흥종회는 1981년 1월 종헌을 개정해 원로회의에서 종정을 추대하도록 했다. 임기도 10년(중임 가능)으로 늘렸다. 종단 혼란의 난맥상이 재현되지 않기 위해서는 원로회의의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이 종헌에 따라 성철 스님은 1981년 1월 제6대 종정에 추대됐다. 그러나 1988년 3월 중앙종회는 종회의원 31명과 원로의원으로 구성된 종정추대위원회에서 종정을 추대하도록 종헌개정을 추진했다. 당시 중앙종회를 좌지우지하던 덕숭문중 스님들이 불국사 조실이자 원로회의 의장이었던 월산 스님을 차기 종정으로 추대하기 위한 포석이었다.

그러나 서암 스님을 중심으로 한 원로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종정추대는 원로회의의 고유권한”이라며 종헌개정안을 거부했다. 서암 스님은 성철 스님을 다시 종정으로 추대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암 스님은 “한국불교는 성철 스님을 만난 후부터 이전과 다르게 불교의 정신적 골수를 회생시켜 나갔다. 분명 그는 한 시대 불교의 정신사를 가꾸어 놓은 거인이었다”며 “이런 대선사를 어른으로 모셔놓고 큰 원력을 세워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것이), 두 번이나 그로 하여금 종정이라는 번거로운 일을 맡도록 권유한 내 본래의 뜻이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정토출판)

평생 수좌로서 강직함을 잃지 않았던 서암 스님은 2003년 봉암사에서 입적했다. 정토출판 제공
평생 수좌로서 강직함을 잃지 않았던 서암 스님은 2003년 봉암사에서 입적했다. 정토출판 제공

종정추대 논란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서암 스님은 1991년 6월3일 월산 스님에 이어 원로회의 의장에 추대됐다. 서암 스님은 그해 6월16일 종정추대 수습대책위원회를 열어 “종정추대는 원로회의에서 해야 함”을 재확인했다. 그러나 덕숭문중 중진스님들의 반발도 커졌다. 종정추대 문제는 조계종 양대 문중인 덕숭‧범어 문중의 자존심 대결로 확대됐다. 진경, 초우 스님 등 전 총무원장과 월탄, 혜법, 정대 등 교구본사주지, 초선의원 그룹 일주회(회장 법장 스님) 등은 6월17일 조계종 중흥회를 발족했다. 이들은 “종정추대는 종헌종법대로 해야 한다”고 결의하면서 종단의 난국을 정화이념으로 타개해야 한다는 취지를 내세우며 총무원장 퇴진 등 종단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이는 종정추대에 비교적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하던 당시 의현 총무원장이 원로회의 쪽으로 기울게 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계종은 서암 스님이 중심이 된 원로회의‧총무원 측과 중흥회 측으로 양분되며 극심한 대립이 이어졌다. 종정추대를 두고 좀처럼 합의점을 찾지 못하자 서암 스님은 그해 7월8일 해인사 전국승려대표자대회를 소집했다. 이 대회에는 3000여명의 스님들이 참여했으며 △종정은 원로회의서 추대 △부처님 교법에 따른 종단 재건 위한 개혁위원회 구성 등을 결의했다. 이어 중흥회 측 스님들이 이탈한 가운데 7월29~30일 열린 중앙종회는 원로회의에서 종정을 추대하고, 종단 수습대책위원회 구성을 결의했다. 이에 따라 원로회의는 그해 8월22일 성철 스님을 제7대 종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한 중흥회 측은 9월16일 통도사에서 승려대회를 강행했다. 10월7일 서울 논현동 우주빌딩에 총무원 간판을 내걸고 ‘반종단 독자노선’을 선언했다. 이에 따라 조계종은 ‘강남·북 총무원’으로 양분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원로의장 서암 스님은 종단개혁에 열정을 보였다. 종단의 기강을 쇄신하고 청정승풍을 회복하지 않는 한 종권을 둘러싼 종단혼란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스님은 1993년 11월30일 종단개혁위원회를 통해 ‘석존의 교법에 의한 종단재건’이라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송서암의 불교개혁론’(김광식)에 따르면 이 개혁안에는 기존 종단 틀 내에서 교육과 제도개혁을 통한 종단 쇄신안이 담겨 있었다. 교육과 재정, 의례, 포교에 대한 제도 개선과 총무원, 중앙종회, 원로회의 등에 대한 운영방안도 포함됐다. 그러나 이 개혁안은 장기집권을 염두에 둔 의현 총무원장이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반영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서암 스님은 1993년 12월24일 입적한 성철 스님의 뒤를 이어 제8대 종정에 추대됐다. 이 무렵 조계종은 의현 스님의 총무원장 장기화에 따른 반발이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종단 내부에서 개혁요구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종단개혁의 움직임은 19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사회민주화를 견인했던 실천승가회 등 승가단체들이 주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의현 총무원장이 3선 연임을 무리하게 추진하고, 상무대 비리의혹이 일반 언론을 통해 불거지면서 개혁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서암 스님 역시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은 막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1994년 3월23일 원로들과 만나 “의현 총무원장의 3선 연임을 반대한다”는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중앙종회는 3월30일 의현 총무원장의 3선을 가결했다.

범승가종단개혁추진위(범종추)를 중심으로 개혁세력이 결집되면서 의현 총무원장 퇴진 운동이 본격화됐다. 범종추는 의현 총무원장 체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종권창출을 염두에 뒀다. 그러나 서암 스님은 여기에 동조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님은 범종추가 추진하려는 승려대회를 앞두고 교시를 내려 만류했다.

서암 스님은 회고록에서 “종정인 내가 개혁 그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았다. 다만 세속의 역사에서 보았듯 수단과 방법이 나쁘면 아무리 숭고한 목적도 퇴색되고 왜곡되기 쉽다. 종교에 있어 폭력이란 종교 자체의 뿌리를 흔들고 스스로를 부정하는 결과에 이르게 한다. 이런 자기 부정의 길을 가도록 방관할 종정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교시 발표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범종추는 승려대회를 강행했고, 승려대회금지 교시를 내린 서암 스님을 반개혁 인물로 내몰아 불신임까지 결의했다. 스님은 마지막까지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을 뿐”이라며 ‘절차에 따른 개혁’을 당부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더 이상 종정자리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서암 스님은 1994년 4월26일 스스로 종정에서 물러났다. 자신이 일군 봉암사마저 떠나 태백산 자락에 토굴을 지어 무위자적한 삶을 살았다.

그리곤 2003년 3월29일 “그 노장 그렇게 살다가 그렇게 갔다고 해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봉암사 염화실에서 삶을 마감했다. 세수 90세, 법랍 71세였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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