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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매력적인  또 하나의 세계일화(끝)

순박한 신심, 신비한 자연, 짜릿한 모험…라오스 순례길에 多 만난다

시암에 점령당하며 왕국 종식
비엔티엔 最古 사원 왓시사케
태국건축양식 덕에 파괴 면해

독립 후 내전 겪으며 공산화
불교계 정권의 통제 받지만
국민들 신심은 견고히 계승

​​​​​​​개방 시작되며 조금씩 변화
젊은 층엔 엑티비티 성지로
새로운 순례문화 만들어가며
라오스불교와의 교류 넓혀야

비엔티엔에서 가장 오래된 사원인 왓시사케는 지금도 라오스 최고의 불교 성지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1818년 건립된 사원이 시암의 침공으로부터 파괴를 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시암의 식민 지배 시기에 건축된 태국양식의 사원이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도시 루앙프라방의 아침은 황색 가사를 두른 스님들의 느린 걸음으로 시작된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 루앙프라방 시가지를 가로지르는 긴 탁발행렬은 이 도시의 트레이드마크이자 라오스를 찾는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문화체험기회다. 

란쌍왕국의 마지막 계승자였던 루앙프라방왕국, 그 중심지였던 루앙프라방은 옛 왕국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도시이자 오늘날 라오스불교의 단면을 보여주는 현장이다. 

1694년 수린야웡사가 후계자를 정하지 못하고 사망한 후 란쌍왕국은 사실상 막을 내린다. 후손들은 위엥짠(비엔티엔), 루앙프라방, 참파삭 3개의 소왕국으로 분열된다. 주변국의 급변하는 정세도 란쌍왕국을 더욱 괴롭혔다. 동쪽의 베트남, 서쪽의 미얀마, 북쪽의 중국과 고산족, 남쪽의 시암(태국)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특히 시암은 1777년 참파삭 왕국을 시작으로 1779년 위엥짠과 루앙프라방을 모두 점령하며 옛 란쌍왕국을 식민지배한다. 란쌍왕국 전역이 태국의 속국이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특히 1778년 위엥짠을 점령한 시암은 프라케오와 프라방 불상을 모두 시암으로 가져간다. 프라방은 1860년 반환됐지만 프라케오는 지금까지도 태국의 왕실사원에 봉안돼 있다. 라오스를 지배하게 된 시암은 위엥짠과 루앙프라방, 참파삭에 각각 ‘짜오’라 불리는 왕을 두어 란쌍왕조의 후손들이 각 지역을 다스리게 했다. 하지만 이는 분열정책의 일환이었으며 결국 시암의 의도대로 각 지역은 서로 반목과 경쟁을 벌이며 단합된 국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만다. 

시암 지배 흔적은 비엔티엔의 사원 왓시사케에서 보인다. 1818년 건립된 이 사원은 본당 주변으로 회랑을 두르는 태국사원양식으로 건축됐다. 덕분에 1827년 비엔티엔을 초토화시켰던 시암의 공격에도 파괴되지 않고 무사히 살아남았다. 현재는 비엔티엔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손꼽히며 참배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라오스 대표 사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1805년 위엥짠왕국의 짜오로 등극한 아누웡은 루앙프라방과 참파삭, 치앙마이 등의 세력을 규합, 독립을 위한 군사행동을 시도했다. 하지만 힘은 미약했고 결과는 처참했다. 1827년 1만4000여명에 불과했던 아누웡의 연합군은 16만명에 달했던 시암군에 완패했다. 위엥짠은 철저히 파괴당했고 주민 대부분은 메콩강 건너 시암의 열대우림지로 강제이주 당했다. 주민들은 개간 작업에 동원됐다. 아누왕은 베트남으로 도망쳤지만 결국 사로잡혀 가족과 함께 방콕으로 압송됐다. 당시 방콕에서 활동하던 한 독일인 선교사는 아누웡이 ‘고문도구들이 보이는 철장 안에 갇혀 피로와 학대로 기운이 소진해 죽었다’고 기록했다.
 

라오스순례를 이끈 자현 스님과 도반들. 

이 사건에 대해 태국의 역사는 점령지위엥짠의 지휘관에 불과했던 아누웡의 반란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라오스역사는 식민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란쌍왕국의 후예가 벌였던 시암과의 독립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아누웡의 저항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웃국과 벌인 라오스역사 최대 규모의 무력투쟁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라오스인들의 평가가 각별한 것도 당연하다.

하지만 그것이 반란이든, 전쟁이든 아누웡의 저항은 란쌍왕국이 보여준 사실상의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이후 란쌍의 후손들은 이렇다 할 저항이나 움직임을 보여주지 못했다. 시암과 베트남의 침입과 점령은 반복됐다.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인도차이나반도 진출과 점령이 가속화되면서 라오스는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게 된다. 프랑스는 위엥짠, 참파삭, 그리고 루앙프라방왕국에 대한 종주권을 시암으로부터 넘겨받은 후 3개의 소왕국이 자리하고 있는 지역을 통합해 ‘라오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비록 루앙프라방왕국은 1975년 라오스에서 공식적으로 군주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명맥을 이어갔지만 왕국은 이미 식물상태에 빠져든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라오스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후 벌어진 베트남전쟁과 공산화 등에 또다시 휩싸이며 내전이 벌어진다. 1975년 파테트라오 집권까지 혼란기는 계속된다. 현대의 라오스역사도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았다. 공산정권의 장기독재, 그리고 심각한 경제난은 라오스국민들의 삶을 옥죄었다. 

