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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낯설지만 기억해야할 이름

인도차이나가 숨겨둔 성지…근현대 격랑 이전엔 동남아 무역 요충지

베트남·태국·캄보디아·미얀마 등
둘러 싸인 동남아 유일 내륙국가
19세기 프랑스의 식민 지배 받아
독립 후 극심한 내전 거쳐 공산화
베트남전쟁 격전지로 황폐화
14세기엔 유럽도 감탄한 무역지
75년 공산화 이후도 98% 불자

라오스의 독립을 기념해 건립된 독립기념문 ‘파뚜싸이’는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엔의 랜드마크다. 파리의 개선문을 본따 만들었다고 하지만 내부의 장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힌두교의 신화 ‘라마야나’의 내용들이다. 다양한 민족, 다양한 문화의 영향을 받은 라오스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이름은 슬프다. 인도와 중국 사이. 그것뿐이다. 그 이름에는 어떤 특징과 주체성도 보이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를 지칭할 때 성씨와 이름을 이야기하는 대신 ‘김씨네와 박씨네 사이에 살고 있는 아무개’라고 말하는 듯 하다.

인도의 동쪽, 중국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땅은 오래전부터 인도와 중국의 정치·문화적 영향을 받아왔다. 인도와 중국이 어떤 나라인가. 4대 문명의 발상지로 인류문화를 이끌어온 거대한 축이 아닌가. 그러니 이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오히려 인도와 중국의 앞선 문화를 가장 지근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그래서 가장 화려하고 다채로운 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는 유리한 위치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만 보아도 그렇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문화권에 맞닿아있고 역사 이래로 중국문화의 영향을 지속적으로 받으며 독창적인 문화의 꽃을 피우지 않았던가. 하지만 한반도는 ‘동중국(East China)반도’가 아닌 고유의 이름을 갖고 있다. 중국문화의 영향권 안에 있지만 우리만의 문화와 역사를 만들어온 것이다. 인도차이나반도라는 이름 속에는 이런 역사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인도차이나반도에는 미얀마, 태국, 캄보디아, 베트남 그리고 바로 라오스가 위치하고 있다. 이들 가운데 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들이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더 과거로 올라가면 중국과 인도의 지배를 받기도 했다. 물론 지금과는 전혀 다른 이름과 국경의 나라들이었다. 지금의 국경선을 기준으로 어느 나라가 어느 나라를 침략했다거나 지배했다는 단순한 도식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라오스의 역사를 그렇게 살펴보기에는 범위를 정하기부터가 쉽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라오스는 북으로 중국, 동으로 베트남, 남쪽으로 캄보디아 그리고 서쪽으로 태국·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내륙국가다. 지금과 같은 국경선의 윤곽이 정해진 것은 식민지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무렵 라오스는 루앙프라방, 위엥짠, 참파삭의 세 나라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 세 나라는 이웃의 강력한 왕국이었던 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하지만 19세기 중반부터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반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면서 라오스의 운명도 요동쳤다. 1883년 프랑스와 베트남 사이에 제1차 후에조약(계미조약)이 체결되면서 베트남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는 또다시 무력을 사용해 태국을 압박, 메콩강 동쪽에 대한 지배권을 빼앗았다. 바로 지금의 라오스 지역이다. 프랑스는 태국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세 나라를 통합, ‘루앙프라방왕국’이라는 그럴싸한 이름을 지어주며 1893년 자신들의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후일 프랑스는 루앙프라방왕국의 다수민족이었던 라오족의 복수형 ‘라오스’를 국가명으로 정함으로써 국제사회에 라오스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라오스는 1949년 7월19일 프랑스로부터 독립한다. 하지만 국방, 외교, 재정권은 여전히 프랑스가 갖고 있는 형식적인 독립이었다. 국가는 우파와 좌파로 분열돼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그러한 와중에 1953년 프랑스-라오스 조약에 의해 루앙프라방 왕국의 통치자였던 시사반 봉(Sisavang Vong)을 국왕으로 하는 입헌군주국으로 완전 독립한다. 하지만 이미 불붙은 우파와 좌파의 대립, 그리고 인접해 있는 베트남의 공산화는 라오스에도 혁명의 바람을 불러왔다. 좌파인 파테트라오가 북베트남과 연합해 라오스정부군과의 내전을 벌였다. 결국 1975년 정권을 잡으며 왕정은 폐지됐고 공산주의 국가인 ‘라오인민민주공화국’이 탄생한다. 현재까지도 라오스는 공산당이 집권하고 있다. 하지만 공산정권의 탄생은 라오스 스스로의 선택이라기보다 이웃국가였던 베트남의 전쟁과 공산화에 따른 부수적 결과였을 뿐이다.

