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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성의 불교학 이야기

기자명 김호성

문헌학적 입장서 용수 저술 여부 규명
'후대 경전서 게송 인용' 투찌의 의혹 해명…논리 비약 없어

대승이십론의 저자는 용수가 아닌가-박상수

문헌학의 전통

7월 21일, 백화도량의 월례발표회. 심재관 선생(동국대 박사과정)의 글〈인도학에 들어서는 열가지 문턱〉을 중심으로 연구의 방법론을 모색하는자리가 되었다. 전통적 방법론과 현대적 방법론, 동양적 방법론과 서양적방법론의 차이와 통합 등을 주로 논의하였다. 그러나 전통적^동양적 방법론을 정확하게 알고서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막연히 주관적이며 특수적이라는 선입견을 노출시킬 뿐이었다. 그렇게 되면 현대적·서양적방법론은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것이 되어 본받아야 할 것이 되지만, 전통적·동양적 방법론은 내버려야 할 것이 된다.

흔히 객관성 여부는 문헌에 대한 비판적 접근 태도에서 확인된다. 그같은문헌학은 현대 유럽의 학문 풍토 속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이 아님을 나는 최근에 이르러 분명히 깨달았다. 예컨대, 지승(智昇)의 《개원석교록(開元釋敎錄)》과 수기(守其)가 책임 편찬하였을 것으로 믿어지는 《고려국신조대장교정별록(高麗國新雕大藏校正別錄)》만을 살펴보라. 전자는 위경(僞經)과 위경이라 의심되는 불전까지 분별하여 철저히 가려낸 목록이며, 후자는 고려대장경 편찬 시에 행한고려초조대장경·거란대장경·송판대장경을 비교 대조한 결과를 기록한 교감기(校勘記)이다. 우리 고려대장경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대장경으로 평가받는 것도 바로 이같은 문헌학적 노력 위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고려대장경을 이룩한 우리 문헌학의 전통은 제대로이어지지 못하고 있다. 현금 우리 학계에서 ‘불교문헌학자'라고 이름할 수있는 연구자가 드문 실정이 그같은 점을 웅변한다. 문헌의 진위(眞僞), 저자의 진위, 성립 연대와 그 과정, 판본의 대조 교감 등을 탐색하여 결정하는 일은 언어·사상·역사·서지학 등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 박상수(朴商洙) 선생이 ‘불교문헌학자'의 입지(立地)를 굳혀가고 있음을 본다. 〈대승이십송론의 저자는 용수가 아닌가〉를 통해서 문헌학적 방법론을 익혀 보자.

문제의 제기

《대승이십송론》(K-1445, T-1576)은 게송으로 이루어진 논서이다. 정종분(正宗分)만을 헤아리면 딱 20송이 되는데, 오언절구(五言絶句)의 형식이다. 그러나 그 앞뒤에 귀경게(歸敬偈) 1송과 회향게(廻向偈) 3송이 더 있으므로 모두 24송이다. 귀경게와 회향게는 모두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형식이다.

범본(梵本), 2종류의 티벳어 역본과 한역이 모두 전하고 있다. 이들 세판본은 게송의 수나 위치 등에서 서로 차이가 있으며 번역본에 있는 게송이범본에는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런 까닭에 서로 다른 텍스트가 아닌가 의심하는 학자도 있었지만 현재는 동일한 텍스트로 인정되고 있다.

이 텍스트와 관련한 문헌학적 문제는 과연 용수의 진저(眞著)인가 하는점에 있다. 티벳어 문헌에 의하면, 용수는 6백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러니그의 이름을 내건 저서가 얼마나 많겠는가. 그 중에서도 《중론(中論)》·《회쟁론(廻諍論)》·《공칠십론(空七十論)》·《육십송여리론(六十頌如理論)》·《광파론(廣破論)》 등의 문헌은 확실히 진저로 인정된다. 오여리론(五如理論)이라 부르는 이들은 모두 중관사상과 관련되며 매우 논리적인 저술들이다. 《대승이십송론》의 경우는 “중관파의 용수나 다른 중관학자의작품이 아니라고 부정할 만한 근거도 없고, 그렇다고 확정할 만한 증거도없다.”는 것이다. 그동안 이 문제를 언급한 학자는 많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재고(再考)해 보아야 할 의문점을 제기한 것은 우계요제(羽溪了諦)와 투찌(G.Tucci)이다.

우계요제는 주로 내용의 측면에서 두가지 문제를 제기한다. 첫째, 용수의저서 답지않게 논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둘째, 《대승이십송론》에는 공사상만이 아니라 유심(唯心)사상이 설해져 있다. 유심사상이 나타난다고 해서 용수의 저서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 우계요제의 생각이다.

