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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12대 총무원장 서리 경덕 스님

‘종정중심제’ 갈등에 총무원장 서리로 물러난 비운의 스님

영명사서 활해 스님 은사로 출가
한국전쟁 때 월남, 불교정화 참여
도총섭 지냈지만 활동기록 미미
문중배경 없어 무명의 삶 살아
​​​​​​​
76년 10월 총무원장 임명됐지만
서옹 스님 ‘종정중심제' 반발한
종회 인준 거부로 두달만에 퇴임
70년대 종단 혼란이 남긴 상처

조계종에서 영해당 경덕 스님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해방 이후 불교정화운동에 나섰고 12대 총무원장 서리를 지낸 스님이지만 그의 행적은 뚜렷하지 않다. 조계종 홈페이지에 12대 총무원장으로 표기돼 있을 뿐 그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않다. 그 시대를 함께 했던 스님들조차 경덕 스님은 기억에서 잊혀진지 오래다. 그렇기에 경덕 스님의 삶을 좇는 것은 쉬운 여정이 아니다.

경덕 스님이 조계종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976년 10월이다. 이 무렵 조계종에는 종정 서옹 스님이 추진한 ‘종정중심제’로 중앙종회와 종정스님 간의 갈등이 싹트고 있었다.

서옹 스님의 종정중심제는 1975년 9월부터 본격화됐다. 9대 총무원장 경산 스님과의 대립국면에서 완승한 서옹 스님은 종정으로서의 실질적 권한 행사에 착수했다. 종무행정에 대한 총무원장의 권한을 대폭 줄이고 이를 종정이 맡도록 했다. “종단이 일사불란한 체제로 화합 운영되기 위해서는 종정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서옹 스님의 종정중심제를 뒷받침해 준 것은 종단 중진회의였다. 그해 9월26일 경산 스님의 총무원장 사직에 따라 소집된 조계종 중진회의는 10월2일 “현 상황을 비상사태”로 규정하고 “종단의 모든 권한을 종정에게 일임한다”고 결의했다. 이를 계기로 서옹 스님은 10월7일 10대 총무원장으로 서암 스님을 임명했다. 당시 종헌은 총무원장과 각 부장은 중앙종회에서 선출해 종정이 임명하도록 규정했지만, 서옹 스님은 중진회의 결의를 내세워 직권으로 처리했다. 서옹 스님은 한발 더 나아가 종정중심제를 한층 강화하는 종헌개정을 추진했다.

1975년 12월1~4일 열린 제42회 중앙종회에 발의된 종헌개정안에 따르면 총무원장을 종정이 지명하고 중앙종회의 동의로 선출하도록 했으며, 총무원 각 부장은 총무원장의 제청으로 종정이 임명하도록 했다. 총무원장과 각 부장의 임기 4년 규정도 삭제해 종정이 언제든 총무원장과 각 부장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종단의 사법부에 해당하는 감찰원도 규정원으로 변경하고, 규정원장과 부장, 규정위원을 종정이 임명하도록 했다. 이는 종단의 행정부와 사법부 수장을 모두 종정이 지명하고 임명하도록 한 개편이었다. 때문에 12월3일 종헌개정안을 심사하는 중앙종회에서는 ‘종정의 권한이 과하다’는 지적이 이어졌다.

제4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이날 지관 스님은 “개정안은 행정권과 사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종정스님의 1인 체제를 굳히자는 것이자 종정스님께 전권을 일임하는 것”이라며 “현 종정스님이 아니고 만일 다른 종정스님이 나오실 경우 혹시 잘못된 시행이 있을 때는 어떻게 견제하느냐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녹원 스님도 “우리 종헌은 삼권분립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입각해 제정, 운영되어 왔다”며 “그런데 제출된 종헌개정안은 3권 중 2권을 종정스님이 장악토록 하는 것”이라고 거들었다. 서옹 스님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중앙종회라는 점에서 종회의원들의 발언 수위는 높지 않았지만 종정중심제에 대한 강한 우려가 내포돼 있었다. 그러나 이미 힘의 균형이 서옹 스님에게 기울어진 상태에서 중앙종회가 종헌개정안을 부결시키기는 쉽지 않았다. 이날 중앙종회는 “종정이 행한 종무처리가 부당하다고 인정될 때 종회의원 과반수의 찬성으로 무효 또는 변경할 수 있도록 한다”는 조항을 신설하는 선에서 종헌개정안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이로써 서옹 스님이 추진한 종정중심제는 법적인 토대까지 갖추게 됐다.

