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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숭산 스님의 사여법

기자명 이제열

“참된 눈을 물어 중생을 속이십니까”

숭산 스님, 한마음 선원 방문
대행 스님과 함께 대화문답
떠나는 숭산 스님과 법거량
보름 후 손수 쓴 편지 보내와

숭산 스님은 한국 선법을 서구에 알리고 수많은 외국인 제자들을 배출한 선승이다. 뛰어난 수행력과 특유의 달변, 열정적인 원력으로 한국불교 세계화에 크게 기여한 고승이다. 내가 스님을 만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내가 대행 스님이 설립한 한마음선원 상임법사로 있었을 때 숭산 스님이 한마음선원을 방문했다. 대행 스님은 손수 마당까지 나와 숭산 스님을 맞이했고, 나도 숭산 스님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있었다.

두 분이 서로 안부를 묻고 차를 마시는 도중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풍경이 벌어졌다. 숭산 스님이 갑자기 대행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일체의 법들은 4가지 도리에 포함 됩니다. 즉여(卽如), 일여(一如), 여여(如如), 무여(無如)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차를 담는 찻잔은 이 4가지 도리 가운데에 어느 도리에 들어갑니까?”

그러자 대행 스님은 “어디 네 가지 도리가 따로 있고 찻잔이 따로 있습니까? 모든 법이 둘이 아니거늘 무얼 그것을 물으십니까?”고 답했다. 이에 숭산 스님은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꾸했다. “아니 그 말은 설명이고… 질문이 분명하면 답변도 분명해야지요. 내가 스님에게 즉여냐, 일여냐, 여여냐, 무여냐 물었으니까 설명을 말고 이 가운데 하나를 택해서 답변을 하시라니까요”라며 대행 스님을 다그쳤다. 하지만 대행 스님은 이런 숭산 스님의 태도에 민망한지 더 이상 즉답을 않고 웃으면서 “스님 차가 식습니다. 어서 차나 드시지요”라고 했다. 이로써 두 분의 문답은 여기서 일단락되었다.

옆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조금은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선사라지만 공부의 길이나 법에 대한 관점이 다를 수 있는데 이를 굳이 자신의 법에 맞는 답변을 하라는 것 자체가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숭산 스님이 한마음선원을 떠나기 위해 차에 오를 때였다. 나는 숭산 스님에 다가가 이렇게 물었다. “큰스님, 관세음보살에게 32응신이 있는데 이 32응신은 큰스님의 사여법 가운데에 어느 도리에 들어갑니까?” 순간 숭산 스님은 멈칫하더니 “오직 부를 뿐! 오직 부를 뿐이야”라고 했다. 이 말씀에 내가 “질문이 분명하면 답변이 분명하셔야지요. 32응신은 사여법 중에 어디에 속합니까?”고 답변을 재촉했다. 그러자 숭산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분위기가 아니니 내일이라도 화계사로 오게나.” 이렇게 숭산 스님과 헤어졌고 나는 화계사로 숭산 스님을 찾아가 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보름쯤 지났을까? 한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숭산 스님이 직접 쓰신 편지였다. 급히 썼는지 수첩의 메모지에 쓴 것을 뜯어서 보낸 것이다. 거기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이제열 법사님 보소서! 문득 한마음선원의 일이 생각나 비행기 안에서 이 글을 씁니다. 일전에 관세음의 32응신이 사여법 중 어디에 들어가느냐고 물으셨는데 이 질문에 답하면 그 이치를 알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에게 천개의 눈과 천개의 손이 있다는데 어느 눈이 참된 눈이요?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나는 즉시 편지를 썼다. 먼저 정중히 인사를 여쭌 뒤 답변을 올렸다. “천개의 눈이 곧 하나의 눈이요, 하나의 눈은 곧 공했습니다. 공 가운데에는 참과 거짓이 없는데 어디서 참된 눈을 물어 중생을 속이십니까?” 그리고는 곧 대행 스님에게 숭산 스님과의 문답을 전해드렸다. 그때 대행 스님은 크게 웃으며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숭산의 호랑이가 관악산 여우한테 가사를 물렸구나!”

나는 숭산 스님의 경지가 어떤지 전혀 모른다. 다만 그분의 혁혁하신 기개와 열정적 전법정신은 길이 불교사를 장식할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러나 그날 숭산 스님이 내게 주신 답변은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다음 생에 다시 만난다면 같은 질문을 드릴 것이다.

이제열 법림선원 지도법사 yoomalee@hanmail.net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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