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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3대 총무원장 자운 스님-하

조계종 단일계단·이부승제 토대 닦은 한국불교 대표 율사

오대산 적멸보궁서 문수기도 뒤
계율 복원해 한국불교 중흥 발원
봉암사결사 때 보살계 수계법회
1953년 통도사서 첫 비구계 수계
1981년 초대 전계대화상에 추대
수계 전법제자만 10만여명 달해

“자운 스님은 계율뿐 아니라 용성문중, 해인사, 동국대, 조계종 등에서 탁월한 업적을 남긴 대선지식입니다.” (조계종 명예원로의원 도문 스님)
“비구니스님치고 자운 스님에게 계를 안 받은 스님이 없을 겁니다. 비구니스님들이 당당하게 계를 받을 수 있는 이부승제도도 율사스님이 만든 것입니다.”(진관사 주지 계호 스님)
“자운 스님은 율사는 율사인데 막힌 율사가 아니었습니다. 율이라는 것이 필요하지만, 율은 스님들을 탄압하고 억제하는 것이 아니고 질서와 조화의 역할이라는 측면을 알게 해준 큰스님이었습니다.” (권기종 동국대 명예교수)

조계종 13대 총무원장을 지낸 자운 스님은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뛰어난 율사이자 수행자로서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계율의 중요성이 희박해진 한국승단에 지계가 수행의 근본임을 일깨웠으며 한국불교 계맥 복원을 위해 헌신했다. 조계종사에서 일대 사건으로 꼽히는 1981년 단일계단 시행도 자운 스님의 원력에서 비롯됐다. 

자운 스님은 1911년 3월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던 스님은 1926년 불심 깊었던 어머니를 따라 오대산 상원사를 찾았다 불연을 맺었다. 법회에서  해인사 혜운 스님이 들려준 ‘백천삼만육천일 불급승가반일한(百千三萬六天日 不及僧家半日閒, 세속의 100년 3만6000일보다 출가의 반나절이 더 낫다)’이라는 순치황제의 출가시를 듣고 크게 발심했다. 스님은 이때부터 출가자의 삶을 동경했다. 이듬해 다시 상원사에서 혜운 스님을 찾았지만, 스님은 이미 해인사로 거처를 옮긴 뒤였다. 자운 스님은 그길로 해인사까지 걸어 혜운 스님을 찾았다. 그리곤 팔만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해인사 장경각에서 1만배 정진을 하고 비로소 혜운 스님과 사제의 인연을 맺었다. 이때 받은 법명이 성우였다. 

스님은 1934년 범어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졸업하고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일봉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와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해인사, 범어사 선원에서 수선 안거했으며 1935년 울진 불영사에서 영암 스님과 함께 “불교를 일으키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장자불와로 3년간 결사를 진행했다. 그렇게 용맹정진을 이어가던 스님은 1938년 도봉산 망월사에서 당대 선지식으로 추앙받던 용성 스님으로부터 전법게와 ‘자운’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사를 해결하겠다는 자운 스님의 원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님은 1939년 4월 오대산 중대 적멸보궁에서 하루 20시간씩 100일간 문수기도를 봉행했다. 이때 자운 스님은 문수보살을 친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자운대율사원명탑비명’에 따르면 문수기도 99일째 되던 날 문수보살이 나타나 “선재라 성우여, 이 나라 불교의 승강(僧綱)을 회복토록 정진하라”면서 계척(戒尺)을 건네주고 “견지금계(堅持禁戒)하면 불법재흥(佛法再興)하리라”고 했다. 이런 기연은 자운 스님이 평생 율장연구에 천착하는 계기가 됐다. 특히 스님은 ‘불교의 핵심은 계·정·혜 삼학이며, 계율은 불법에 있어 목숨과도 같다’고 여기며 지계를 통한 한국불교 중흥을 발원했다. 

