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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⑰

진흥왕, 한강 유역 점령으로 중국과 직접교류·삼국통일 초석 마련

고구려 쳐서 한강 상류 접수
백제 몰아내고 하류도 점령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 획득
서해 거쳐 중국과 직접 교류

정복 전쟁 통해서 영토 확장
4곳에 순수비 세워 이를 기념

중국서 사리·경전 직접 수입
불교를 이념으로 왕권 강화 

​​​​​​​궁궐을 짓던 터에 사찰 건립
국가불교 상징적 의미 담겨

경주 황룡사터 전경.                                                                                                                                                                                                           문화재청 제공
경주 황룡사터 전경. 문화재청 제공

신라 제24대 진흥왕대(540〜576) 초기인 지소태후(只召太后)의 섭정기는 병부령 이사부(異斯夫)의 보필을 받아 신라가 대내외적으로 크게 발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한 시기였다. 대내적으로 법흥왕 때에 착공한 흥륜사를 준공하고, 이어 국사(國史)를 편찬함으로써 왕권의 위상과 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백제와의 동맹관계를 유지하여 고구려의 남침을 억제하면서 군사조직을 확대 정비함으로써 뒷날의 대대적인 영역확장 사업에 대비한 국력을 신장시키는 데 노력을 집중하였다. 

신라의 한강유역 영역확장 시도는 진흥왕 11년(550) 고구려와 백제의 두 나라가 서로 치열하게 공방전을 거듭하던 도살성(道薩城, 충북 괴산이나 충남 천안지역으로 추정)과 금현성(金峴城, 충북 진천이나 충남 전의지역으로 추정)에 대해 두 나라의 군대가 피로해진 틈을 타 일시에 점거하면서 단서를 열었다. 바로 이 무렵에 세워진 ‘단양신라적성비’를 통해서도 남한강 상류지역까지 진출하는 전과를 올리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흥왕은 12년(551) 정월 18세 성년의 나이로 친정(親政)을 시작하자, 나라를 새로 연다는 뜻의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법흥왕 23년(536) 처음으로 마련된 연호 ‘건원(建元)’을 16년 만에 폐기하고, ‘개국’으로 바꾼 것은 가까이는 지소태후의 섭정으로부터 벗어나 진흥왕이 친정을 시작했다는 의미이며, 그때까지 계승해 오던 법흥왕의 정책을 바꾸어 새로운 국가를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진흥왕이 추구한 새로운 국가의 정책은 외정(外征)과 내치(內治)의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그 가운데 먼저 분출된 것은 외정, 즉 정복 전쟁을 통한 영역의 확장 정책이었다. 진흥왕 12년(551)에 백제 중흥의 영주 성왕(聖王, 523〜554)과의 공동작전으로, 귀족 사이의 내분에 의하여 방위력이 약화된 고구려를 쳐서 백제는 고구려가 점유하고 있던 한강 하류지역을 공취한 반면, 신라는 죽령 이북 고현(高峴, 철원 북쪽의 곡산이나 철령?) 이내의 한강 상류지역 10군을 점령하였다. 신라는 그러나 2년 뒤에 한강 하류 지역을 점령한 백제의 군대까지 다시 축출하여 한강유역 전부를 독점하고 한성을 중심으로 신주(新州, 한산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이에 격분하여 신라를 직접 공격하여 온 백제의 성왕을 관산성(管山城, 옥천) 전투에서 전사시켰다. 신라와 백제의 공동북벌의 효과는 신라에 의해 독점된 것이다. 이로써 120여 년간이나 계속되어 오던 두 나라의 동맹은 마침내 깨져 버렸으며,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을 받는 상황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신라의 한강유역 점유는 앞서 개발된 풍부한 인적·물적 자원을 획득했다는 점과 서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통할 수 있는 문호를 얻게 되었다는 점에서 뒷날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하였다는 의의를 가진 것이다. 

