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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 곁의 도반, 수행의 길에서 ① - 동은 스님

기자명 동은 스님

“스님 고무신 씻은 건 너무나 본받고 싶어서였네”

해인사승가대학서 만난 현진 스님 
승가대, 송광사율원, 동국대대학원
불교미술까지 함께 공부했던 도반
​​​​​​​
일선 스님, 하루일과 항상 철저해
도반들 사이에서는 도인으로 불려
정해진 일과 지키는 건 당연하고
틈만나면 백팔대참회문 외우기도
그런 일상 모습에 존경심 일어나
스님의 까만 고무신 씻어서 말려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수행의 여정에 있어서 스승과 도반은 공부의 전부다. 행자시절 틈틈이 읽었던 큰스님들의 수행담에 반해 머리가득 환상으로 시작한 나의 지리산 토굴생활은, 스승과 도반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으로 막을 내렸다. 

스승과 도반을 찾아 나섰다. 스님 중에 제일 큰스님이라는 성철 스님이 계시는 곳이며,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수행도량이라는 해인사승가대학(강원)에 가기로 했다. 그 곳에서 공부를 마치고 오면 은사 스님이 버선발로 마중을 나올 정도라는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선택한 것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이 열리는 그 해 이른 봄이었다. 나와 같이 해인사승가대학에 지원한 비슷한 또래의 스님들은 객실에 모여 지객 스님의 입학요강에 대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해인사 도량이 주는 장엄함과 선배스님들의 카리스마 있는 모습에 다들 긴장된 표정이 역력했다. 그 시절 해인사승가대학 4학년 즉 ‘경반’ 스님들은, 경남도지사와도 바꾸지 않는다 할 정도의 위엄과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했었다. 법당의 부처님과는 눈을 마주칠 수 있어도 경반 스님들과 눈을 마주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 정도로 힘든 수행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원 서류를 제출하고 마당에 나와 있는데, 얼굴이 동글동글하면서 나보다 키가 조금 작은 앳된 스님이 말을 걸어왔다. 

“전 현진이라고 합니다. 스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네, 전 동은입니다. 지리산 토굴에서 살다가 왔습니다.” 

아직 서로 낯선 얼굴들이었지만 비슷한 파장끼린 통하는 것이 있었나보다. 우린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다음날 입학시험에 같이 합격했다. 현진 스님은 나보다 나이는 몇 살 어렸지만, 계를 먼저 받아 좌차(앉거나 걷는 순서)는 위가 되어 4년 동안 나의 왼쪽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요즘에도 가끔 그 때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이야~ 그 때 동은 스님 대단했어요. 지리산 토굴 살다 왔다면서, 맞지도 않은 긴 누비 두루마기로 마당을 쓸고 다녔는데 볼만 했다니까요.” 

토굴 시절, 다 찢어진 광목옷으로 겨울을 나고 있던 내게, 지나가던 객승이 입고 있던 누비 두루마기를 벗어주고 가셨다. 그런데 너무 커서 옷자락이 땅에 질질 끌리는 것을 보고 한 말씀이었다. 

“하하, 그래요? 난 스님을 보고 어디서 동자승이 왔나 했다니까요.” 

속가 집에서도 막내, 출가 문중에서도 막내, 우리 도반 가운데서도 나이가 막내인 현진 스님은 예나 지금이나 동안인 것은 사실이다. 그렇게 인연이 된 현진 스님은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하고 송광사율원까지 같이 졸업을 했다. 그리고 해인사 선방에서 첫 안거를 같이 난 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불교미술까지 공부를 했으니 도반들 가운데서는 가장 오랫동안 같이 산 셈이다. 지금은 서로 바빠 가끔 시간이 나면 배낭하나 메고 순례를 다니는 벗이 되었다. 또 한 스님이 있다. 나의 좌차는 7번, 오른쪽 바로 옆자리 8번은 일선 스님이셨다. 성철 스님 손상좌로 우리 도반들 사이에서는 일찍이 도인으로 통했다. 어느 달빛 좋은 날, 홍제암 쪽으로 가는 오솔길 산책을 나섰다. 평소 별 말씀도 없이 공부만 열심히 하는 스님이셨는데, 그날은 서로 지나온 수행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나는 지리산 토굴이야기와 스승과 도반의 필요성을 느껴 해인사에 왔다고 했다. 나와 같은 해 계를 받으신 스님도 이곳에는 일 년 늦게 오셨다. 백련암 가풍은 계를 받으면 거의 선방에 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일선 스님도 예외는 아니라서 쌍계사 선방에서 정진을 하셨다. 어느 삭발 목욕일, 근처 암자에서 수행하는 큰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니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고 했다. 

“수좌, 내 평생 살면서 수행자로서 부끄럼 없이 정말 열심히 살아왔네. 그런데 나이가 들고 보니 중으로서 딱 하나 미련이 남는 것이 있어. 바로 ‘강원(講院)’을 안간 것이야. 선방 정진이야 평생을 두고 하면 되지만, 강원에서 부처님 일대시교를 공부하는 것은 때가 있다네. 그러하니 수좌도 더 늦기 전에 강원 이력을 마치고 다시 선방으로 가시게나.” 

강원생활이 어찌 부처님 경전만 공부하는 것이랴. 4년이란 기간 동안 100여명이 모여 살며 서로 좌충우돌 탁마하고, 총림 산중의 기라성 같은 큰스님들의 가르침을 배우는 그 과정 자체가 더 큰 공부인 것이다. 노스님의 간곡한 그 한 말씀에 일선 스님은 다니던 선방을 그만두고 해인사로 오게 된 것이었다. 

일선 스님은 하루 일과가 철저했다. 거의 하루 종일 붙어있다 보니 서로의 행동이나 습관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정해진 일과는 당연한 것이고 남들이 쉬는 시간에 틈만 나면 법당에 가서 ‘백팔대참회문’을 외우며 절을 하셨다. 바로 옆에 이런 도반이 있으니 자연히 본보기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게는 도반이 아니라 살아있는 선지식이었다. 어느 삭발목욕일이었다. 사중에 있는 목욕탕에 갔는데 신발장에 일선 스님의 까만 고무신이 놓여 있었다. 나도 모르게 한 생각이 일어나, 스님의 고무신을 깨끗이 씻어 말려 놓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스님의 수행을 본받고 싶었던 것이다. 스님은 강원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단 한철도 쉬지 않고 본 결제는 물론, 산철결제까지 하신 분이다. 몇 년 전 암 수술을 하셨을 때도 안거에 빠지지 않으셨다.

나의 해인사승가대학 생활은 순전히 두 훌륭한 도반 스님의 덕분으로 졸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 현진 스님은 많은 책을 펴내 불교계 베스트셀러 작가로서 문서포교에 앞장서고 있고, 일선 스님은 수좌들의 표상으로 지금까지 선방 좌복을 떠나지 않고 있다. 이런 두 스님을 좌우로 모시고 공부를 한 나는 얼마나 큰 복으로 산 것인가? ‘신실하고 지혜로우며 덕 있는 벗을 만나거든, 그와 함께 즐겁고 깨어 있는 삶을 살아가라, 그와 함께 모든 위험으로부터 벗어나라’ ‘선지식과 착한 도반은, 청정한 행을 닦는데 있어 절반이 아니라 전부’라고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이제 삼십여 성상을 지난 나의 수행여정은 도반들과 함께 늘 행복하였으며, 필경에는 도반들의 탁마와 스승의 깨우침으로 불도를 이루리라.

동은 스님 삼척 천은사 주지 dosol33@hanmail.net

 

[1475호 / 2019년 1월 3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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