오대산 적멸보궁에서의 100일 기도 이후 서울로 올라온 자운 스님은 대각사에서 머물며 본격적으로 율장연구에 매진했다. 그러나 이 무렵 한국불교계는 계율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다. 조선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지계정신은 희박해졌고, 승단에는 결혼한 스님들이 즐비했다. 율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스님도 찾기가 어려웠다. 이렇다보니 자운 스님이 율에 관해 자문을 구할 스님이 많지 않았고, 사찰에서 율장을 구하기도 쉽지 않았다. 

자운 스님은 수소문 끝에 당시 국립중앙도서관에 ‘卍속장경’이 소장돼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그 속에 수록된 5부 율장을 열람했다. 그리곤 방대한 율장을 하나하나 필사했다. 율장을 대중들에게 보급하겠다는 취지였다. 스님은 삼복더위에도 무명 장삼을 입고, 날마다 도시락을 준비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살다시피했다. 그렇게 2년여의 시간 끝에 스님은 마침내 ‘卍속장경’에 수록돼 있는 5부 율장과 그에 따른 주소(註疏)를 모두 필사했다. 이런 노력은 자운 스님이 오분율, 사분율 등 대소승 율장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1945년 해방과 함께 한국불교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었다. 전통승단을 복원해 ‘부처님 법대로 살겠다’는 봉암사 결사가 그것이었다. 자운 스님도 1947년 향곡, 성철, 청담 스님 등과 결사에 동참했다. 봉암사 결사에서 향곡, 성철, 청담 스님이 선불교 전통회복에 주안점을 뒀다면 자운 스님은 무너진 계율전통을 회복하는 데 역점을 뒀다. 스님은 봉암사에서도 율장연구를 지속해 ‘범망경’을 익혔고, 처음으로 보살계 수계법회를 진행했다. 이는 계율의 중요성을 공감했던 성철 스님의 든든한 지원 덕분이기도 했다. 

성철 스님을 시봉하며 봉암사 결사에 참여했던 전 총무원장 의현 스님은 “성철 스님은 계율정신을 회복해야만 한국불교를 중흥할 수 있고, 계율분야는 율장에 가장 밝은 자운 스님이 담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며 “(봉암사 결사 내내) 두 어른의 주된 대화는 계율이었다”고 회고했다.(‘자율대율사’ 김광식 엮음) 
 

조계종은 1981년 2월27일 종단사상 처음으로 단일계단 수계식을 진행했다. 이날 수계식에서 남녀 행자 160명이 자운 스님(1열 중앙)으로부터 사미·사미니계를 받았다. 출처 ‘자운대율사’

봉암사 결사를 마친 자운 스님은 대각사에 ‘천화율원 감로계단’을 설립하고 율장유통을 위해 한문본 ‘범망경’ ‘사미율의’ ‘사미니율의’ ‘비구계본’ ‘비구니계본’ 5종의 율서를 조판해 출간을 준비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스님은 출판을 위해 만든 지형(紙型)을 남겨둔 채 급히 부산 감로사로 피난했다. 율장 보급을 위해 수년간 공들였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었다. 다행히 딱한 사연을 알게 된 한 불자의 노력으로 대각사에 남겨졌던 율장 지형은 다시 돌아왔고, 스님은 이를 토대로 5종의 율서 2만5000권을 간행했다. 뒤이어 한글번역본도 3회에 걸쳐 4만8000권을 간행하면서 누구나 쉽게 율장을 접할 수 있게 했다. 이는 현대 한국불교사에서 최초의 율서보급이었다. 

이후 스님은 1953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처음으로 비구계 수계법회를 열어 전계사로 나섰다. 이때 수계제자가 석암, 종수, 일타, 지관 스님이었다. ‘자운대율사의 화합승가와 역경불사의 원행(법혜 스님)’에 따르면 이때부터 1981년 단일계단이 설립될 때까지 30여년간 자운 스님으로부터 계를 받은 제자는 비구 1650명, 비구니 1536명이었으며 사미·사미니·보살계·식차마나·우바새·우바이 등을 포함하면 10만여명에 달했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의 유시로 불교정화운동이 촉발되자, 자운 스님도 전통승단복원 운동에 나섰다. 그러나 자운 스님은 “정화는 절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여법하게, 계를 잘 지키면서 대처승의 계를 조절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 때문에 불교정화를 주도했던 청담 스님 등과 자주 대립했다. 