진흥왕은 한강 유역을 차지한 여세를 몰아 16년(555) 북한산에 순행하여 강역을 획정하였으며, 이어 다음 해에는 비열홀주(比列忽州, 안변)를 설치하여 옛 동예 지역까지 점거하였다. 또한 18년(557)에는 국원소경(國原小京, 충주)을 설치하고, 귀족의 자제와 6부의 부호들을 이주케 함으로써 소백산맥 이북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삼아 한강유역 지배의 기반을 확실하게 구축하였다. 한편 낙동강 서쪽 가야 지역으로도 진출을 모색하여 16년(555)에 비사벌(比斯伐, 창령)에 완산주(完山州, 또는 下州)를 설치하여 낙동강 서쪽 가야 지역으로의 진출을 모색하였다. 진흥왕 22년(561)에 세워진 ‘창령 진흥왕척경비(昌寧 眞興王拓境碑)’에 의하면 진흥왕과 갈문왕, 그리고 대등을 비롯한 중앙의 고위 관료, 군주·당주·도사 등의 지방관, 외촌주 같은 지방의 재지세력가 등이 참여한 대규모의 군신회맹(君臣會盟)을 개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바로 그 다음해(562) 단행되는 고령의 대가야(大加耶) 정벌을 위한 준비 모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서 가야가 반란하여 섬멸한 것으로 기록한 것은 앞서 15년(554) 백제의 성왕이 신라를 공격할 때 가야의 군대가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대가야를 비롯한 6가야연맹을 정복한 뒤 진흥왕 26년(565)에 완산주를 폐지하고, 대야주(大耶州, 합천)를 설치함으로써 신라는 한강 유역과 함께 비옥한 낙동강 유역을 완전히 차지하게 되었다. 그리고 동북 방면으로 멀리 함흥평야에까지 진출하고 있었는데, 이 같은 진흥왕의 활발한 정복사업은 창령(昌寧)·북한산(北漢山)·황초령(黃草嶺)·마운령(磨雲嶺) 등 4곳에 세워진 순수비(巡狩碑)가 웅변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한편 한강 유역을 차지함으로써 서해를 거쳐 중국과 직접 통할 수 있는 문호를 갖게 된 신라는 진흥왕 25년(564)부터 비로소 중국 남북의 여러 왕조와 사절을 교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때까지 신라는 한반도 동남쪽에 편재하여 중국대륙에 사절을 파견하기 위해서는 고구려나 백제의 사신 행차에 수반을 의뢰치 않을 수 없었다. 앞서 나물마립간 26년(381) 전진의 부견(苻堅)에 사신을 파견할 때는 고구려의 사절을 따라 갔으며, 법흥왕 8년(521) 남조 양무제에게 사신을 파견할 때는 백제의 사절을 따라갔던 전례도 있었다. 그런데 진흥왕 25년에 북제에 사신을 직접 파견한 이후부터는 거의 매년 중국의 북조인 북제(北齊)와 북주(北周), 남조인 진(陳)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뒷날 진평왕대(579〜632) 이후 중국대륙을 통일한 수(隋)·당(唐)과 친선을 도모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견제하고, 마침내 당의 힘을 빌려 다른 두 나라를 멸망시켜 3국을 통일하게 된 기초가 되었다. 그런데 중국과의 직접적인 교통로의 확보는 정치적인 면만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 불교를 중심으로 하는 중국의 선진문화를, 이전 같은 고구려와 백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수입케 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하였다. 일찍이 진흥왕 10년(549) 봄에 양의 사신이 유학승 각덕(覺德)과 함께 불사리를 가져옴에 왕이 백관에게 흥륜사 앞길에서 받들어 맞이하게 한 것을 효시로 하여 26년(565) 진의 사신 유사(劉思)와 승려 명관(明觀)이 불교의 경론 1700여 권을 가져옴으로써 신라는 불사리와 불교경전을 함께 갖추게 되었다. 중국과의 불교 교류는 진평왕 대 이후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서학(西學)’이라 하여 중국에 유학하는 자의 대부분이 승려였다. 이들은 또한 종교와 사상으로서의 불교뿐만 아니라 한문과 유교를 포함한 중국문화 수입의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친정을 선포한 진흥왕에게는 영토 확장과 대외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하는 한편 개국이라는 연호의 표현에 걸 맞는 왕권의 위상을 드높이기 위한 시책으로 군사조직 정비 이상의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에 진흥왕이 국왕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한 방법으로 우선 선택한 것은 새로운 왕궁과 장려한 사찰의 건설이라는 토목사업이었다. 