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길은 찾는 것이고 몸의 길은 세우는 것이구나. 내 일찍이 마음 길은 분명하게 찾아 흔들림 없이 가고 있는데, 한 번 잃어버린 몸의 길을 세우는 것은 마음 길을 찾는 것보다 훨씬 더 힘들구나.’ (허허당 ‘시시-콜콜’중에서)
‘시시-콜콜’은 허허당 스님이 지난 30여년 동안 앓아온 통증에 대한 단상이요 독백이다. 첫 전시는 ‘빈 마음의 노래’(1984)였다.
수백, 수천의 동자가 어우러진 중중무진의 세계에 탑이 서고, 달이 뜨고, 꽃이 피었다. 무심에서 툭 터져 나온 붓선과 색감에서 누군가는 세속의 번뇌를 털어버린 청량함을 읽어내고, 또 누군가는 등뼈만을 꼿꼿이 세운 수행자 품에 배어있는 고독을 직감했다. 자신만의 선화(禪畵) 풍을 완성하고는 ‘미친 듯’ 작품 활동에 매진했다. 그 때, 목 디스크와 이명, 어지럼증을 얻었다.
목의 신경이 짓눌릴 때마다 ‘저림’은 어깨와 팔을 거쳐 손끝까지 내려왔고, 그 통증은 다시 머리까지 치고 올라왔다.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밤낮으로 식은땀을 흘리며 오지게’ 아픈 날이 부지기수다. 3평 남짓한 토굴(휴유암)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눈물 한 방울 떨어진 된장찌개’로 숨 한 번 돌리는 것뿐이다. 그 고통 그대로 안고 1년 2개월의 칩거 끝에 100만 동자를 담은 대작 ‘새벽’을 완성 했다.(2009) 생명의 고귀함을 전하려 한 초인적 의지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했을 터다.
너무 아프면 길을 떠났다. 7개월 투병 끝에 ‘이대로 누워만 있을 수 없다’며 침상을 박차고 나와 20점의 그림을 말아 걸망에 넣고는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던 허허당 스님이다. 벨기에 리에주프로방스(Province de Liege)의 샤또 데 라해(Chateau de Rahier) 화랑에서 열린 ‘생명의 축제전’은 그 여정에서 열렸다. 그래도 너무 아파 견디기 어려우면 시베리아 벌판에 서고, 강원도 눈밭에 드러누웠다. 강한 추위에 찰나적이나마 통증을 잊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으리라.
‘아하! 이제 너희들의 본성을 알았으니 얼른 몸을 떠나라. 그렇지 않으면 다시 시베리아로 가든지 아니면 남극이나 북극에 가서 펭귄들과 살터이니. 좋은 말할 때 떠나라. 언능 떠나라.’
허허당 스님은 안다. ‘아프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여 “통증만큼 자신의 삶을 통렬히 바라보게 하는 것도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그리고 선화가 이전의 선사로서 한 마디 이른다.
‘나그네의 여행은 시위도 과녁도 없다. 다만 나르는 순간이 있을 뿐이다. 들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처럼 오늘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날 절정의 꽃을 피우길 바란다. 생의 절정 찔레꽃 가지가 힘차게 뻗는다. 언덕 위에 핀 꽃은 바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막에서 부는 바람은 쓸쓸함을 모른다.’
허허당 스님만의 시시콜콜한 이야기이자 통증에서 길어 올린 아포리즘이다. 1만5000원.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1485 / 2019년 4월 1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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