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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증명 불가능성

기자명 강병균

열반은 완벽한 상태 아닌 특정한 한계 넘어선 상태

괴델 증명은 신학에도 큰 영향
신의 존재 증명 불가능함 시사
열반도 증명 아닌 체험의 세계
열반 용어는 실재 어림값일 뿐

20세기 초에 수학계를 이끌던 세계적인 수학자 힐버트(David Hilbert, 1862~1943)는 참인 명제, 즉 수학적 진리는 모두 증명 가능할 걸로 보았다. 하지만, 수십 년 후, 괴델(Kurt Goedel, 1906~1978)은 그렇지 않다는 걸 증명했다. “공리계 내에는 그 공리들만 이용해서는 ‘참이지만 참이라는 걸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있다’”는 걸 증명했다. 예를 들어 5개의 공리를 채택한 유클리드 기하학에서는, 5개의 공리만 사용해서는 증명할 수 없는 참인 명제가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특정 신학의 공리 체계 하에는 증명할 수 없는 신학적 진리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신의 존재가 그럴지 모른다. 즉 신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말이다. 중세 이래로 수많은 신학자들이 ‘신이 존재한다’는 걸 논리적으로 증명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괴델의 정리는 충격적이다. 신의 존재 증명 자체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정한 대상의 존재 여부를 증명하려면 먼저 그 대상을 ‘정의’해야 한다. 즉 신의 속성을 정의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완벽함이다. 중세 신학자 안셀무스(Anselmus, 1033~1109)는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1. 신은 완벽하다. 2. 존재하지 않는 것은 완벽하지 않다. 3. 그러므로 신은 존재한다. 삼단논법이다. 무신론자인 버트런드 러셀조차도 한동안 이 논리에 설득당했다. 나중에야 허점을 발견했다. 2에 문제가 있다. 이것은 ‘완벽한 것은 반드시 존재한다’는 말과 같은데,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 완벽한 창이나 완벽한 방패는 둘 다 존재할 수는 없다. 어떤 방패도 뚫는 창으로 어떤 창도 막는 방패를 찌르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그러므로 완벽한 방패나 완벽한 창, 둘 중의 하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모순(矛盾)이라는 용어의 어원이다. 즉 완벽한 것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 어떤 대상은, 우리가 생각은 할 수 있지만, 존재하지는 않는 것이다.

불교의 열반도 그런 존재일지 모른다. 열반이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면, 존재하지 않을지 모르며, 설사 존재한다고 해도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없을지 모른다. 열반을 성취한 사람들은 과거인들이므로 그들을 불러 조사할 방법도 없다. 열반의 세계는 증명의 대상이 아니라 체험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감성은 논리적인 증명의 대상이 아니지 않은가? 열반은 어떤 완벽한 상태가 아니라 특정한 한계를 넘어선 상태일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까지 완벽하게 건강하다고 해도, 즉 기존의 병원균에 감염당하지 않는다고 해도 에이즈 같은 신종 병원균에 노출되면 감염이 되는 것이다. 열반은 현재 인간이 가진 정신적인 문제를 넘어선 상태일 수 있다. 즉 특정한 시공간 상의 인간의 특정한 상태일 수 있다.

열반도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용어는 실재의 어림값이다. 실재 그 자체가 아니다. 실재 그 자체라는 말도 사실은 잘못된 말이다. 참값을 안 적이 없으므로, 정말로 참값이 존재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참값’이라는 말도 엄밀히 따지면 그 뜻이 즉, 그게 무얼 의미하는지 모호하다. 그리고 설사 그 용어들을 수학 용어처럼 완벽하게 만든다 할지라도, 정작 그리 만들면 (괴델이 지적했듯이) 존재하지만 존재한다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난다. 일종의 역설이다. 수많은, 사실은 무수한, 인연이 모여 사물·생명·현상(자연 물질 정신 생명)을 만들어내므로, 정확히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용어는 실재가 아니다. 실재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이 경우 설명이라는 것도 불완전하다. 모든 것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모든 것을 다 설명한 다음 최후에 설명해야 하는 것이 신이나 열반이라면, 신과 열반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궁극의 문제란 것도 사실은 시대와 환경 아래서의 문제이다. 현대인들은 과거인들이 가지지 않았던 문제를 가지고 있다. 미래인들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문제를 품고 살아갈지 모른다. 그러므로 항상 겸손해야 한다. 함부로, 모든 걸 다 안다거나, 다 아는 사람이 있다거나, 그런 사람을 안다고 할 일이 아니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79호 / 2019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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