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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불교인문주의자

기자명 이경순

그는 불교를 이 시대의 삶과 고통 속에서 이해하고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는 많은 글을 읽었고 오랜 시간 사색했다. 보석 같이 다져진 문장을 세상에 내놓아 ‘천재’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비승비속의 삶을 선택함으로써 승려라는 보호막과 권위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불교 인문학자로서, 학위나 강단하고는 거리가 먼 독학자의 길을 걸었다. 그는 폐쇄적이며 괴팍하고 예민했다. 친하게 지내다가 싸우고 다시는 안 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고독했고 쓸쓸했으며 항상 울분에 차 있었다. 하지만 불교를 공부하려는 젊은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따뜻했고 지기(知己)의 가능성이 보이는 이들을 귀히 대했다. 17년 전 43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난 일지 스님의 이야기이다.

필자도 수국사 한 구석에 일지 스님이 거주공간이자 연구실로 마련한 작은 컨테이너를 매주 찾았던 학생 중 한명이었다. 4000여권의 책에 둘러싸인 스님의 공간은 비좁았는데 간신히 끼어 앉아 매주 5~6명이 경전공부를 했다. 말이 강독세미나지 사실, 세미나 준비는 스님이 다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스님은 늘 경전 번역뿐 아니라 본인만의 해석이 담긴 글을 미리 써왔다.

그의 글은 특유의 박람강기가 묻어났으며 동시대 불교의 가장 깊숙한 곳에 질문을 던지는 문장이었다. 불교계에서 그런 글은 낯설고 신선했다. 읽는 이에게도 묵직한 자발적 성찰을 요구하고 있었기에, 그의 문장은 언제나 그야말로 과제로 남겨졌다. 낡은 한문 번역 투에 익숙하고 경전 자구 해석에도 벅차했던 우리들에게 스님은 경외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스님은 그 세미나를 준비하면서 아마 전날, 그리고 그 전날도 잠 없이 책상 앞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을 터였다. 스님은 젊은 학생들 앞에서 팽팽히 긴장하고 기대에 넘쳐 열정적으로 세미나에 임했다.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주는 이들을 무척이나 그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스님이 지병으로 병원을 오가게 되면서 세미나는 열리지 못했던 것 같다. 스님의 병이 심상치 않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던 그즈음의 어느 날, 부고를 들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여름날이었다. 스님이 수국사 컨테이너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는데 그것도 돌아가신 지 2~3일이 지나서라고 했다. 결국 혼자 병을 이기려하다가 아무도 없는 그 좁고 습한 곳에서 세상을 떠나다니! 소식을 들은 필자를 포함한 지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그 충격으로 그날 밤 빗속에 남산을 몇 바퀴 헤매었던 기억이 아프고 쓸쓸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일지 스님은 세상을 떠났고 격정 넘치던 불교 인문주의자의 자취도, 그의 글에 대한 상찬이니 어떠한 평가도, 사생활에 대한 풍문도 급속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다만 스님을 알았던 그 누구라도 안타까움이 마음 한편에 무거운 짐으로 남았다고 짐작된다. 그의 외롭고 급작스런 죽음이 너무나 통탄스럽고 죄책감을 불러일으켰다. 무엇보다 그의 글을 이제 읽을 수 없고, 현대 불교지성사에서 가벼울 수 없는 그의 존재가 이렇게 아무런 평가도 없이 잊혀 간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일지 스님이 타계한 지 17년이 흘렀다. 이제 일지 스님의 컨테이너 연구실을 찾았던 이들은 돌아가신 그해의 스님 나이를 훌쩍 넘어섰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달 일지 스님의 글이 새롭게 엮어져 책으로 나왔다. (‘불교인문주의자의 경전읽기’ 어의운하) 책 속 일지 스님의 글과 그곳에 담긴 메시지는 20여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낯설고 신선하며, 영원한 불교청년의 에너지로 빛난다. 척박한 불교 인문학계의 풍토 속에서 이 시대 불교의 의미를 존재 전체로 사유했던 흔적을 소중히 더듬어봐야 할 것이다.

이경순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학예연구사 glib14@korea.kr

 

[1477 / 2019년 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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