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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고대불교 - 고대국가의 발전과 불교 ⑱ 흥륜사와 황룡사

기자명 최병헌

진흥왕의 황룡사 건립은 ‘왕즉불사상’ 표방하는 북위불교 영향

경주 7곳에 건립한 사찰
신라의 불연국토설 토대

남조의 영향 받은 흥륜사
금당에 미륵불 주불 모셔  

진흥왕의 고구려 원정길
승려 혜량이 신라에 망명

혜량을 승통으로 임명 후
황룡사 건립 강력히 추진

북위 성향의 고구려 불교
신라에 확실히 뿌리 내려

​​​​​​​장육존상 조성 설화에서
‘신라 동천축’ 인식 확인

삼존불상 지대석.

신라는 제23대 법흥왕대(514〜540) 불교를 공인한 이후 왕도 경주에는 사찰의 창건이 뒤를 이어서, 신라말기의 최치원이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에서 “안탑(雁塔, 불탑)이 구름처럼 벌려져서 문득 빈땅이 없었고, 경포(鯨枹, 북)가 우레같이 진동하여 제천(諸天)에서 멀지 않았다”고 묘사한 바와 같이 수많은 사찰들이 벌려 있었다. 왕경의 사찰 가운데 ‘중고’시기의 대표적인 것은 이른바 전불시대(前佛時代) 7곳의 가람터에 세워진 사찰들이었다. 김용행이 찬술한 ‘아도본비’에서는 7곳의 사찰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여 주고 있다. 즉 흥륜사(興輪寺, 법흥왕 14년 착수하고, 22년 크게 공사를 벌려 진흥왕 5년 준공)·영흥사(永興寺, 흥륜사와 동시 개설)·황룡사(皇龍寺, 진흥왕 14년 개창)·분황사(芬皇寺, 선덕여왕 3년 개창)·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4년 개창)·사천왕사(四天王寺, 문무왕 19년 개창)·담엄사(曇嚴寺, 개창년도 미상) 등의 사찰이었다. 일각에서는 7곳 사찰을 비바시불(毘婆尸佛)·시기불(尸棄佛)·비사부불(毘舍浮佛) 등 과거7불(過去七佛)에 대응시켜 이해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전불시대의 7처 가람설은 황룡사의 자리가 과거불인 가섭불(迦葉佛)이 옛날 설법하던 곳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신라와 불교와의 오랜 인연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설화, 이른바 불연국토설(佛緣國土說)의 토대가 되었다. 그리고 또한 ‘중고’불교의 중심적인 신앙대상인 미래의 부처, 곧 미륵불의 전제로서 과거불이 설정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본다.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는 법흥왕 14년(527)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이차돈의 순교 사건으로 일시 중단되었다. 그 뒤 왕권이 크게 강화되면서 22년(535) 본격적으로 절을 크게 짓기 시작하였는데, 울주 ‘천전리서석’의 갑인명(甲寅銘)에 의하면 갑인년(534)에 대왕사(大王寺)의 안장(安藏)이 서석곡에 갔었던 사실을 기록으로 남긴 것을 보아 흥륜사는 그 앞서 ‘대왕사’라는 이름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장은 진흥왕 11년(550) 최초의 승관으로 대서성(大書省)에 임명된 인물이었는데, 불교 교단의 통솔 같은 문제보다는 국왕의 자문에 응하고 조서(詔書)나 외교문서 등을 작성하는 역할을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흥륜사는 진흥왕 5년(544)에 비로소 준공되자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이름한 것으로 보아 법흥왕의 비원을 간직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흥륜사의 완공을 계기로 하여 승려의 출가가 공식적으로 허용됨으로써 불교 교단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진흥왕 10년(549) 봄에는 양(梁)에 유학을 갔던 각덕(覺德)이 양의 사신과 함께 부처의 사리를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국왕이 백관으로 하여금 흥륜사 앞길에서 맞게 하였던 것으로 보아 흥륜사에 불탑을 세우고 봉안하였던 것을 추측케 한다.

