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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문유관과 브람스의 ‘호른 트리오’

기자명 김준희

출가 앞둔 싯닷타 심리변화 호른 음색과 유사

편안한 호른 선율 흐르는 첫 악장
부족함 없는 싯달타 궁궐 삶 연상
노병사 자각한 사문유관의 풍경
적절한 템포·스타카토로 표현
​​​​​​​
바이올린 화려한 선율 돋보이는
빠른 템포의 마지막 악장에서는
출가하는 싯달타 강한 모습 연상

요하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의 수필에서 ‘작지만 확실한 행복’ 이라는 뜻의 단어 ‘소확행’ 을 이야기 할 때 브람스가 등장한다. ‘막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뜯어먹는 것,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그림자를 그리는 걸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하략)’ 음악에 조예가 깊은 하루키가 택한 브람스의 실내악 중 어떤 곡이 확실한 행복을 줄 수 있는 작품인지 궁금해진다. 아마도 브람스 음악 전반에서 느낄 수 있는 진중함과 침착함이 이런 소중한 느낌으로 표현된 것이 아닐까.

숫도다나 왕은 청년기에 접어든 싯닷타에 대해 걱정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시타의 예언 중 출가를 할 수도 있다는 두 번째 예언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최대한 아들에게 좋고 귀한 것만을 보고 듣게 하고 싶었다. 좋은 궁전을 지어주었고 시중들 하인들과 여종들은 물론이고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도록 했다. 그러나 언제나 예감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다가오는 법이다. 결혼 후 싯닷타 태자는 부왕의 허락을 받고 시종 한 명과 함께 카필라 성 밖에 나가 백성들의 삶을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성 밖에서 본 세상의 모습들은 그에게는 새로운 충격이었으며 이 나들이는 결국 출가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이를 훗날의 사가들은 사문유관이라고 이름 붙였다.

전편에서 호른과 트럼펫의 팡파레로 시작되는 슈만의 교향곡 ‘봄’에서 부처님의 탄생을 찾아 본 것과 같은 견지에서 요하네스 브람스의 호른 트리오 Eb장조, 작품 40에서 사문유관의 자취를 찾아보고자 한다. 슈만은 강건하고 소박한 북부 독일 지역 출신답게 겉으로 드러나는 지나친 화려함을 경계하고 음악의 기본에 충실한 깊이 있는 음악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내면적 성찰이 강한 브람스의 성향에 잘 맞는 장르는 실내악이었다. 카메라 (방, 또는 Chamber) 안에서 연주되는 음악이라는, Musica da Camera 라는 말에서 그 어원을 찾을 수 있는 실내악 (Chamber Music)은 적은 인원으로 연주되는 적절한 규모의 연주형태로 앙상블이라고도 부른다.
 

사문유관. 2~3세기 간다라 파키스탄 페샤와르박물관.