2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일본의 패망을 틈타 독립을 선언한 베트남은 이후 프랑스와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개입으로 남북이 분열되며 우리에게도 익숙한 ‘베트남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다. 이때 인접해 있던 라오스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전쟁에 휘말리고야 만다. 호치민이 이끄는 북베트남군과 손잡은 파테트라오는 라오스 정규군과의 내전을 벌이고 북부라오스 일대가 베트남에 의해 점령당한다. 라오스는 전쟁물자 조달의 길목이 되었다. 일명 ‘호치민루트’로 불린 이 길은 베트남전쟁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었다. 이를 눈치챈 미군은 라오스의 산악지형에 밝은 동북부의 소수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 호치민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이 과정에서 수차례에 걸친 비공식 폭격도 병행됐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1964~1973년 라오스에 투하된 폭탄은 200만t에 달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유럽과 아시아에 투하한 폭탄 210만t에 육박하는 엄청난 양이었다. 뉴욕타임즈는 이를 두고 ‘라오스의 모든 국민들에게 각각 1t의 폭격이 가해진 셈’이라고 비유했다. 이로 인해 라오스 국토는 황폐화됐고 약 8000만 개의 불발탄이 라오스 영토에 남게됐다. 지금까지도 해마다 평균 50여명의 라오스인들이 불발탄에 피해를 입는 것으로 알려졌다.
 

라오스 수도 비엔티엔의 풍경. 아직은 고층건물이 드물지만 일부 구역에서는 건설공사가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냉전시대 소련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경계했던 미국의 적극적인 개입, 그리고 이를 묵인한 라오스 왕가의 조력은 베트남전쟁의 종식과 함께 라오스에도 입헌군주제의 폐지와 공산정권 수립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라오스의 운명은 주변 강대국들의 회오리에 표류하는 일엽편주와도 같은 모양새였다. 최근 박항서 감독 신드롬으로 인해 베트남전쟁에 대한 우리의 책임과 반성이 거론되는 속에서도 베트남전쟁의 또 다른 축이었던 라오스, 그 이름은 여전히 변두리에 머물러 있다.

무차별 폭격에 전국토가 폐허로 변하고 공산정권수립 후 가해진 태국과 미국의 경제봉쇄로 경제는 사실상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1990년대 소련의 해체와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일부 시장경제가 도입됐지만 여전히 공산당 독주는 계속되고 있다. 경제도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한반도 면적 1.1배, 인구 700만명(2018년 추계)의 라오스는 1인당 국민소득이 2050달러(2017)에 그치는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다. 특히 1975년 공산정권 수립 후 국민의 10분의1이 태국으로 탈출하며 인구가 급감하기도 했다. 이후 정부가 피임기구 사용을 금지하면서 인구는 회복세에 접어들어 현재 15세 이하가 전체 인구 5분의 2를 차지할 정도로 출생률이 높은 국가이기도 하다.