흥륜사 금당의 주존불은 미륵불이었다. ‘삼국유사’ 미륵선화·미시랑조에 의하면 진지왕대(576〜578)에 흥륜사의 승려 진자(眞慈)가 매일 법당의 주인인 미륵상 앞에서 소원을 빌면서 맹세하기를, ‘원컨대 우리 대성(大聖)께서 화랑으로 화신(化身)하셔서 이 세상에 나타나신다면, 제가 언제나 거룩하신 모습을 가까이 뵈옵고 받들어 시중을 들겠습니다’라고 하였으며, 한 승려의 현몽으로 웅천(熊川, 공주)의 수원사(水源寺)에 가서 미륵선화(彌勒仙化)를 친견하고 본사인 흥륜사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 뒤 진자는 국선 미시랑(未尸郞)의 승려낭도가 되어 7년 동안 보좌하였다. 당시 신라에서 화랑은 미륵의 화신으로 받들어지고 있었으며, 각각의 화랑도에는 승려낭도가 소속되어 교화를 담당하였다. 훗날 김유신의 화랑도를 용화향도(龍華香徒)라고 이름하였던 것도 화랑도와 미륵신앙과의 관계를 나타내주는 사례였다. 그런데 600년대 후반에는 미륵신앙이 하생신앙에서 상생신앙으로 바뀌어갔으며, 그에 상응하여 새로 아미타신앙이 크게 부각되었다. 그 결과 흥륜사에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불전이 새로 세워졌는데, ‘삼국유사’ 밀본최사조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전략) 김양도는 이로 말미암아 불교를 독실하게 믿어 한평생 게을리 하지 않았다. 흥륜사 오당(吳堂)의 주불인 아미타존상과 좌우 협시보살을 소상(塑像)으로 만들고, 아울러 그 당을 금색 벽화로 기득 채웠다.”

학계 일각에서는 위 인용 자료 가운데 오당에 대해서는 금당의 잘못으로 보고, 아미타존상을 미륵존상으로 고쳐서 해석하는 주장도 있으나, 오당을 금당 뒤쪽의 불전이나 강당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본다. 따라서 김양도가 활약했던 무열왕대〜문무왕대(654〜681)에 흥륜사의 금당에는 미륵존상, 오당(강당)에는 아미타존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며, 이러한 배치는 7세기 후반 이후 법상종 사찰의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그런데 남조인 양과 백제의 불교의 영향을 벗어나고, 흥륜사를 중심으로 한 미륵신앙 위주의 불교신앙에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은 진흥왕 12년(551) 고구려의 승려 혜량(惠亮)의 망명과 14년(553) 황룡사(皇龍寺)의 창건이었다. 신라의 불교는 원래 초기 전래과정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었지만, 법흥왕대 불교를 공인하는 단계에서는 백제를 매개로 하여 남조인 양의 불교를 주로 받아 들였다. 진흥왕 10년(549) 최초의 중국 유학승 각덕이 양의 사신과 함께 불사리를 받들고 귀국한 것도 그러한 연장선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 12년(551) 18세로 성년이 된 진흥왕은 친정을 하게 되면서 연호를 개국(開國)으로 바꾸고 적국적인 대외 정복전쟁을 개시하였다. 왕은 먼저 거칠부 등에 명하여 한강 상류지역인 고구려의 10개 군을 점령하였다. 이때의 원정길에서 망명을 요청하는 혜량 일행을 만나서 왕경으로 데리고 오게 되었다. 그에 앞서 거칠부는 젊은 시절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고구려를 염탐하러 들어간 일이 있었는데, 혜량의 경전 강의를 듣다가 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귀국한 일이 있었다. 신라에 망명하여 온 혜량은 승통(僧統, 또는 寺主)으로 임명되어 승려들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리고 호국법회인 백고좌회와 팔관의 법을 설하였는데, 이로써 북조 계통의 승관제와 호국법회를 받아들이게 되었으며, 나아가 북방불교의 왕즉불사상도 전래되었다. 

황룡사지에서 발견된 각종 유물들.