전 포교원장 혜총 스님은 “정화 당시 선학원에서 큰스님들을 시봉했는데, 그 때 자운 스님과 청담 스님이 정화의 방법과 노선을 두고 자주 언쟁을 벌였다”며 “자운 스님은 율법에 근거해 정화를 해야 한다고 했고, 청담 스님은 율법이 앞서지만 우선은 불법을 해치는 대처승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 언쟁은 아주 심했다”고 술회했다. (‘자운대율사’)

그러나 불교정화운동 과정에서 자운 스님과 같은 온건적 입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정화의 중심에서 한걸음 떨어져 나온 자운 스님은 율전보급과 후학양성에 매진했다. 1955년 해인사 주지로 부임한 뒤 이듬해 해인사 금강계단을 설립하고 후학들에게 율의 중요성을 설파했다. 1958년 표충사 주지를 거쳐 1960년 다시 해인사 주지로 부임해서는 영암 스님과 함께 사격 복원에 앞장서 해인총림의 기틀을 다졌다. 1975년 조계종 규정원장을 거쳐 1976년 13대 총무원장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서옹 스님의 종정중심제에 발목이 잡혀 종단중흥의 원력을 이루지 못하고 6개월여 만에 물러났다. 총무원장에서 물러난 자운 스님은 이듬해 대각회 이사장을 맡아 용성 스님의 유훈 사업을 이었다. 

이런 가운데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난’이 발생하면서 조계종은 큰 혼란에 휩싸였다. 총무원장을 비롯한 종단 집행부가 물러나고, 비상종단격인 정화중흥회의가 출범했다. 정화중흥회의는 종헌종법을 제정하고 종단사상 처음으로 단일계단법을 시행하기로 했다. 단일계단법은 각 본사나 사찰별로 산발적으로 시행되던 수계산림을 종단차원에서 통합하자는 취지였다. 계단위원회를 두고 3사7증을 구성하는 등 율장에 따른 체계적인 수계제도를 시행하는 것은 종단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 일이었다. 정화중흥회의는 초대 전계대화상으로 자운 스님을 추대했다. ‘동아일보(1981년 2월28일자)’에 따르면 2월27일 오전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열린 단일계단 수계식에는 남녀 행자 160명이 자운 스님으로부터 사미·사미니계를 받았다. 

자운 스님은 이듬해 10월 부산 범어사에서 한국불교사상 처음으로 예비 비구니스님을 위한 식차마나니계를 설파하고, 한국불교 이부승 수계제도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는 비구중심의 승단에서 차별받던 비구니스님들도 승단의 동등한 일원임을 인정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자운 스님은 계율뿐 아니라 정토신앙 보급에도 앞장섰다. 계율과 정토수행이 둘이 아니라는 계정일치(戒淨一致)를 제창하고, ‘무량수경’ ‘아미타경’ ‘정토예경’ 등 정토 관련 경서를 펴냈을 뿐 아니라 해인사에서 염불만일회, 서울 보국사에서 대동염불회를 조직해 정토수행을 진작했다. 열반 때까지 매일 10만 번 ‘아미타불’ 염불과 ‘아미타경’ 독송, 일종식 등을 실천하며 정토수행자로서의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1987년에는 동국역경원장과 동국역경사업진흥회 이사장으로 취임해 율장과 경전보급에 앞장섰다. 

그렇게 평생 한국불교 계율의 중흥과 율장간행, 불법홍포를 위해 노력했던 자운 스님은 1992년 2월7일(음력 1월4일) 해인사 홍제암에서 세수 82세, 법랍 66세로 삶을 마감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1479 / 2019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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