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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연재를 시작하며

순교자 피 머금고 성장한 불교 정법 위해선 목숨도 바친다

이차돈 순교로 시작된 한국불교
다수 스님들 위법망구로 전승

순교자 있었기에 불교 존속 가능
대가·보상 바라지 않았기에 숭고

​​​​​​​기억 속에서 사라진 현장 대다수
역사 망각하는 순간 법난 되풀이

1700년 역사의 한국불교는 순교에 의해 비롯돼 발전해 나갔고 온갖 부침을 거듭하며 한국인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불교가 숭상되는 시대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돋보이지만 불교가 탄압받는 암울한 시대에는 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빛을 발했다. 한국불교에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그들에 힘입어 한국불교는 그 역사를 이어왔다.
1700년 역사의 한국불교는 순교에 의해 비롯돼 발전해 나갔고 온갖 부침을 거듭하며 한국인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불교가 숭상되는 시대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돋보이지만 불교가 탄압받는 암울한 시대에는 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빛을 발했다. 한국불교에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그들에 힘입어 한국불교는 그 역사를 이어왔다.

 

순교자 없는 세계종교는 없다. 순교는 종교적 신념의 적극적인 실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불교도 정법을 위해 몸을 아끼지 않는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 정신을 찬탄해왔다.

지극한 신심과 공심을 표현하는 말인 위법망구. 곧 몸이나 개개인의 사사로움을 돌보지 않고 정법을 위해 심신을 다 바친다는 의미다.

2600년 전 인도의 궁벽한 지역에서 시작된 불교가 한국에까지 전승될 수 있었던 것도 수많은 이들의 희생 덕분이다. 불법이 ‘모두를 이롭게 할 가르침’이라 확신했던 그들은 만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쳤고 심지어 목숨을 내놓는 순교를 택하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부처님 당시 목련존자와 부루나존자 등의 순교에 힘입어 불교가 인도 전역으로 확산됐으며 중국에 불교가 정착될 수 있었던 것도 3무1종(三武一宗) 등 숱한 법난을 죽음으로 맞섰던 순교자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700년 역사의 한국불교도 순교에 의해 비롯돼 발전해 나갔고 온갖 부침을 거듭하며 한국인의 사상과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줬다. 호불 군주의 지지 속에 불교는 화려한 꽃을 피우기도 했고, 혹독한 억불의 회오리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할 때도 있었다. 불교가 숭상되는 시대에는 위대한 사상가가 돋보이지만, 불교가 탄압받는 암울한 시대에는 법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순교자가 빛을 발했다. 한국불교에 수많은 순교자가 있었고, 그들에 힘입어 한국불교는 그 역사를 이어왔다.

이 땅에 처음 불교인의 피가 흩뿌려진 것은 삼국시대였다. 4세기 후반 고구려와 백제에 들어온 불교는 토착신앙과 융합하면서 크게 성장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왕들의 주도로 각각 372년과 384년에 불교를 받아들인 것과는 달리 신라는 100년이 훨씬 더 지났음에도 여전히 불법의 불모지였다. 눌지왕(재위기간 417~458) 때 아도 스님이 지금의 선산 지역에 들어와 법을 펼침으로써 불교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의적이었던 왕실과 달리 막강한 실권을 쥔 귀족들의 반대가 거셌고, 전법을 위해 신라에 왔던 정방 스님을 비롯한 7명의 고구려 스님들이 군사들에게 잇따라 죽임을 당했다.

이때 신라불교의 지형을 바꿔놓은 인물이 이차돈(506~527)이다. 22살의 신심 깊은 청년 이차돈은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국운을 꾀하고자 한 법흥왕을 헤아려 기꺼이 순교를 택했다. 사형집행이 있던 날, 칼이 목을 내리치자 그의 목에서 하얀 피가 한 마장이나 솟구쳤다. 그렇게 뿜어져 나온 성스러운 피는 신라불교의 판도를 바꾸어놓았다. 자신의 육신을 버림으로써 찬란한 신라불교의 서막을 열었던 이차돈의 순교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라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치며 정치, 문화, 사상 전반에 꽃을 피웠다.

이들 순교자가 없었다면 이후 원효·의상대사와 같은 대사상가도, 찬란한 통일신라의 불교문화도 있을 수 없었다.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이차돈의 묘소를 찾아 ‘만약 말세에 법을 행하기 어려운 때를 만나면 나 또한 임을 따라 목숨을 바치리’라고 찬탄했던 것도 법을 위해 기꺼이 죽어간 이차돈 성사가 있었기에 불교가 존재한다는 고마움에서였다.

불교사에 순교자가 다시 등장한 것은 억불의 조선시대를 맞으면서부터다. 불교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에 국교가 되면서 큰 발전을 이뤘지만 유교를 국교로 하는 조선이 개국하면서 숭유억불 정책으로 소멸될 위기에 처했다. 폐사하는 사찰이 잇따랐고 천민 취급을 받은 스님들은 도성 출입조차 할 수 없었다. 

1446년 제주로 유배가 순교한 흥천사 주지 행호 스님이 본격적인 탄압의 신호탄이었다. 뛰어난 인품과 수행력을 가진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자 불안감을 느낀 유림에서 스님을 음해하기 시작했고 결국 제주도에서 숨을 거둘 수밖에 없었다. 이후 유생들은 대중의 지지를 받는 스님이 있으면 모든 방법을 동원해 죽음으로 내몰았다. 특히 조선 성종은 불법을 홍포했다는 이유로 설산, 월심, 계엄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고승들을 혹독한 장형에 처하거나 참수했다.

