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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무한 유한-상

인간이 무한 경험하는 것은 수학 통해서만 가능

유한 전제돼야 자기 경험 가능
시간 속에서 무한 경험 불가능
감각·인식을 연기로 보는 것은
불교의 깊은 통찰이자 위대함

인간의 수명은 유한하다. 인간은 설사 수명이 무한하다 해도, 즉 영원히 죽지 않는다 해도 매순간 그때까지 유한한 시간만 살았으므로, 무한한 시간을 살 길이 없다. 시간 속에서는 무한을 경험할 방법이 없다.

설사 몸이 무한히 크다 해도 무한은 경험하지 못한다. 감각정보가 신경에서 뇌까지 이동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생체전기에 실려 신경회로를 통해 이동하는 데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이 무한히 크면 신경회로가 무한히 길고, 그에 따라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무한히 먼 곳에 있는 발가락에 개미가 기어가는 경우 발가락 주인이 그걸 느끼려면 무한한 시간이 걸린다. 그 결과 강도나 맹수가 자기 발가락을 자르거나 뜯어먹어도 모른다. 자기가 자기를 경험하려면 유한해야 한다. 그래서 힌두교 철학에서는, 무한자 브라만(Brahman)이 유한한 몸속으로 들어와 아트만(Atman·眞我·참나)이 되는지도 모른다. 감각과 인식이라는 것은 주객(主客)으로 나뉘어야 가능한데, 그 주객의 분리가 이루어진 상태를 아트만이라고 한다. 주객의 분리가 사라지면 브라만이다. 불교가 위대한 것은 감각·인식 작용을 주객과 감각·인식 기관 사이의 연기(緣起)관계로 인식한 점이다. 즉, 인식과 감각의 초월적인 상주불변의 주체를 상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걸 무아론이라고 한다.

무한을 경험하는 것은 수학을 통해서 가능하다. 물론 이 경험은 추상적이다. 자연수(1,2,3,...)는 무한히 많다. n을 가장 큰 자연수라 하면, 그 수에 1을 더한  n+1은 더 큰 자연수가 된다. 그러므로 가장 큰 자연수가 없고, 따라서 자연수는 무수히 많다. 소수의 개수가 무한이라는 것은 이해하기 조금 더 어렵다. 약수가 1과 자신밖에 없는 자연수를 소수라고 한다. 2, 3, 5, 7, 11, 13 등이 그 예이다. 만약 소수가 유한개밖에 없다면, p1, ..., pn을 모든 소수라 하면 이것들을 모두 곱한 다음 1을 더한 p1...pn+1은 p1,...,pn 중 어느 것으로도 나누어지지 않는다. 나누면 나머지가 0이 아니라 1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수는 소인수 분해가 된다는 사실, 즉 적당한 소수들의 곱이라는 사실에 위배된다. 예를 들어 108=2×2×3×3×3이다. 그러므로 소수는 무한히 많다. 이상은 2300년 전 유클리드의 논증이다.

이런 수학적 무한은 물질세계의 유한·무한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즉, 설사 우주가 유한하다 해도, 우리는 무한을 생각할 수 있다. 우주가 유한해도 수(數)는 무한히 많기 때문이다. 무한은 물질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해도 무한에 대해 정신적으로 경험하는 것, 즉 사유하는 것은 가능하다. 수학의 힘이다. 

수학은 무한을 분류한다. 무한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이 아니라 서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무한의 크기, 즉 무한 사이의 대소관계(大小關係)를 정의하고 연구한다. 그 대소관계는 우리의 직관과 일치한다. 즉, 인위적이 아니라 가장 자연스러운 정의이다. 그걸 부인하려면 우리 직관을 부인해야 한다. 그 정의는 다음과 같다. 두 집합의 원소들을 (남김없이 모두) 하나씩 대응시킬 수 있을 때, 두 (무한) 집합은 원소의 개수가 같다고 정의한다. 한 집합 A가 다른 집합 B의 어떤 부분집합과 원소의 개수가 같을 때, A가 B보다 원소의 개수가 더 작거나 같다고 한다.

자연수의 개수도 무한이고, 분수(유리수)의 개수도 무한이고, 실수(유리수와 2의 제곱근과 원주율 파이 같은 무리수)의 개수도 무한이다. 하지만 자연수의 개수는, 유리수의 개수와 같고, 실수의 개수보다 작다. 부분의 크기가 전체의 크기와 같은 기묘한 현상이 발생한다. 부분이 전체를 포함하기도 한다. 구체적으로는 0과 1 사이에 모든 실수를, 문자 그대로 모든 실수를, 집어넣을 수 있다. 일종의 일미진중함시방(一微震中含時方)이다. 그 방법은 이렇다. 길이 1의 작은 선분을 반원 형태로 구부려 무한이 긴 직선 위에 놓는다. 선분 위의 점들은 0과 1사이의 수들이고, 직선 위의 점들은 모든 실수이다. 그리고 반원의 중심에 광원(光源)을 놓고 빛을 비춘다. 이 빛이 (투명한) 반원을 뚫고 직선에 닿을 때, 반원과 직선 위의 점을 서로 대응시키는 것이다. 이리하면 직선 위의 무한한 점들을 반원 위의 점들에 하나씩 대응시킬 수 있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81호 / 2019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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