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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불교와 수학-무한 유한-하

불교는 ‘나’를 부인해 무한한 삶의 무의미성 드러내

불교서 시간은 시작과 끝 없어
기독교의 시간은 시작이 있어
과거현재미래의 나가 없으니
동일한 나가 없어서 결국 무아

사람들은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이 변하지 않기를 바란다. 유한히 살면서도 영원히 바뀌지 않기를 희망한다. 미모·건강·재물·수명이 영원히 유지되기를 바란다. 무한한 능력을 가진 존재를 만들어 그가 자기들의 소원을 다 해결해 준다고 주장한다. 코끼리를 냉장고에 집어넣는 방법과 같다. ‘냉장고 문을 열고 집어넣는다.’ 작은 냉장고에 큰 코끼리를 어떻게 집어넣을 수 있는지 의문과 질문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냥 선언한다. 문을 열고 집어넣으면 된다고 선언한다.

인간의 욕망은 유한하다. 몸도 마음도 수명도 유한하다. 그런데 무한한 능력을 가진 신을 필요로 한다. 불사사의한 일이다.

무한, 즉 무한한 성질을 다 조사할 수 없는 것은 인간 인식능력의 유한성으로부터 온다. 즉 마음의 유한함으로부터 온다. 일부종교는 인간의 마음, 나아가 모든 동물의 마음에, 무한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아무 증거가 없는 빈 선언일 뿐이다. 오히려 반대증거만 있다.

불교는, 같은 아(我 나)를 부인함으로써, 무한한 삶의 무의미성을 드러낸다. 전 순간의 아와 다음 순간의 아가 같은 아가 아니라는 걸 밝혀, 영원히 사는 존재가 없음을 밝힌다.

불교도들은 시간은 무한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그러한가 생각해 보자. 불교는 인과론을 주장한다. 생명체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금생은 전생에 쌓은 업(業 카르마)의 결과물이라고 한다. 그러면 어느 생이든지 전생이 있으므로, 과거 생이 무한 번 생기게 된다. 따라서 과거는 무한한 시간이다. 빅뱅(Big Bang)이 결코 시작이 될 수 없다. 빅뱅 전에도 다른 빅뱅이 있어야 한다. 이에 비해 기독교에 따르면 시간은 시작이 있다. 시간과 공간은 신의 창조물이다. 창조자가 창조물 속에 있을 수 없으므로, 신은 시공의 밖에 있다. 모든 창조물은 시작이 있다. 그러므로 시간은 시작이 있다. 영혼도 시작이 있다. 하지만 불교의 영혼은 시작이 없다. 윤회를 하는 주체는 미세의식이건 알라야식이건, 무엇이라고 부르건 간에, 시작이 없다.

과거의 사건도 무한하고, 기억도 무한하다. 깨달음을 얻어 모두 다 기억한다면 무한한 사건을 다 기억해야 한다. 우리 두뇌의 용량은 유한하므로 두뇌 밖에 그 기억이 있어야 한다. 요즘 말로 하자면 클라우드가 있어야 한다. 물론 이 클라우드의 용량은 무한이다. 이 경우 부처가 되면 생기는 능력 중 하나는 이 클라우드에 마음대로 접속할 능력이다. 우주의 정보를 다 저장하고 있는 창고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 창고에 접속하기만 하면 모든 정보를 다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설사 원자력발전소를 짓는 원리와 도면을 본다고 해도, 비전문가라면 하나도 이해하지도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생각은 망상이다. 예를 들어 우학도인 권태훈 옹은 자신이 젊은 시절에 산에서 선도수련을 할 때 선계에 가서 신무기의 설계도면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엄밀히 수학적으로 말하자면, 시간은 시작이 없어도 과거는 유한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전생의 수명이 금생의 반이고, 전전생의 수명이 전생의 반이고, 이런 식으로 어떤 생의 수명이 바로 전 생 수명의 반이라면, 전생은 무한 번 펼쳐지지만, 전체 수명은 금생 수명의 2배를 넘지 못한다. 즉 과거가 유한한 시간이 된다. 하지만 시작은 없다. 시작이 없는데 과거는 유한한,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미래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수명이 짧아진다면, 예를 들어 다음 생은 금생의 반, 다다음 생은 다음 생의 반, 이런 식으로 어떤 생의 수명이 바로 전 생의 수명의 반이라면, 내생은 무한 번 펼쳐지지만, 전체 수명은 금생의 2배를 넘지 못한다. 미래는 끝이 없이 이어지지만 총량은 유한한 시간이 된다. 결국 과거·현재·미래 시간 전체가 유한이 될 수 있다. 시간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지만, 생명체는 무한 번 윤회를 하며 살 수 있다. 물론 모든 생명체가 그럴 수도 있고, 일부만 그럴 수도 있다.

찰나보다 짧은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혹자는 물을지 모르지만, 감히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정신이 물질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기능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리 말할 수 없다.

강병균 포항공대 수학과 교수 bgkang@postech.ac.kr

 

[1483호 / 2019년 4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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