1976년 10월4일 종정 서옹 스님은 제12대 총무원장으로 무
명의 경덕 스님을 임명했다. (‘대한불교(1976년
10월17일자 캡처)’

그러나 서옹 스님의 권한이 커질수록 그에 따른 부작용과 반발도 커졌다. 서옹 스님의 지명으로 10대 총무원장에 오른 서암 스님은 종정스님 측의 지나친 간섭에 문제를 제기하며 두 달여 만에 사직했고, 그해 12월23에는 종정중심제에 불만을 품은 김대심 등이 흉기를 들고 총무원 청사를 난입해 종정스님을 비롯해 종단간부를 위협하는 일도 있었다. 서암 스님에 이어 제11대 총무원장에 임명된 영암 스님도 1976년 10월 취임 10개월 만에 사의를 표명했다. ‘건강문제’를 사직이유로 밝혔지만, 영암 스님은 불과 두 달 뒤 규정원장으로 취임했다는 점에서 이를 곧이곧대로 보기는 어렵다.

이런 가운데 서옹 스님은 1976년 10월4일 후임 총무원장으로 경덕 스님을 임명했다. ‘대한불교’(1976년 10월17일자)에 따르면 서옹 스님은 이날 “박기종(영암) 총무원장이 건강상 그 직을 수행할 없다고 여러 번 사임을 전해와 이번에 경덕 스님을 12대 총무원장에 임명하게 됐다”며 “경덕 스님은 정화당시 도총섭을 지낸바 있고 신심과 원력이 깊으신 분이라 스님의 총무원장 취임은 사부대중이 경하할 일”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서옹 스님의 발언과 달리 경덕 스님은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총무원장이 바뀔 때마다 비중 있게 보도했던 일반 언론들도 경덕 스님의 총무원장 임명 소식은 대부분 단신으로 처리했다. 임기가 없는 데다 총무원장의 잦은 교체 탓일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경덕 스님은 종단 내에서 역대 총무원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지도가 낮았다. 심지어 당시 중앙종회의원들 사이에서 “경덕 스님이 누구냐”는 말들이 흘러나올 정도였다.

조계종이 2012년 통합종단 출범 50주년을 맞아 종단 기록물들을 정리한 사진집 ‘종단 50년, 기록과 대화하다’에 수록된 경덕 스님의 약력에 따르면 스님은 1919년 8월12일 강원도 명주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다 발심해 1939년 3월 평양 영명사에서 활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듬해 강원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이후 출가본사인 영명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했고, 1950년 11월 영명사 주지를 지냈다. 한국전쟁으로 월남한 경덕 스님은 1953년 7월 경남 기장 불교포교당 포교사에 이어 이듬해 부산 동래 금정선원장을 맡았다.

‘한국불교승단정화사’에 따르면 이 무렵 석주 스님은 금정사를 재적사찰로 두고 활동했으며 금정선원장을 역임하기도 했었다. 때문에 경덕 스님은 석주 스님과 인연을 맺었고, 이 인연은 경덕 스님이 불교정화운동에 나서게 된 배경이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덕 스님은 1955년 2월 비구승 중심으로 설립된 조계종에서 청담 스님에 이어 행정수반인 도총섭 겸 불교정화추진위원장으로 선출됐다. 그러나 이 같은 직책을 맡았음에도 불교정화운동사에서 경덕 스님의 구체적인 활동기록은 없다. 오히려 경덕 스님은 ‘비구·대처 갈등’이 극심했던 1957년 12월 고향인 강원도 명주로 내려와 폐사된 낙가사를 등명낙가사로 개명해 중창했고, 강원 묵호 불교포교당에서 포교사로 활동했다. 1959년 1월엔 오대산 월정사 주지로도 선출됐다. 그러나 한국전쟁 때 월남해 뚜렷한 문중배경이 없었던 탓에 경덕 스님은 얼마 되지 않아 월정사 주지에서 물러났다.

조계종 명예원로의원인 현해 스님은 “내가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아 주지자리를 두고 문중 내부에서 갈등이 있었고, 그로 인해 경덕 스님이 월정사 주지에서 물러났다”며 “그때 스님의 짐을 챙겨 산문 밖까지 배웅해 드렸는데, ‘김 행자, 중노릇 잘해’라고 당부하신 말씀이 기억난다”고 회고했다.

