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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수좌의 의자, 좌복의 한 철 ② - 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좌복은 수좌의 공부 점검하고 기록하는 염라대왕”

좌복은 단순한 좌복만이 아닌 
수행자의 의자이고 침구이며 
또한 진리 드러내는 법구이자 
정진 상징하는 표상같은 존재

한철 정진마치고 죽비 놓으면 
좌복 죄다 꺼내서 세탁 울력해 
햇살아래 지난날 드러난 좌복
이젠 ‘오도송’이라도 읊으려나
그런 좌복에 한없이 부끄러워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가야산 해인사 원당암의 혜암 큰스님께서는 평소 “수좌는 좌복 위에서 공부하다가 그 위에서 죽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 이번 생은 없다 치고 원 없이 공부하다가 좌복에서 죽을 생각으로 정진할 일이다.

홍성 연암산 천장암(天藏庵)은 한국선불교의 중흥조이신 경허성우 대선사와 그의 세 달인 수월, 혜월, 만공선사께서 머무셨던 유서 깊은 곳이다. 그곳 대웅전을 우측으로 돌아가면 끄트머리 작은 방이 바로 경허선사께서 정진하시던 곳이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정도의 작은 방에 좌복 하나가 놓여있다. 

마치 허공이 경허마냥 그 좌복 위에 정좌한 채 참선삼매에 든 느낌이다. 아니 그 좌복 하나가 바로 온 우주를 머금은 느낌이다. 바로 왼쪽 방은 시봉인 만공 스님의 시자실이었다고 한다. 그곳에서 큰스님의 숨소리 하나하나를 살피며 정진하던 만공 스님의 모습이 눈에 선하기만 하다.

부처님께서도 6년간의 오랜 고행을 마치고는 보드가야의 보리수아래 금강보좌에 정좌하신 채, 용맹정진 끝에 마침내 무상정각의 깨달음을 성취하시었다. 또한 ‘염화미소’와 ‘곽시쌍부’, 그리고 다자탑 아래에서 가섭에게 당신 자리의 반을 내어 주심으로써(多子塔前半分座) ‘삼처전심’의 선법이 비롯된 것이다.

선방에 다니던 시절, 방부를 들이고 참선하는 큰방에 들어가면 빳빳하게 풀을 먹인 좌복이 서로 자기를 선택해 달라며 손을 들고는 “저요!”하고 아우성을 치는 듯하다. 그중에 하나의 좌복을 자리에 깔고 하나는 뒷 좌복으로 놓은채 처음 좌정을 할 때의 기분은 금세라도 도를 이룰 듯한 기분이다. 아무 것도 아닌 좌복이지만 은근히 자기와 궁합이 맞는 게 있음이라.

결제 하루 전 날 큰방에서 용상방을 짜는데, 좌복 위에 의연히 앉은 스님네가 모두 부처님과 역대조사처럼 성스럽고 당당하기만 하다. 이 사바세계에서 오직 대도를 이루기 위해 목숨 걸고 정진하는 서원을 세웠으니 어찌 수희찬탄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의 좌복마다 하나의 연꽃이 피어나고, 하나의 연꽃마다 한 분의 부처님께서 시현하신 듯하다.

산중의 방장스님께서 결제법어를 하는데 무언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옛 스님처럼 달려가 방장스님 방석을 걷어차든지, 좌복으로 한방 날리련만 침묵하고 있다. 이번 철에 밥값이든, 좌복 값이든 하기를 간절히 서원할 따름이다.

드디어 안거 첫 정진을 알리는 죽비소리 세 번에 나도, 좌복도, 허공까지도 모두 숨 죽인 채 삼매에 들어간다. 구순안거가 시작되어 바람처럼 떠돌던 백운이 좌복 위에서 마침내 하나의 부동(不動)의 청산이 되어가는 것이다. 좌복은 이 순간부터 수좌의 공부를 점검하고 기록하는 염라대왕이나 사관(史官)이다.

오후 정진이 끝나고 울력 시간이 되면 각자 하루종일 앉았던 좌복을 들고 나와 먼지를 탁탁 털어내는데, 그때의 기분이 상쾌하기만 하다. 먼지만이 아니라 마음속 번뇌망상의 찌꺼기까지 탈탈 털어내는 것이다. 저녁 정진을 마치면 다리 뻗고 속절없이 울었다는 옛 선지식처럼, 도를 이루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곧바로 그 자리에 좌복을 베개나 배 위에 올린채 잠을 청하곤 한다. 
이렇듯 좌복은 단순한 좌복만이 아닌 것이다. 하나의 좌복은 수좌의 의자이고, 침구이기도 하며 또한 진리를 드러내는 법구이자, 수좌의 정진을 상징하는 표상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좌복은 진리(法)의 자리인 연화대이자, ‘선의 황금시대’를 향한 꿈과 희망, 그리고 깨달음의 증거인 것이다.

내 작은 좌복에는 나의 피땀과 구도열이 함께한다. 덕숭산 딱따구리의 절차탁마의 공력과 홀딱새의 염불하는 새소리가 함께한다. 덕숭산의 허공과 달과 바람과 구름이 좌복마다 심인(心印)인양 서려있다. 그리고 역대 선지식과 많은 중생들의 염원과 시은(施恩)이 깃들어 있다 할 것이다.

한 철 정진을 마치고 죽비를 놓으면 침구며 좌복과 의복을 죄다 꺼내다가 온 대중이 세탁울력을 한다. 한철 성만한 스님 네는 모두가 형형한 눈빛에 부처님 상호와 마음을 닮아있다. 한 철 정진을 함께한 좌복도 때 빼고 광을 낸 채, 햇살아래 지난날을 복기하며 오도송이라도 읊을 모양이다. 그런 좌복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시원섭섭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부끄럽고 욕되기만 하다.

좌복을 세탁하고 말린 후 새로이 풀을 먹여 내 자리에 갖다놓았다. 좌복 위 어딘가에 내 수행의 흔적과 작은 깨달음의 자취가 있을까? 다만 내 부끄러움과 욕됨이 점철된 그저 ‘바보’와 ‘천치’같은 것을 볼 뿐이다. 그래도 이 한 철의 청복(淸福)과 좌복과의 지중한 인연을 바꾸지 않을련다. 주인 잘못 만나 고생한 이 좌복도 다음에는 올곧은 수좌를 만나 깨달음의 순간을 함께할 수 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해제 후 수좌는 바람처럼 걸망을 맨 채 운수행각을 떠나고, 빈 좌복만이 청산마냥 홀로 덩그러니 남아 무정설법을 하는 중이다. 나중에 다시 올 나와 너를, 그리고 깨달음과 부처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그 좌복이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나도 다시금 그에게로 가서 잊혀지지않는 소중한 의미가 되고 싶다.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480 / 2019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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