진흥왕 14년(553)에는 백제가 점령한 한강 하류지역까지 점유하여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강역을 획정하여 지배를 확실히 하였다. 동시에 경주 분지의 중심 지점에 새로운 궁궐을 축조하려다가 계획을 변경하여 사찰인 황룡사를 창건하였다. 궁궐을 사찰로 바꾼 이유로는 황룡의 출현을 들고 있으나, 창건의 연기설화를 염설하기 위하여 뒤에 부가된 것이고,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한 것은 새로운 사찰 창건의 시대적인 요청, 그리고 고구려 승려인 혜량의 건의였던 것으로 본다. 정복군주로서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남조불교의 영향을 받은 흥륜사를 대신하여 북조불교인 왕즉불사상을 표상하는 새로운 사찰의 건설이 요구되었던 것이고, 마침 왕즉불사상의 북방불교를 전래한 혜량이 황룡사의 건설을 건의하였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사찰에는 미륵불 대신에 석가불이 새로 조성되어 전륜성왕이라는 불교적인 위대한 제왕의 출현을 기원할 수 있게 되었다. 오늘날 학계 일각에서는 ‘중고’기의 권력구조를 국왕과 귀족세력의 대립관계로 설정하고, 국왕은 석가불, 귀족세력은 미륵불을 상징하는 것으로 각각 대입하여 석가불과 미륵불의 대립관계로 이해하는 주장이 제기되어 일부 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사회사적인 이해방법을 사상사 이해에 맹목적으로 적용한 데서 이루어진 명백한 오류이다. 북조불교를 대표하는 북위불교는 미륵불과 함께 석가불을 집중적으로 조성하여 왕즉불사상과 전륜성왕의 관념을 그대로 나타내 주었음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황룡사의 공사는 시작한지 13년만인 진흥왕 27년(566)에 일단 마치었고, 추가로 주위 담장 공사는 30년(569)에 완전히 끝마쳤다. 그런데 진흥왕 34년(573, ‘삼국사기’에서는 574)에는 황룡사에 봉안할 장육존상을 새로 조성하고, 진평왕 6년(584)에 그 불상을 안치할 금당을 새로 건축하였다. 황룡사의 조성과정에서 제일 주목되는 점은 장육존상의 연기설화인데, ‘삼국유사’ 황룡사의 장육존상조에서는 서축(西竺, 인도)의 아육왕(阿育王, 아쇼카왕)이 보내온 황철 5만7천 근과 황금 3만 푼으로 석가3존상을 조성하였고, 또한 함께 견본으로 보내온 한 부처와 두 보살상은 동축사(東竺寺)를 창건하여 모시었다가 새로운 장육존상이 완성된 뒤 황룡사로 옮겨 모셔왔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이 연기설화는 역사적인 사실과 설화적인 내용이 뒤섞여 있어서 학자들 사이에 적지않은 논란이 야기되었다. 우선 먼저 문제된 점은 황룡사가 일차 준공된 진흥왕 27년부터 장륙존상이 조성되는 진흥왕 34년 사이 7년 동안에 황룡사 금당에 불상이 봉안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학자 가운데는 불상이 없었을 것으로 추측하는 주장도 있으나, 원래 황룡사에 봉안되었던 석가 3존상은 장육존상의 주조 중에 일단 동축사로 옮겼다가, 완공된 뒤 다시 황룡사로 모셨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주장은 최초의 불상은 미륵불이었는데, 새로 석가3존상을 조성하여 봉안하면서 기존의 미륵상은 폐기하였다는 것이다. 이 짦은 글에서 여러 주장의 타당성 여부를 일일이 검토할 수는 없기 때문에 나의 견해만을 종합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즉 진흥왕 14년에 시작하여 27년에 완성한 금당에는 석가3존상이 안치되었다. 그런데 진흥왕 34년에 새로 거대한 석가3존의 장육존상을 조성하게 되면서 기존의 석가3존상은 동축사로 임시 옮겨 모시게 되었다. 단 동축사라는 사찰 이름은 장육존상 조성의 연원을 인도의 아육왕(아쇼카왕)에 연결시키려는 연기설화를 만들 때에 서천축(인도)에 대응하는 동천축(신라)이라는 의미로 지어졌던 것으로 본다. 그리고 새로 주조한 장육존상은 황룡사의 3금당 가운데 중금당에 봉안하고, 원래 황룡사에 모셨던 석가3존상은 동축사로부터 옮겨와서 동금당과 서금당 가운데 한곳에 모셨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진평왕 6년에 금당을 새로 조성한 것은 거대한 불상은 먼저 제자리에 안치하고, 그 위에 금당 건물을 축조하기 때문에 제일 뒤에 축조된 것으로 본다. 결론적으로 황룡사 창건공사의 중심은 장육존상의 주조였으며, 그 뒤를 이은 것은 선덕여왕 14년(645)의 9층목탑의 조성이었는데, 신라의 3보로 불려지던 장육존상과 9층목탑 조성의 정치적 의의는 별고에서 다루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479호 / 2019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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