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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

수학이 물리적 현상 잘 기술해도 참값은 아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여러 이론들은
기존 이론 중 가장 나은 것일 뿐
불변의 수식 있다는 생각은 망상

사람들은 물리학을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작 물리학자 본인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물리학이란 물리적인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이론은, 절대적인 이론도 아니고 영원히 최선의 이론도 아니고, 지금까지 얻은 이론 중에서 가장 나은 이론일 뿐이다. 더 나은 이론이 나오면 현재의 이론은 조금도 미련 없이 버린다. 또, 큰 틀에서는 맞는 이론도 작은 틀에서는 끝없이 개선이 이루어진다. 즉 기존의 방정식에 그걸 보정하기 위한 오차 항이 붙는다. 오차 항이 얼마나 더 붙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뉴턴의 중력의 법칙은 로 표현되지만(여기서 G는 중력상수,, 는 두 물체의 질량, r은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이다), 완벽한 방정식이 아니다. 근사식일 뿐이다. 더 정밀한 이론인 상대성이론에 의하면 여기에 오차 항이 붙으며, 다시 더 정밀한 이론인 양자역학에 의하여 여기에 다시 오차 항이 더 붙는다. 미시세계로 들어갈수록 오차 항이 더 붙게 된다. 물리학은 실험으로 증명이 되지 않으면 지지를 받지 못한다. 그런데 사람의 수명은 유한하고, 우주는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으므로, 우리 수명 내에는 끝내 실증할 수 없는 물리이론들이 항상 있는 법이다.

두 물체 사이의 거리는 간단한 개념이 아니다. 예를 들어,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는 지구의 어디서부터 달의 어디까지의 거리인가? 이 거리는 수학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으며, 무게중심 사이의 거리이다. 무게중심(점)은 그 점에 모든 질량이 집중된 것과 같은 중력 효과를 내는 공간상의 (상상의 즉 수학적인) 점인데, 밀도가 균일한 구의 경우에 구의 중심에 있다. 그 위치는 수학적으로 계산이 가능하다. 모든 물체의 수학적인 무게중심 계산이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도형이건 모든 점의 질량을 알 수는 없으므로 실제적으로는 근사치 즉 근사적인 점일 뿐이다. 그래도 이게 유용한 이유는,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는 오차의 세계이므로 오차 한계 내에만 있으면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가진 과학기술은 오차가 있지만 자동차와 비행기가 별 문제 없이 운행된다.

수학이 왜 그리 물리학적 현상을 잘 표현하는지는 신비이다. 이걸 신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동어반복(tautology)에 지나지 않는다. 이 현상 자체가 신비인 것이다. 신비는 항상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게 신비이다. 유한한 수명을 지닌 우리는 이 신비를 다 풀지 못하고 죽는다. 이 역시 신비이다. 수명이 무한하다 할지라도, 어느 시점에서나 풀리지 않는 신비가 있을 것이다. 이 또한 신비이다. 유한한 인간이 무한을 추구하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것이 유한자의 숙명적인 신비일지 모른다. 신비에 사로잡혀 자신이 죽을 때가 다가온다는 것도 잊고 살다 죽는 것이다. 신비를 느끼는 마음과 신비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는 일종의 마약이다. 생의 유한함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기 때문이다.

종교는 이런 유한성에 대한 일종의 자기최면 수단이다. 모든 걸 다 아는 존재를 상정하고 그에게 귀의함으로써 그의 은총의 힘으로 그 신비를 풀고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혹은 반대로, 역설적으로, 신비를 해결하자는 마음을 영원히 억압하는지도 모른다. 신에 대한 불경(不敬)이란, 사실은 이런 질문을 품는 그 자체일 수 있다. 의문을 품게 되면 선대(先代)의 한계를 보게 되고, 그리되면 선대가 세워놓은 전통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그리되면 그 종교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지의 고치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 거주함으로써 지적 호기심을 억누르려고 한다. 이 점에서 호기심은 악마다. 인간은 호기심을 통해 무지를 자각하기 때문이다.

수학이 물리적 현상을 잘 기술하지만 참값은 아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 더 좋은 방정식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수학적 기술도 어떤 점을 향해 수렴하는 듯 보인다. 이 점에서, 방정식들의 극한도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주를 기술하는 불변의 절대적인 수식이 있다고 생각하면 망상이다. 이는 참나(眞我, true atman)와 같은 존재이다. 그런 수식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75호 / 2019년 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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