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스콧 니어링의 죽음
103. 스콧 니어링의 죽음
  • 김정빈
  • 승인 2019.02.26 11:12
  • 호수 147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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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처럼 높이, 산처럼 강하게,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부 피하지 않으면 안이한 삶 전락
안락을 타락케 하는 도구로 생각
죽을 땐 의사없이 죽고 싶다는 등
30가지 지침 꼼꼼히 챙겨서 남겨
세속적 삶이지만 고승 지혜 보여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스콧 니어링(Scott Nearing, 1883~1983)은 고등학교 때 알렉산더, 카이사르, 나폴레옹, 한니발 등을 찬양하는 글을 썼다. 그런 그를 그의 부모는 육군사관학교에 보내려 했지만 우연한 일로 눈에 장애가 생기는 바람에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제학부에 진학하게 된다. 

대학을 졸업한 뒤, 스콧은 시간당 11센트를 받으며 채굴된 석탄에서 점판암 부스러기를 골라내는 아동들을 보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았지만 그가 아이들을 위해 해줄 일이 별로 없었다. 경제적 분배 문제에 대해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었던 그는 시간강사에서 조교수로, 조교수에서 전임교수로 승진해야 하는 사정 때문에 ‘쇄탄보이’ 문제를 학계에 거론할 수 없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하며, 자립하기 위해서는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보았다. 스콧은 곧 실천에 들어갔다. 그는 경제 문제를 돈을 벌어서 해결하기보다는 가진 돈을 덜 쓰는 방법으로 해결하는 방향에서 풀려고 했다. 자신이 샀던 공채의 값이 오르자 난로에 집어 던졌다. 자신이 샀던 임야가 열 배로 오르자 절반 가격으로 팔았다.
많은 돈을 벌어 좋은 데 쓰면 좋지 않겠느냐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그는 대답했다. “안락보다 더 인간을 타락하게 하는 것은 없다. 부를 피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분명 안이한 삶에 말려들었을 것이다.” 그는 현시대의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시간이 흘러 스콧 니어링은 펜실베이니아대학 경제학 교수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원인 그의 급진적인 견해는 대학 당국에 의해 파괴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져 대학으로부터 해임 통고를 받게 되었고, 사법당국은 그를 간첩 혐의로 기소했다. 판결은 무죄로 나왔지만 그 후유증은 컸다. 그는 아내로부터 이혼당했고, 미국 공산당과도 의견이 맞지 않아 출당을 당했다.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그는 더욱 강해졌다. 스콧은 마흔다섯 살에 스무 살 연하인 헬렌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된다. 그는 헬렌과 함께 버몬트와 메인 주에서 농장을 개간하기 시작했다. 그가 그곳에서 아내와 함께 지키며 살아간 신조들은 다음과 같다.

“간소하고 질서 있는 생활을 할 것. 미리 계획을 세울 것. 일관성을 유지할 것. 꼭 필요치 않은 일을 멀리할 것.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할 것. 자연과 사람 사이의 가치있는 만남을 이루어갈 것. 노동으로 생계를 꾸릴 것. 쓰고 강연하고 가르칠 것. 원초적이고 우주적인 힘에 대한 이해를 넓힐 것. 끊임없이 배우고 익혀 통일되고 원만하며 균형 잡힌 인격체를 완성할 것.”

생활의 3분의 1은 노동하고, 3분의 1은 독서하며, 나머지 3분의 1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과 대화하며 지낸 스콧 니어링은 나이 아흔두 살이 되던 해에 마지막 책을 저술했다.