이제 시선을 좀 더 과거의 라오스로 돌려보자. 근현대의 나약하고 혼란스러운 역사, 그 이전의 라오스는 오히려 우리에게 더 친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감탄할만한 구조와 대칭을 자랑하는 궁궐은 멀리서도 보인다. 실로 거대한 크기의 이 도시는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삶의 터전을 제공하고 있다. 왕의 거처는 화려하게 장식된 문과 훌륭한 접견실, 아름다운 방들을 갖추고 있다. 모든 방들은 썩지 않는 목재(티크목)로 만들어졌고 안과 밖은 훌륭한 석재로 꾸며져 있으며 금으로 덮여있는 것처럼 보인다. 왕의 거처에 있는 넓은 정원에 들어서면 벽돌로 만들어지고 기와로 덮인 거대한 건물들을 볼 수 있다.…만약 내가 궁전의 모든 부분들, 그 화려함과 건물들, 정원에 대해 정확히 묘사하고자 한다면 족히 책 한권을 쓸 수 있을 것이다.’

1642년 네덜란드의 상인들과 함께 란쌍(Lan Xang)왕국에 도착한 예수회의 선교사 조반니 마리아 레리아 신부가 기록한 란쌍왕국의 수도 위엥짠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란쌍왕국은 중국과 인도, 보다 넓게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의 거점지였다. 14세기 건립된 이 란쌍왕국이 바로 오늘날 라오스 역사의 출발점이다.
 

라오스는 공산국가임에도 불교신자, 그리고 불교와 융합된 토속신앙 신자가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1991년 제정된 라오인민민주공화국 헌법 전문에는 “다민족에 의해 형성된 라오스 인민은 몇 천년을 거쳐 사랑하는 이 땅에 정착하며 발전했다.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 파 응움(Fa Ngum) 왕 시대에 우리들의 조상은 통일된 란쌍왕국을 건국해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라오스의 국토는 외부세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위협과 침략을 받아 왔다”고 밝히고 있다. 라오스의 뿌리가 란쌍왕국에 있음을 명확히 하는 이유는 란쌍왕국이야말로 라오스인들이 건립한 최초의 통일국가였기 때문이다.

물론 란쌍왕국 출연 이전에도 이 땅은 수많은 사람들의 터전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통일된 나라를 세우지 못했다. 수시로 파간(미얀마), 크메르·앙코르(캄보디아), 응오(베트남), 수코타이(태국) 등 인접해 있던 국가들의 일부가 되거나 지배를 받아야 했다. ‘라오’족으로 불리는 이들은 자신들의 문자를 갖고 있었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역사 또한 극히 미약하다. 그러니 14세기 이전 라오스 역사는 신화나 구전에 의존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라오족에게 불교가 전해진 것 또한 5세기경이라는 주장이 있지만 실제 불교가 정착한 것 또한 란쌍왕국 시대라는 것이 정설이다.

역사만을 살펴본다면 라오스는 우리에게 낯설고 먼 나라다. 하지만 오늘날 라오스를 찾는 발길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장기간의 경제봉쇄와 폐쇄적 국정운영은 역설적으로 라오스의 자연과 문화를 보존하는 결과를 낳았다. 또 수많은 외침과 식민지배, 그리고 공산화라는 격랑 속에서도 라오스는 전 국민의 67%가 불교신자라는 놀라운 통계를 유지하고 있다. 토착종교와 융합된 불교까지 감안한다면 사실상 98%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이 또한 근현대 이후 기독교 등 외부의 종교가 유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유럽관광교역이사회(ECTT)는 라오스를 ‘2013 세계 최고 여행지’ 가운데 하나로 선정하기도 했다. 관광산업은 이제 라오스의 주요 국가수입원 가운데 2위로 등극할 만큼 지속적인 성장을 이루고 있다. 2011년 라오스를 방문한 우리나라 사람이 이미 3만5000여명에 육박했다는 통계도 일반인들에게 관광지로, 불자들에게는 새로운 불교성지로 각광받고 있는 라오스의 급부상을 대변한다. 한때 ‘꽃보다 청춘’들이 자유와 모험을 찾아 떠났던 라오스가 이제는 불자들에도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불교성지’로 기억되는 이름이 된 것이다.

namsy@beopbo.com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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