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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논리의 그물 인드라망

불교는 논리의 종교이며 인드라망은 논리의 그물

불성은 우리 안의 잠재력에 불과
이해 능력과 이해하는 것은 달라
창조란 무지에서 앎으로의 과정

법은 논리의 그물이다. 수많은 법은 서로 모순이 되지 않도록 촘촘한 논리의 그물로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은 유전무죄 무전유죄라고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논리이다. 법정에서는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데 그 무기는 사실(증거)과 논리이다. 사실들을 논리라는 실로 짜 상대방이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을 짠다. 예를 들어 알리바이란 ‘같은 사람이 동시에 두 곳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 경전에서는 그런 일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실제 세계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설사 신앙심이 깊은 판사일지라도 그런 일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런 주장을 하다가는 교주도 감옥에 간다. 모르몬교 교주 조셉 스미쓰는 소도시 시장이었는데, 자기를 일부다처제를 하고 모르몬교 신정을 도모한다고 비판한 지역신문을 폐쇄하고 계엄령을 선포했다 일리노이 주정부에 의해 반역죄로 투옥되었다가 감옥에 난입한 폭도들에게 총 맞아 죽었다. 작가 크라카우어(John Krakauer)는 이런 내용으로 ‘천국의 깃발 아래서(Under the Banner of Heaven)’라는 책을 써 모르몬교를 비판했지만 명예훼손 혐의로 감옥에 가지 않았다. 미국헌법이 공리로서 보장하는 의사표현의 자유의 힘이다.)

솔로몬은 한 갓난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다투는 두 여인 중 누가 어미인지 알 수 없자, 아이를 칼로 두 쪽을 내 한 쪽씩 나누어주라고 한다. 그러자 한 여인은 그리해달라고 하고, 한 여인은 아이를 포기하겠다고 한다. 솔로몬은 포기하겠다는 여인이 친모라고 판결한다. 이는 친모라면 자식을 잃을지언정 죽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당시 유대법에 의하면 누구 것인지 증명이 안 되면 반씩 나누지만, 그리고 진짜 주인도 억울하지만 반이라도 가져갈 터이지만, 어미라면 물건이 아닌 사랑하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 친권을 포기할 것이라는 논리가 깔려있다.

인과와 연기라는 것은 논리이다. 인드라망은 논리의 그물이다. 이것이 논리의 그물인 한 불교는 논리의 종교이다. 부처 그리고 깨달음이 불가사의한 존재라면 이는 너무 높은 계단을 올라갔기 때문이다. 무한한 윤회란 무한한 계단을 오르는 것이다. 생명이 생겨난 적이 없다면 무한한 과거에 무한한 계단을 오른 것이다. 물론 한동안 오르락내리락 했을 수도 있지만….

불가사의하게 보이는 수학정리도 가장 단순한 사실들 위에 구축되어 있다. 1+1=2라는 걸로 출발해 홀수끼리 곱하면 홀수, 짝수끼리 곱하면 짝수라는 조금 더 복잡한 걸로 옮겨가고, 다시 더 복잡한 걸로 옮겨가는 과정을 여러 차례 되풀이하면서 난제 중의 난제이던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증명되었다. 

다음단계는 전단계만 알면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단계가 멀어질수록 더 어려워진다. 예를 들어 200번째 단계는 20번째 단계에 비해서 무척 어렵다. 하지만 가까운 단계는 상대적으로 크게 어렵지 않다. 계단(사다리)을 올라가는 것과 같다. 계단이 천만 계단일지라도, 한 번에 한 계단을 올라가는 것으로 끝까지 올라갈 수 있다. 한 걸음에 다 올라가거나 10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불가능할지라도, 다음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항상 가능하다. 세상에는 무수한 계단(사다리)이 있고, 계단들은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다. 그 계단(사다리)들을 붙잡아 하나의 통일된 구조로 얼기설기 만드는 시멘트는 논리이다. 고등수학은 상상을 초월하게 어렵지만 이런 단계(계단)들로 연결되어 있다. 퀀텀점프는 없다. 

불성이란 이런 가능성을 말한다. 우리가 태어날 때 이런 수학을 이해할 능력을 타고 났지만, 다른 일을 하면 알 길이 없다. 초중고 대학에 가 공부할 때 비로소 알게 된다. 실제로 에드워드 위튼은 학부에서 역사학과 언어학을 공부하고 대학원에서 처음에는 경제학을 공부했지만 후에 수학을 공부해 세계적인 수학자가 되었다. 상대성이론을 연구했으며 양의 에너지에 대한 공으로 수학계의 노벨상에 해당하는 필즈(Fields) 상을 받았다. 만약 그가 수학을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그냥 문인으로 남았을 것이다. 불성도 이와 같다. 우리 안에 있는 잠재력이지, 완성된 형태의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돌 속에 조각작품이 존재한다’는 말은 가능성을 말할 뿐이다.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돌은 조각품이 아니라 그냥 돌일 뿐이다. 돌이 조각품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조각가의 손에 달려있다. (마침내 세상의 빛을 보더라도 맘에 안 들면 망치질을 당해 산산조각 나고 만다.) 조각가 자신도 작품이 완성될 때까지는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모른다. 그림도 마찬가지이다. 화폭과 물감은 준비되어 있지만 어떤 그림이 나올지는 화가도 모른다. 이미 다 알고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이다. 부처도 마찬가지이다. 미리 다 알고 있다면 부처가 가진 오묘한 매력과 가슴 설레게 하는 매력이 다 사라질 것이다. 낯섦과 의외성이 삶에 감칠맛을 더한다. 이 점에서, 무지는 고통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즐거움도 가져온다.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은 무료함이다. 다 할 수 있으면 더 큰 무료함이다. 창조란 무지에서 지(知)로의 과정이다. 낯선 세계와의 만남이다. 불가능에서 가능으로의 변화이다.

물고기 개 침팬지가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면 인간 정도의 의식과 지능을 얻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인간이 석가모니 부처를 배출할 때까지 35겁, 즉 35억 년이 걸렸다. 같이 출발했지만 어떤 생물은 아직도 짚신벌레나 물고기이고, 어떤 생물은 곰팡이나 은행나무이다. 잘했자 침팬지이다. 진화의 길은 멀고 멀다. (너무 멀어 다 잊었다. 어느 누구도 그 시절을 기억하지 못한다.) 어느 생물이나 인간과 같은 의식과 지능을 가질 가능성은 있지만, 실제로 그리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50억 년 후에 태양이 사라지고 지구가 사라지면 그럴 가능성도 같이 사라진다. 곰팡이가 우주 공간에 포자를 날려 다른 행성에 안착을 하고 진화를 해 인간이 되고 천신만고 끝에 부처가 되더라도 지구상의 곰팡이 시절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구인은 그 어느 누구도 겨우 6500만년 전의 공룡시절조차 기억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78 / 2019년 2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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