처음 농장을 마련한 지 한두 해 뒤에, 스콧 니어링 부부는 장의사에게 돈을 주고 미리 화장을 준비시켰었다. 1968년에 그는 자신의 죽음을 대비해 30가지 지침을 마련해 두었는데,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집에서 죽고 싶다. 나는 의사없이 죽고 싶다. 나는 지붕이 없는 열린 곳에서 죽고 싶다. 나는 단식을 하다가 죽고 싶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예민하게 느끼고 싶다. 따라서 어떤 진정제, 진통제, 마취제도 필요 없다. 나는 주사, 심장충격, 강제급식, 산소주입, 수혈을 바라지 않는다. 내가 죽은 다음에 회한이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남은 이들은 조용함, 위엄, 이해, 기쁨, 평화로움을 갖춰 죽음의 경험을 나누기 바란다. 내가 죽은 뒤, 되도록 빨리 내 친구들이 내 몸에 작업복을 입혀 침낭에 넣은 다음에 스프루스 나무나 소나무 판자로 만든 보통의 나무상자에 뉘기를 바란다. 상자 안이나 위에 어떤 장식이나 치장도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처리한 내 몸은 내가 요금을 내어 회원이 되어 있는 화장시설로 보내 달라. 어떤 장례식도 열려서는 안 된다. 장례 과정을 설교사, 목사, 그 밖의 직업 종교인이 주관해서는 안 된다. 나를 태운 재는 헬렌이나 다른 친구가 거두어 스피릿만을 바라보는 우리 땅의 나무 아래에 뿌려주기 바란다.”

100세 생일을 한 달 앞두고 그는 고형음식을 끊고 과일 주스만을 마셨으며, 얼마 후부터는 물만을 마셨다. 1983년 8월 24일 아침, 그는 침상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래를 조용히 읊조렸다. “나무처럼 높이 걸어라. 산처럼 강하게 살아라. 봄바람처럼 부드러워라.”

평생의 동지이자 아내인 헬렌이 옆에서 말했다. “몸이 가도록 두어요. 썰물처럼 사세요. 같이 흐르세요. 당신은 훌륭한 삶을 살았어요. 스콧은 “좋~아!”하며 숨을 길게 내쉬고 나서 더이상 숨을 쉬지 않았다.

그 사람의 삶이 훌륭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에 대해 제삼자는 판단하기 어렵다.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는 사람도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의미이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위인으로 칭송받는 사람이지만 그 내면은 비열한 경우가 없지 않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 가운데 사람의 진실성이 드러나는 한순간이 있다. 죽음을 맞을 때가 그때이다. 생사를 해탈했노라고 자부하던 고승대덕이 죽음을 비루한 모습으로 맞는 경우가 없지 않고, 위대한 인물로 추앙되던 인물이 죽음 앞에서는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다만 진정한 고승대덕, 참으로 위대한 인물만이 죽음을 초연하게 맞는다.

스콧 니어링은 세간에서 세속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그의 세속적 진실에의 충실성은 출세간에서 평생에 걸쳐 수행에 전념해온 고승대덕의 그것에 비해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는 세속의 성자, 세간의 출세간자였다. 그가 참으로 위대한 인물이라는 점을 그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증명했다.

제 명대로 살다가 가는 것을 고종명(考終命)이라 하고, 깨달음을 성취한 성자가 죽음에 의해 끌려가지 않고 스스로 죽음을 향해 걸어 들어가는 자유로운 죽음을 반열반(般涅槃)이라 한다. 고종명은 세속적 죽음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고, 반열반은 출세간적 죽음의 가장 고귀한 모습이다.

죽음을 향해 스스로의 의지로 걸어들어간다는 점에서 반열반은 일종의 자살이다. 그러나 그 자살은 여느 자살과는 다르다. 여느 자살은 죽음을 택하지만 실제로는 삶을 택하는 것이다. 그는 살고 싶지만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죽음을 선택한 것일 뿐이다.

그렇지만 반열반에는 삶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다. 잘 마쳐지는 삶으로서의 반열반은 어둡고 컴컴한 죽음이 아니라 밝고 빛나는 죽음이다. 나이 백 살에 스스로 음식을 끊고 죽어간 스콧 니어링. 그 나이에 그런 강인하고 초연한 의지를 가질 수 있다니! 놀랍고도 놀라운 그의 죽음을 보면서 나의 진실성이 어느 수준에 있는지를 겸허한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김정빈 소설가 jeongbin22@hanmail.net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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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은영 2019-06-27 23:04:10
너무나 아름다운 삶이네요! 이렇게 살다 가고 싶습니다~ 진짜 신성을 깨달은 삶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