불교의 명운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스님들은 강제 환속돼 군대에 편입되기도 했고 유생들로부터 거짓 죄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사찰은 연회 장소로 사용됐으며 불태워져 양반가의 무덤으로 조성되는 일도 벌어졌다. 불상과 범종은 녹여져 살상 무기로 탈바꿈됐다. 바야흐로 법난의 시대였다. 

그럼에도 한국불교의 맥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조선불교 삼성(三聖)으로 일컬어지는 천태행호, 나암보우, 환성지안 스님이 있었기 때문이다. 각각 조선 초기, 중기, 후기를 대표하는 이들은 억불시대에도 불법을 널리 펴고 불교를 중흥시킨 주역들이다.

한국불교사에서 순교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이 이어지는 동안 끊이질 않았고 온갖 탄압과 생명을 위협받는 위험 속에서도 불법을 전파하겠다는 이들의 피와 눈물, 위법망구 정신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불교도 존재할 수 있었다.

역사적으로 위법망구는 나라가 어렵고  국민들이 힘든 상황에서 그 힘을 더욱 발휘했다.

임진왜란이라는 민족 수난기에는 많은 스님들이 목탁과 죽비 대신 칼과 창을 쥔 채 의병을 이끌고 승군으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불교에서는 ‘불살생’을 첫째 계율로 내세우지만 무고한 백성들이 억울하게 죽어가는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서산, 사명, 영규, 처영 스님 등이 그 주인공으로 이들은 의승군을 이끌고 나라의 어려움을 구하는 데에 앞장섰다.

일제강점기 종교의 틀을 넘어 민중의 아픔을 감싸고 그들을 위해 참다운 종교인의 자세로 자신들을 희생해 광복을 이끈 이도 있다. 3·1운동을 계획하고 주도한 용성, 만해 스님, 진관사 태극기의 주인공 초월 스님은 불교를 대표하는 독립운동가다. 이들은 빼앗긴 조국과 식민지 백성들을 위해 독립운동에 온 몸을 던졌다. 이들 스님의 일생은 참다운 보살행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위법망구는 목숨을 바치는 것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한국전쟁 당시 무장공비가 주둔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에도 팔만대장경 소실을 우려, 폭격을 중지시키며 팔만대장경을 지킨 김영환 장군도 삼보를 수호했다는 점에서 위법망구의 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김영환 장군이 몰던 전폭기에는 해인사를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폭탄이 장착됐었지만 장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시체제에서 명령 불복종을 감행하면서 민족의 유산 해인사를 지켜냈다. 그 덕분에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세계적인 자랑거리가 될 수 있었다.

최근에는 정부의 실정을 온몸을 불살라 항거한 문수 스님도 파사현정과 위법망구 정신을 보여준다. 문수 스님은 4대강 사업이 한창이던 2010년 5월31일 군위군 제방에서 ‘이명박 정권은 4대강 공사를 즉각 중지하고 서민과 소외된 사람을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유서를 남기고 세납 49세, 법납 25년으로 소신공양을 결행했다. 스님은 온몸을 불사르며 간절히 염원한 ‘생명존중’과 ‘더불어 행복한 조화로운 세상 만들기’에 대한 소망을 통해 많은 불자와 국민들이 자신을 성찰하고 참회하며 새로운 서원을 세우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불교도들은 불법을 따르고 목숨을 걸 만큼 가치 있고 소중히 여긴다’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니다. 불법은 화자와 상관없이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힘을 가지고 있다.

이웃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가 박해의 시련을 뚫고 이뤄낸 역사를 자랑스러워하며 순교자들을 성인(聖人)으로 받든다. 한국불교가 겪은 시련의 역사도 그들 못지않고 신념을 지키다 억울하게 사라진 불교도들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쓰러져간 이들의 아픔을 기억하고 노고에 감사하는 불교인들은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이유야 어찌 됐건 역사를 평가하고 바로잡아야 할 인물과 현장이 수두룩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에게 가장 큰 비극은 지나간 역사에서 아무런 교훈을 얻지 못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극한의 상황에서 온몸을 던졌던 불교인들을 외면하고서 정법이나 포교를 말할 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이 연재의 주인공은 바로 극한의 상황에서 온몸을 던졌던 불교인들과 그 역사적 사건이 벌어졌던 현장이다. 기억돼 오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욱 선명하게 기억해야 할 그들의 삶과 정진을 전달할 예정이다. 

1700여년 역사에서 기억 속에 사라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게 결코 쉽지는 않겠지만 단 한 명이라도 수많은 유혹과 지난한 장애들을 극복하고 자신의 삶에서 온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을 구현하고자 했던 이가 있다면 그의 노력과 원력을 후대에 전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전법의 중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될 때 불자들의 정체성과 종교적 자부심 고취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기억되지 않는 역사는 언제라도 되풀이된다. 법난의 시대, 위법망구의 정신만이 불법을 지켜낼 수 있다.

임은호 기자 eunholic@beopbo.com

 

[1480 / 2019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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