사로국 시기부터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기존의 왕궁인 월성(月城)은 경주 분지 남쪽 한편의 남천(南川, 蚊川) 가에 치우쳐 자리하여 앞서 자비마립간대(458〜478)부터 방리제(坊里制)가 시행되고 2개의 시장(市場)이 설치될 정도의 도시로 성장한 왕경의 궁궐로서는 부적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한껏 고양된 왕권과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수용하기에는 공간적으로 너무 비좁고 초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왕궁을 왕경의 중앙부로 옮겨 그 규모와 외양을 한층 장대하고 화려하게 치장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고, 나아가 왕궁뿐만 아니라 그를 주축으로 하여 정연한 방리제와 도로망, 그리고 사방 화물의 집산 장소인 시장과 왕실불교·국가불교를 상징하는 거대한 불교사찰을 갖춘 새로운 왕경의 건설을 기획하게 되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진흥왕 14년(553) 2월 왕이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도록 하였는데, 공사를 추진하던 도중에 황룡(黃龍)이 나타나서 불교 사찰로 고쳐서 짓도록 하고, 사찰 이름을 ‘황룡사(皇龍寺)’라고 하였다는 설화를 전하고 있다. 이로써 새로운 궁궐의 창건 작업은 실제로 추진되다가 어떤 특별한 사유로 사찰의 창건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그 바뀐 이유로서 황룡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는 그 자리가 원래 많은 물이 고여 있던 저습지였다는 사실과 뒷날 사찰의 이름을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황룡사(皇龍寺)’로 이름 지으면서 창건연기설화로 부회된 것 같다. 그 결과 습지는 용신(龍神)신앙과 결부되어 중앙을 의미하는 수식어가 붙은 황룡(黃龍)이 머무는 신성한 용궁(龍宮)으로 설정되었고, 또한 그 용궁의 북쪽과 남쪽 지역에 각각 분황사와 황룡사가 창건되면서 ‘전불시대7처가람(前佛時代七處伽藍)’의 터로 신앙되기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황룡사의 장륙존상이 자리한 곳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이 설법하던 연좌석(宴坐石)이라고 설명되면서 신성시되었다. 실제 황룡사 자리는 경주분지의 중앙지점으로서 동서에 위치한 명활산과 서악(선도산), 남북에 위치한 남산과 금강산을 각각 연결하면 두 선이 만나는 십자로 지점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따라서 경주분지의 거의 중앙부에 새로운 궁궐을 건설하려고 한 것은 강력한 왕권의 위상에 걸맞는 토목사업으로 구상되었을 만 하였다. 새로운 궁궐의 창건을 시도했던 시기를 전후하여 진흥왕 12년(551)과 15년(554) 명활산성을 수축·개축하였던 사실도 새로운 궁궐의 창건과 함께 추진된 왕경의 도시계획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결국 새로운 궁궐의 창건은 성사되지 못하였지만 왕경 주위 산성인 명활산성·남산산성·서형산성(선도산성)의 수축공사는 뒷날 진평왕 13년(591)과 15년(593)에 재개되고 있었다. 왕경의 중심지점에 강화된 왕권의 위상에 걸맞은 새로운 궁궐을 창건하려는 계획을 갑자기 바꾸어 새로운 사찰을 창건한 것은 불교를 새로운 지배이념으로 삼아 왕권의 강화를 추구하는 국가에서 불교 사찰이 바로 궁궐 못지  않은 왕권의 상징이자 국가불교의 상징으로서의 의미를 갖는 시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새로운 궁궐의 창건공사가 중단되고, 갑자기 새로운 사찰의 창건공사로 바뀌게 된 배경으로는 진흥왕 12년(551) 한강상류 지역의 고구려 10군을 점령한 것을 계기로 하여 발생한 고구려 승려 혜량(惠亮)의 망명과 북방불교의 왕즉불(王卽佛)사상의 전래, 그리고 혜량의 국통(승통) 임명과 승관제의 정비 등의 사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77 / 2019년 2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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