다음, 투찌는 다섯가지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가장 본질적인문제는 두가지이다. 첫째는 제9송이 《대보적경》에 나오는 게송이라는 점이고, 둘째는 회향게의 마지막 게송이 《지혜성취(Jnanasiddhi)》의 9장 8송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을 들고 있다. 투찌의 문제 제기가 타당하다면 《대승이십송론》은 용수의 진저일 수 없게 된다. 《대보적경》과 《지혜성취》모두 용수 이후에 이루어진 문헌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해결

우계요제와 투찌는 문제를 제기하였을 뿐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는못하였다. 이에 박상수 선생은 위에서 든 문제점을 하나하나 해명하고자 하였다. 먼저 투찌가 제기한 의혹부터 해명한다. 투찌가 제기한 의혹은 두가지였다.

첫째, 9송이 《대보적경》에 언급되어 있다는 문제는 인용 구절의 출전을《대보적경》 편찬 이후에서 찾지 않고 그 이전에 별행(別行)된 《불설유일마니보경(佛說遺日摩尼寶經)》으로 부터 인용된 것이라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다. 《대보적경》은 전체 49회 77품 120권의 큰 경전이다. 이는 당(唐)시대에 보리류지(菩提流支)가 직접 번역한 경전과 그 이전에 번역된 23부의 경전을 하나로 아우른 것이다. 그러나 9송이 포함된 《불설유일마니보경》은 《대보적경》의 제43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에 해당하는데, 그 이역본중에서는 가장 이른 시기인 A.D. 186년 이전에 이미 번역된 것이다. “2세기 말엽에 번역되었다면 그 원본인 범본은 그보다 더 오래 전에 성립되었을것이다. 적어도 2세기 중반 이전에.”(p.863) 이같은 논리가 타당하다면,A.D. 150년~250년경에 생존한 용수가 충분히 읽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다.

둘째, 《지혜성취》로부터의 인용 문제 역시 그 저술 연대로부터 해결된다. 《지혜성취》는 우디야나의 왕 인드라부티(Indrabhuti)의 저술이다. 근래의 연구는 인드라부티의 생존 연대를 9세기로 보고 있다. “9세기 무렵의저작이라면 이십론에 인용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범본이 9세기 이후에필사되었다면 가능하겠지만, 한역의 경우는 그럴 수 있는 여유가 별로 없었을 것이다.”(p.865) 시호(施護)에 의한 《대승이십송론》의 한역이 A.D.980년에 이루어지는데, 《지혜성취》 → 《대승이십송론》의 범본 → 《대승이십송론》의 한역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불과 1세기 안에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음, 사상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한 우계요제의 의혹에 대한 박상수선생의 견해를 살펴보자.

첫째, 논리적 예봉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중론》의 저자 용수를 염두에 두고서 하는 문제제기다.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이 중관학파의 후계자들에 의해 용수의 저서로서 널리 인용되고 있음이 밝혀짐으로써 용수의저서라는 종래의 정보가 타당한 것임이 확인되었다. 그런데 이 《보행왕정론》 역시 논리적 저술이 아니라 서술적 문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이다.따라서 용수 역시 다양한 문체와 성격의 저술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유심사상의 등장에 대해서이다. 유심사상의 성립에 근원이 된 경전은 《화엄경》의 십지품(十地品)이다. 십지품의 제6 현전지(現前地) 중에서“삼계(三界)는 허망하니 다만 마음으로 지을 뿐이다.”는 구절이 모든 유심사상의 연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용수는 《십지경》을 보았던 것일까? 《십지경》의 주석서인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娑論)》의 저자 역시 용수라고 되어 있다. 현존하는 《화엄경》의 성립은 《대보적경》과 마찬가지로 따로이 유통되던 여러 경전이 하나의 큰 경전으로 집성(集成)된 것인데, 그 최초의 경전이 《십지경》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A.D. 150년 이전에는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김호성, 1996, p.157) 용수가 《십지경》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은 분명해진다. 박상수선생은 이미 이에 대한 정치한 연구를 선보이고 있는데, “《십주비바사론》을 논술상 화엄십지(華嚴十地)의 해석에 국한하여 볼 때, 이 저서가 용수의 저작일 수 있다.”(1990, p.380)

박상수 선생의 결론은 《대승이십송론》이 “용수의 저서일 수 있다”는것이고, 그같은 논리적 추정에 나는 아무런 무리도 발견할 수 없다.

젊은 불교학자들의 속뜰을 들여다 보는 나의 도전은 여기서 멈출 수 밖에없다. 애당초 짐작대로 ‘도전'이고 ‘모험'이었다. 약속했던 ‘장정(長征)'은 되지 못했다. 내 개인적 삶의 변화가 가장 큰 이유다. 나름으로 다들 열심히 하고 있지만, 실제 언급할 만한 연구 성과를 내놓는 젊은 불교학자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도 그 이유의 하나다. 더 힘찬 정진을 다짐해야겠다.

다만 하나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찾아갔던 젊은 불교학자들의 속뜰이 꽤 넓었다는 점이다. 내일의 불교학, 내일의 불교에 빛이 되리라 믿는다. 나는 이제 그들의 세계가 또 어떻게 변화해갈지 관심 깊게 지켜보고 싶다.

그동안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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