경덕 스님은 10월16일 조계사에서 열린
취임식에서 종단 운영계획을 담은 취임사를 읽었다. (‘종단 50년, 기록과 대화하다’)

월정사 주지에서 물러난 경덕 스님은 이후 등명낙가사에서 생활했다. 통합종단이 출범한 이후에도 경덕 스님은 종단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종무행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 그랬기에 서옹 스님이 경덕 스님을 총무원장에 발탁한 배경에 궁금증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일각에서는 종정스님의 측근들이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문중배경이 없고, 종무행정을 잘 모르는 경덕 스님을 임명하도록 했다는 말들이 나왔다.

‘대한불교(1976년 10월24일자)’에 따르면 조계종은 10월16일 오전 11시 서울 조계사에서 제12대 총무원장 경덕 스님 취임식을 봉행했다. 경덕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취임하기 위해서는 중앙종회의 인준과정을 거쳐야 했지만, 이번에도 서옹 스님은 강행했다. 서옹 스님은 이날 교시를 통해 “종단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새 총무원장을 맞게 된 것은 뜻깊은 일”이라며 “이제 사부대중은 단결해 종단중흥을 위해 용맹정진하자”고 당부했다. 경덕 스님은 “사부대중의 각별한 지도와 협력을 받들어 본인의 능력을 다하여 직무수행에 진력하겠다”고 밝혔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덕 스님이 총무원장으로 인준을 받는 데 큰 무리가 없을 듯 보였다. 그러나 중앙종회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4대 중앙종회회의록에 따르면 총무원장 인준안과 1977년 조계종 예산안 등을 다루기 위해 1976년 11월29일 소집된 제45회 중앙종회는 진통을 겪으며 공전을 거듭했다. 첫 안건인 ‘1976년 종정감사의 건’을 두고 중앙종회는 4일을 허비했다. 혼란한 종단상황으로 중앙종회가 점검해야 할 사안이 많기는 했지만 그렇더라도 길어야 반나절이면 끝나던 종정감사 안건을 나흘가량 진행한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이는 종정중심제에 따라 종무행정을 직접 진행한 서옹 스님에 대한 중앙종회의 반발이었다. 심지어 설조 스님은 “총무원장은 종회의 인준절차를 밟지 않으면 서리로서 직명을 밝혀야 한다고 보는데 신문 등 대외적 발표에 보면 원장으로 발표되고 있는 것이 합법한 것이냐”고 종정스님의 인사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다.

거듭된 논란 끝에 총무원장 인준안은 중앙종회 개원 4일차인 12월2일 오후에야 진행될 수 있었다. 인준안 처리에 앞서 총무원장 서리 경덕 스님은 “진작 의원스님들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렸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한 점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며 승가대학과 불교병원 설립 등의 계획을 설명하며 종회의원들의 협조를 구했다. 경덕 스님의 인사말이 끝나자 의장 녹원 스님은 인준안 처리방법 논의를 위해 정회를 제안했지만, 설조 스님은 이미 마음이 정해진 듯 “그냥 진행하자”고 거부했다. 설조 스님은 이어 총무원장 인준에 무기명비밀투표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어느 종회의원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결국 총무원장 인준안은 무기명비밀투표로 진행됐고, 그 결과 재적의원 50명 가운데 46명이 참석해 찬성 12표, 반대 34표로 부결됐다. 당시 종회의원이었던 명예원로의원 월서 스님은 “우리는 경덕 스님이라는 분을 전혀 알지 못했고, 그 분은 행정을 모르는 분이었다”며 “(종정스님이 애초에) 할 수 없는 분을 지명했던 것 같다”고 회고했다.

중앙종회의 인준부결로 경덕 스님은 총무원장 서리직에서 물러났다. 12월4일 경덕 스님은 다시 중앙종회에 출석해 “본인 문제로 인해 의원스님들께 누를 끼쳐 미안하다”며 “여러 스님께서 본인이 수행하고 공부하는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으로 알고 감사드린다. 승려로서 본래 수행이 목적이므로 본래 목적으로 돌아가겠다”고 고별인사를 전했다.

총무원을 나온 경덕 스님은 등명낙가사로 돌아와 복원불사에 매진했다. 이후 경덕 스님은 조계종사에 등장하지 않았다. 이후 경덕 스님은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지 5년째 되던 해인 1981년 12월6일(음력 11월11일) 돌연 입적했다. 사인을 두고 여러 설들이 난무하지만 구체적으로 드러난 사실은 없다. 대부분 소문으로 들었다고 할 뿐, 경덕 스님의 마지막 삶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조계종 12대 총무원장으로 취임식까지 진행했지만 공식 총무원장으로 기록될 수 없는 경덕 스님의 불행한 삶은 1970년대 혼란한 불교계 상황이 낳은 또 하나의 상처였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75호 / 2019년 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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