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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은 불평등으로 완성된다

기자명 유정길
  • 법보시론
  • 입력 2019.02.01 21:11
  • 수정 2019.02.11 15:28
  • 호수 1476
  • 댓글 6

평등해야만 평화로워진다
‘본인이 식사당번인데 왜 밥을 안 하는 거야?’ ‘담당한 구역을 청소하기로 해놓고 왜 청소안해?’…. 요즘 ‘공동체운동’ 관련 공부를 하면서 대부분 공동체 내 갈등과 불화는 심오하고 거창한 문제가 아니라 공평하게 하기로 한 식사, 설거지, 청소 등과 같이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문제에서 비롯된다는 걸 깨닫는다. 공동체 내에 평등하게 나눈 역할분담을 누군가가 게으름 피우거나 안하게 되면 결국 다른 누군가가 대신 희생하고 고생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도 사소하고 말하기에 자잘해서 그냥 넘어가곤 하지만 해소되지 않고 쌓이면 결국 이후에 터지게 된다. 공동체 구성원이 N분의1로 역할을 평등하게 나누고 그것을 잘 이행해야 공동체가 잘 유지된다.

또 다른 장면이 있다. 한동안 싸우고 갈등하던 부부가 어느 저녁에 서로 마주앉아 진솔하게 긴 대화를 나누고 오해를 풀고 깊은 눈물을 흘리며 서로 화해한다. “내가 잘못했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화가 나서 심한 말을 했어.” “아니야. 내가 당신이 싫어하는 줄 알면서 살피지 못하고 막말을 했어. 내가 더 잘못했어.” 뭐 이런 대화이다. 이 부부는 서로 경쟁적으로 더 잘못했다고 자신이 더 많은 책임자라고 말한다. 아마도 이 대화 이후 부부는 서로 사랑과 평화로운 더 깊은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더 잘못했다고 참회하는 마음, 더 해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이 평화를 만드는 것이다. 

평등에 대한 집착은 평화의 위협이다
네가 50을 하면 나도 50을 한다는 것이 평등의 생각이다. 조직의 공식적 원칙은 당연히 평등해야 하며 그렇게 합의하고 선언돼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 내에서 실제 기계적 평등이 완성될 수 있을까, 대부분 그렇지 못하다. 내가 60을 하면 상대는 40밖에 못하는 경우가 있고, 물론 그 반대도 있다. 내가 더 많이 기여했고 상대가 역할을 제대로 못했다고 추궁하게 되면 서로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한다. 이러한 기계적 평등의 열망이 강할수록 미묘한 불평등을 견디지 못하고 불만이 높아지게 된다. 그리고 불화의 원인이 된다. 53을 한 나는 손해 봐서 억울하고, 47밖에 안한 너는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고 피해를 준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기계적 평등에 대한 집착은 미묘한 불평등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공동체의 갈등과 분란을 만든다. 

공식적 관계에서 주고받는 50대50 또는 N분의1의 평등원칙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러나 개인적 관계 속에서 50을 줄 테니 50을 달라는 것은 거래이지, 공동체적 관계는 아니다. 오늘의 사회는 경제적 이익과 돈, 이해관계에 집착해 사람조차 주판을 튕기며 이익을 보려고 한다. 내가 30밖에 안주면서 남에게 또는 단체에게 70을 요구한다. 나는 40을 주면서 부인에게 60의 역할을 기대하며 결혼한다. 바로 그 40, 20의 간극만큼 불화와 갈등이 커지기 마련이다. 이런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내가 손해를 봤고 억울하다고 생각해 불화가 시작된다. 이처럼 평등에 대한 집착은 반평화의 요인이 된다. 

모든 평등은 불평등으로 완성된다
성서에 “누군가 5리를 가자면 10리를 가주라”는 말이 있다. 5리를 가자고 해서 5리를 가면 상대방을 단순히 도와주는 사람이 되지만, 그의 요구를 넘어서 10리를 가겠다고 하면 이 상황에서 나는 남을 돕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 수처작주(隨處作主)인 것이다. 모든 일에 주인이 되라는 부처님 말씀이다. 상대가 50을 요구하면 나는 70 또는 150을 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상대방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일이라고 받아들여 이 상황에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넘치는 20~100의 분량이 바로 공동체의 자비와 사량의 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50이니 70, 80했다고 계산하지 않는 것, 상대가 30~40을 했다는 계산이 끊어져야 평화가 실현된다. 평등을 넘어서는 삶, 바로 ‘모심’인 것이다.

모든 평등은 이러한 자발적 불평등, ‘모심’을 통해 완성된다. 이처럼 모든 평화는 자발적으로 억울하고 손해를 보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단체가 어려울 때 손해보고 희생하며 해결에 나서는 사람이 누군지를 보면 그 조직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있다. ‘보왕삼매론’의 “억울함을 당해서 밝히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은 바로 평화를 이루는 가르침이다. 부부관계가 평화롭다면 서로 계산하지 않듯이, 남북관계가 평화로우려면 퍼주기만 한다느니, 경제적 이익이라느니 하는 계산을 해서는 안된다.

유정길 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ecogil21@naver.com

 

[1476 / 2019년 2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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