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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수행 차춘희-상

기자명 법보

30대부터 이뭣고 화두 정진 중
이유도 없이 직장선배가 미워져
출근하는 상황조차 스트레스로
정신분석 ‘그림자 이론’과 대면

69, 무애광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말했다. 이 문구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귀감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피상적으로 가볍게 일상생활에서 쓰곤 한다. 또한 상대방의 태도나 말에 대해서도 보이는 그대로 가볍게 “너 자신을 알고 있니?”라고 하며 상대적 비교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과 ‘알라’의 단순한 단어에 참으로 귀하고 심오한 뜻이 있음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가 ‘나’ 또는 ‘삶’ 자체를 상대적이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건 지극하게 나의 개인적인 의견일 수도 있겠다. 

오래전 내가 40대 초반일 때 경험이다. 나는 그 당시 앞을 향해 달리다, 멈추어 서서 주변과 나를 보고 숨을 고르던 때였다. 못 보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지식으로만 읽던 경전들을 되짚어 보기도 했다. 그 시기 참선도 다시 시작했다. 

사실 30대 후반에 처음 받은 화두는 ‘이뭣고’였다. 그런데 다시 참선을 시작하면서 받게 된 화두는 ‘만물은 하나로 돌아가는 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였다. 하지만 이 화두는 쉽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자꾸 부딪히는 느낌이 들었다. 

한 사찰의 템플스테이에 참여하는 기회를 만났다. 마침 담당 법사 스님에게 화두를 드는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때 스님께서는 오히려 처음에 받았던 ‘이뭣고?’를 다시 들어보라고 조언해주셨고 그때부터 ‘이뭣고?’ 화두를 다시 들면서 정진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매주 토요일이면 철야정진도 했다. 수행이 순일하게 이어지고 있다는 나름의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던 중, 어느 날부터인가 이유 없이 거슬리고 미운 사람이 생겼다. 내가 미워할 이유가 없고 더구나 개인적으로 직장 선배일 뿐 거의 왕래가 없는 사람이었기에 나의 정신은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나는 살아가면서 그 누구를 지독히 미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나에게 정신적 또는 물질적으로 스트레스를 준 사람조차 이해하려고 애썼으므로 그 상황이 더욱 힘들었다. 
견디려는 나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 사람의 목소리, 몸짓, 웃음소리, 심지어는 발소리까지도 내게는 스트레스였다. 당시의 나는 그러한 상황 때문에 출근하는 것조차 스트레스였고, 더구나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더욱 혼란스러웠다.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아볼까 망설일 정도로 정신상태가 심각했다. 

사실 나는 대학에서 교육심리를 전공했고 교육학 박사가 되어 교직에 몸담고 있었다. 소위 심리학 언저리를 기웃거리면서도 이유 없는 미움에 시달리는 존재의 가벼움이 견딜 수 없었다. 수업 이외의 시간에는 연구실에 그냥 있곤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수업 준비를 하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프로이드의 제자인 ‘융’의 ‘그림자 이론’이 생각났고, 허겁지겁 책을 찾아 다시 숙독했다.

‘아하!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나는 내 머리를 주먹으로 때렸다. 비로소 모든 상황이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융은 이렇게 주장했다.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빛의 반대쪽인 내 몸 뒤에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자신의 그림자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볼 수 있는 내 모습도 나이고, 내가 못 보는 내 그림자 역시 나인 것이다. 다만 그림자는 나의 심층 깊은 곳에 숨어있는 또 다른 ‘나’, 즉 무의식 속에 숨어 있으므로 스스로 ‘나’임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무의식 속의 ‘나’는 내가 인정하기 싫고, 그 모습이 또 다른 ‘자아’라는 사실조차 직면하기 싫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또는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또 다른 나를 보면서도 발견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나’는 내가 되고 싶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되지 못하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이유란 처해 있는 상황일 수도 있고, 사회가 지향하는 도덕이나 가치관에 위배 되는 ‘나’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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