1947년 라오스는 독립하며 헌법에 불교를 국교로 명시했다. 덕분에 불교는 라오스 국민 개개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 잡으며 다시 한 번 부흥의 기회를 잡은 듯 보였다. 하지만 곧이어 벌어진 집권세력의 분열과 노선 대립으로 라오스불교계도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미국의 지원을 받는 우파왕정세력, 그리고 공산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파테트라오의 대립은 초기 우파왕정세력이 우위를 점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미 사분오열돼 있던 란쌍왕조의 후예, 즉 왕족들 중에는 파테트라오에 깊숙이 가담한 인물들도 많았다. 이들은 불교계가 파테트라오와 손잡는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복잡한 정치적 계산과 전략전술들이 횡횡했고 불교는 “평등한 세상을 추구했던 붓다의 사상은 공산주의와 맥을 같이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파테트라오와 손을 잡았다. 전국의 사원과 스님들은 파테트라오가 전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산하는 주요 통로가 되었다. 1975년 파테트라오가 정권을 잡았다. 집권당이 된 라오인민혁명당은 파탓루앙에서 대규모 축하집회를 가졌다. 라오스 최고의 불교성지에서 열린 공산정권의 집권 축하 집회는 라오스불교의 운명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현재 라오스불교계는 ‘상가라자’로 불리는 최고지도자(승왕)를 중심으로 구성된 장로회에서 교단의 주요 정책을 결정한다. 자치권을 갖고 있는 듯 보이지만 교단은 어디까지나 라오스국가건설전선 종교부의 관장 아래 있다. 이러한 구조 속에서 사원은 각 지역의 교육, 문화의 중심지로 위상을 이어가고 있다. 전 국민의 98%가 불자로 분류되는 이유는 이러한 통치체계와도 무관하지 않다.

루앙프라방의 아침을 여는 스님들의 탁발.

정치야 어찌되었든, 국민들의 생활 속에 불교가 깊숙이 자리 잡았고 그들의 신심은 여전히 견고하다. 루앙프라방의 아침을 깨우는 탁발행렬은 라오스불교의 오늘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신행의 현장이다. 그런가 하면 탁발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수행과 신행에도 관광객과 관광산업이 스며들고 있다는 점 또한 오늘날 라오스, 라오스불교계의 현실이다. 루앙프라방을 방문한 관광객들은 인근 상점의 상인들이 관광객을 위해 마련한 보시물과 자리를 구입해 주민들과 함께 탁발에 동참한다. 관광객들에게는 이색적인 체험행사이며 불자들에게는 공덕의 기회가 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라오스 상인들에게 ‘탁발체험’은 점점 더 중요한 상품이 될 것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순례자의 몫이 아니다. 오랜 경제봉쇄와 폐쇄적인 정책으로 인해 라오스의 시간은 느리게 흘렀다. 오랜 세월 멈춰있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 조금씩 문을 여는 라오스에서 변화는 더 빠르게 보일 뿐이다. 
 

불상으로 가득한 신비로운 빡우동굴.
코끼리모양 종유석이 눈길을 끄는 탐쌍동굴. 
자연이 만들어 놓은 워터파크 블루라군.

잘 보존된 자연은 라오스의 가장 큰 매력과 즐거움 가운데 하나다. 라오스 중부의 작은 시골마을 방비엥은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진 라오스 최고의 관광지다. ‘요정이 나올 것 같은 숲속의 푸른 연못’ 블루라군은 젊은이들에게 라오스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다. 버기카로 불리는 오프로드 전용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고,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신비로운 동굴을 탐험하며, 짚라인에 매달려 산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를 날아(?)다니는 짜릿한 체험도 라오스에서 빼놓을 수 없다. 성지순례객들도 라오스에서 만큼은 신심 가득한 순례의 길 사이사이 즐거운 체험을 만끽하게 된다. 라오스를 찾는 순례객들 속에 유독 젊은 층이 많은 이유이기도 하다.

버기카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는 즐거움도 라오스에서 만날 수 있는 매력이다. 

이제 세상을 향해 문을 여는 라오스 정치, 경제 그리고 종교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알려지지 않았기에 그들이 보여주는 삶과 문화는 이색적이고 우리의 눈은 호기심으로 덮여있다. 무조건적인 찬양도, 근거없는 비난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삶 속에 부처님의 가르침이 이어지고 있다면 그들은 우리의 도반이며 세계일화의 한 송이 꽃이다. 그 꽃이 더욱 아름답고 크게 피어오를 수 있도록, 자신만의 향기를 더욱 진하게 만들어갈 수 있도록 바라보고 기다려주면 된다. 그렇게 라오스로 가는 길이 조금씩 넓어지길 염원하며 연재를 마친다.


 namsy@beopbo.com

 

[1482호 / 2019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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