브람스가 남긴 17개의 실내악 작품 중 가장 특이한 구성으로 되어있는 호른 트리오를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호른을 사랑했는지 잘 알 수 있다. 호른은 금관악기 중 가장 먼저 오케스트라에 도입된 악기이다. 오케스트라에서는 무척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는 이 악기는 마우스피스부터 벨까지의 길이가 무척이나 길기 때문에 음색과 그 울림은 깊지만 깨끗하고 정확하고 명료한 소리를 내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그러기에 독주로 연주되는 경우는 드물다. 이런 낯선 악기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거의 독주곡에 가까운 역할을 맡겼다는 것에서 브람스가 독특하면서도 신중하고도 사려깊은 사람이라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첫 악장은 브람스 작품의 첫 악장 중 소나타 형식으로 작곡되지 않은 유일한 악장이다. 마지막 악장에 주로 쓰이는 론도 형식(주제와 에피소드가 반복하며 교차되는 형식)이 첫 악장에 배치된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목가적으로 온화하게 시작되는 바이올린과 피아노 코드 위에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듯한 호른의 주제가 등장한다. 이 첫 악장의 편안한 호른의 선율과 Eb조의 분위기는 다소 지루하지만 부족함 없는 평온한 싯닷타의 궁궐 생활을 연상케 한다. 하지만 호른의 분위기와 톤을 같이 하는 애잔하기까지 한 바이올린 선율과 그 둘을 지지하는 피아노의 견고한 패시지는 종종 숨어있는 열정을 연출한다. 이는 곧 있을 29세 싯닷타의 내면에 있는 소용돌이에 빗대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두 번째 악장은 전체적으로 선율이 재빠르게 흘러가는 4분의 3박자 스케르초 악장이다. 적절한 템포와 활기찬 스타카토 선율들이 결코 가볍지 않게 중간중간 강조되는 음들을 가지고 있는 이 악장은 성문 밖에서 마주친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홀로 나선 첫 나들이에 대한 기대감과 앞으로 마주하게 될 세상의 민낯이 주는 놀라운 장면을 표현한 것 같다. 설렘, 충격, 절망 등 지금까지 느낄 수 없었던 감정들과 세상이 감추고 있던 늙음, 병듦, 죽음을 대하기 전, 태자는 그야말로 걱정할 것이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장막 뒤의 현실을 직면하고 놀라움과 절망에 휩싸이게 된다. 노병사(老病死)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자각은 지금까지 누려왔던 모든 풍요로움을 한 순간에 빼앗아 버렸다. 북문 나들이에서 수행자와의 만남은 태자에게 절망 속에 마주한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가장 브람스적인 악장인 세 번째 느린 악장은 흔히 말하는 비가(Elegy)악장으로, 고전주의적인 형식미 위에 낭만적인 성향을 견고하게 드러낸 브람스가 즐겨 사용하는 대위법적인 작곡법이 돋보인다. 곡의 전반을 지지하는 피아노 선율 위에 바이올린과 호른의 선율이 eb단조라는 무거운 조성으로 펼쳐진다. 특히나 느린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선율은 싯닷타가 느꼈을, 인간이라면 누구나 늙고 아프고 병들고 죽어야만 한다는 피할 수 없는 근심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피아노 리듬이 변형되어 빠른 걸음걸이로 표현되는 부분은 북문의 출가사문을 마주한 싯닷타의 심리상태에 견줄 수 있지 않을까. 리듬 화성의 변화는 초췌하지만 맑고 강인한 눈빛과 평온한 얼굴의 수행자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발견하고 출가로의 결심을 재촉하는 것으로 비유해서 생각해 볼 수 있다.

슬픔을 이겨낸 기쁨으로 비유하는 학자도 있을 만큼 마지막 악장은 여느 피날레와 같이 빠른 템포의 악장으로, 앞의 세 악장에서 보여준 주제의 조각들을 모두 담고 있다. Eb장조에서 경쾌한 16분 음표의 시작으로 곡을 풀어가고 있으며 다른 악장 보다 바이올린의 화려한 선율이 돋보인다. 침착하거나 안정된 분위기보다는 당당하게 휘몰아치는 듯한 성격의 4악장은 출가의 결심과 실행에 옮기는 청년 싯닷타의 강건한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특히 곡의 클라이막스에서 여덟 마디 동안 계속되는 Eb의 페달톤(pedal tone, 반복되는 음)은 굳은 의지의 표본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30여분에 달하는 이 대곡에서 호른 연주자는 끝으로 갈수록 자신의 모든 기교와 음악성을 발휘하게 된다. 마치 또 다른 세상, 출가의 길을 가기 직전의 청년 싯닷타의 강한 모습과도 같다.

브람스는 오케스트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도 한 번도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호른이라는 악기에게 독주에 가까운 역할을 맡겨 무대의 앞쪽으로 이끌어냈다. 동시에 언제나 앙상블에서 주인공 역할을 도맡아 했던 바이올린에게 호른의 따뜻한 음색을 잘 받쳐주며 더욱 돋보이게 하는 조력자 역할을 부여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브람스의 유일한 호른 트리오를 들으며 부처님이 출가를 결심하게 된 사문유관을 되짚어 보자. 스산한 저녁녘이어도 좋고, 눈이 소복이 쌓인 어느 겨울 아침이어도 좋다. 작지만 확실한 행복 또는 작지만 선명한 깨달음이 찾아올 지도 모른다.

김준희 피아니스트 pianistjk@naver.com

 

[1473호 / 2019년 1월 1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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