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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카노 모토노부의 ‘향엄격죽도(香嚴擊竹圖)’

기자명 김영욱

글자 안다고 그 뜻을 아는 건 아니다

그림의 떡 허기 달랠 수 없듯
머릿속 지식 깨달음과는 무관
알음알이가 수행에 가장 큰 병
부처님도 아난에 선정 당부해

카노 모토노부 作 ‘향엄격죽도’ 조사도 장벽화 중 부분, 종이에 먹과 채색, 176.0×91.8㎝, 16세기,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龍吟枯木猶生喜(용음고목유생희)
髑髏生光識轉幽(촉루생광식전유)
磊落一聲空粉碎(뇌락일성공분쇄)
月波千里放孤舟(월파천리방고주)

‘고목에 용이 우니 외려 기쁘기만 한데 해골에 빛이 나니 알음알이 되레 깊어져만 가네. 벽력같은 소리에 허공은 가루처럼 부서지고 달빛 천 리 물결에 외로운 배 한 척 떠 있다네.’ 인오(印悟, 1548~1623)의 ‘향엄이 대나무를 치다(香嚴擊竹)’.

찬 새벽인 듯 짙은 골안개가 암자 주변을 감싼다. 서늘한 기운 느낀 선사가 긴 대나무 있는 앞마당으로 나왔다. 쓱 쓱, 고요한 자연 중에 일정한 빗자루질 소리가 듣기 좋게 퍼진다. 삭 삭, 두 손에 쥔 비가 지나가니 땅은 제 얼굴을 드러낸다. 땅의 민얼굴을 덮었던 대나무 잎과 잡초가 서로 엉키고 설키다가 이리저리 치인다. 텅, 그 안에 엉키던 작은 기왓조각이 빈 대나무를 치며 소리를 냈다. 이윽고 선사의 빗자루질 소리가 멈췄다.

선사는 왜 작은 기왓조각이 대나무를 친 소리에 빗자루질을 멈추었을까. 그는 당나라 때 활동한 향엄지한(香嚴智閑, ?~898)이다. 향엄은 어렸을 적부터 하나를 알면 열을 알고 열을 알면 백을 알 정도로 매우 총명했다. 불문에 귀의하여 백장회해 선사 아래에서 자리를 잡았으나, 이내 선사가 입적하자 위산영우(潙山靈祐, 771~853)에게로 가서 수행에 정진했다.

그의 총명한 사실을 접했던 위산 선사가 “일찍이 네가 총명하여 머리에 든 모든 것을 이해한다고 들었다. 이에 경전을 통해 기억하는 것은 묻지 않겠으니, 네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에 대해 한 구절만 이야기해보게나”라고 했다. 며칠 동안 답을 찾으려고 노력했던 향엄은 “그림에 그려진 떡으로 허기를 달랠 수 없는 것처럼, 머리에 든 지식으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라며 가르침을 청했다. 그러나 위산 선사는 “내가 말한다면 그건 내 것이지, 네 것이 되지 않는다”라며 거절했다. 이에 향엄은 모든 책을 불사르고 하남성 남양에 있는 작은 암자에 머무르며 답을 찾고자 했다.

향엄은 대나무에 작은 기왓조각이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모든 알음알이가 날아가며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그는 위산 선사가 있는 방향으로 예배하며 말했다. “만일 그때 제게 가르침을 주셨다면, 이 기쁨의 순간을 맞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불가에 ‘다문지해(多聞知解)’라는 말이 있다. 들은 것이 많아 알음알이만 있다는 것으로, 불가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병이다. 이 병에 빠진 아난(阿難)도 석존에게 “네가 아무리 여래의 말씀을 억만번 듣고 왼다 한들, 하루 동안 선정(禪定)하는 것만 못하느니라”라는 질책을 항상 받았었다.

경전의 글자를 안다고 그 글자의 뜻을 아는 것은 아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의 차이인 것이다. 남의 지혜는 나의 지혜(智慧)가 아니라, 한낱 나의 지해일 뿐이다.

김영욱 한국전통문화대 강사 zodiacknight@hanmail.net

 

[1481호 / 2019년 3월 20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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