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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와불(臥佛), 일어서다 ① - 진광 스님

기자명 진광 스님

열반 들기 전 누워계신 부처님
비구들 물과 물처럼 화합하고 
자신 등불삼아 정진할 것 당부

운주사 천불천탑 조성한 까닭은 
새 세상 열린다는 예언서 비롯
새 세상엔 와불 일어날 것 믿어

그림=허재경
그림=허재경

우리가 알고 있는 불기(佛紀) 2563년은 부처님의 탄생이나 성도가 기준이 아니라 부처님의 열반, 즉 불멸(佛滅)을 기점으로 한다. 왜 탄생이나 성도가 아니라 부처님의 열반을 기점으로 한 걸까? 그리 한 것은 부처님이 선포하신 진리의 말씀이 열반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믿고 있다. 열반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을 위한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이 시작된 것이리라.

인도 불적순례를 갔을 적에 쿠시나가르의 열반당에서 처음 부처님 열반상을 마주했을 때의 감동과 환희는 결코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끝과 같은 절망과 비애를 뛰어넘어 새로운 꿈과 희망의 시작이라는, 일종의 장엄함과 지극함이 아니었나 싶다. 아난 존자는 스승의 입멸 앞에서 슬픔에 겨워 울부짖고 있었고 모든 제자들 또한 하늘이 무너지듯 한 황망한 표정들이었다. 우리 은사이신 법장 스님께서 입적할 때도, 속가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의 내 모습을 보는 듯하여 가슴 뭉클 했었다. 

그런 제자들에게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아! 너희들은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돌지 말고 물과 물처럼 화합하라. 만약에 내가 간 후에라도 결코 교단의 지도자가 없어졌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내가 가르친 진리를 등불로 삼아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모든 것은 덧없다. 부지런히 열심히 정진하라!”고 고구정녕 이르시고는 마침내 열반에 드셨다.

우리와는 달리 동남아 불교국가에는 와불을 조성하는 전통이 있는 듯하다. 태국 방콕의 왓포 사원, 캄보디아 씨엠립의 왓쁘레아암통 사원, 미얀마 양곤의 차욱탓지 사원의 와불이 특히 유명하다.

대학시절 전국을 무전여행하며 전남 화순의 운주사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우리네 민중의 얼굴 모습을 한 미륵석불들이 군데군데 자리한다. 모두가 우리 이웃이자 민중들의 삶과 얼굴을 묘하게 닮아 있었다. 할아버지 부처, 할머니 부처, 머슴 부처, 아이 부처 등등 모두가 친근한 못난이 부처들이다. 아마도 조성 당시의 이름 없는 민중들의 얼굴과 마음속의 애환과 간절한 염원들이 석불마다 오롯하게 깃들어 있는 듯 했다. 누가 왜 이곳에 이런 엄청난 불사를 했는지 알 수 없지만 현생이 힘들고 괴로울수록 내생과 미륵을 기다리는 민중들의 염원이 이룩한 용화세상, 그것이 바로 운주사이자 천불천탑이 아닌가 생각한다. 그런 까닭에 운주사 천불천탑은 당대 중생들의 모습이자 염원 그 자체였을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산등성이 북두칠성 모양의 저마다 그 크기가 다른 동그란 돌과 이른바 운주사 와불로 불리는 누운 부처님이다. 운주사 와불은 남성과 여성 두 기의 석불이 하늘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누워있는 형상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부부 부처라고도 한다. 하기야 서산마애삼존불도 동네 사람들은 부처님 좌우의 협시보살을 본부인이나 첩이라고 했으니 그럴 듯한 표현이다. 

전설에 의하면 도선 국사가 운주사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예언을 믿고 하늘에서 선동선녀를 불러 탑과 불상을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두 불상만 일으켜 세울 일만 남았는데 그만 지친 상좌가 꾀를 내어 닭 울음소리를 내자 날이 샌 줄로만 안 선동선녀가 하늘로 올라가 버려서 두 기의 석불이 와불로 남았다고 한다.

이런 전설에 황석영의 역사소설 ‘장길산’ 말미에 보면 “우리가 세상의 밑바닥에 처박힌 것처럼 미륵님도 처박혀 있는 게야. 세상이 거꾸로 되었으니 상수하족(上首下足)은 커녕 상족하수(上足下首)가 맞네. 그래야만 우리가 힘을 합쳐 바로 일으켜 세울 것이 아닌가. 이 미륵님만 일으켜 세워 드리면 세상이 바뀐다네.”라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이를 근거로 미륵님이 출현하거나 민중이 주인 되는 새 세상이 도래하면 ‘운주사 와불도 벌떡 일어나리라’라는 희망의 전설 같은 이야기가 생겨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득 조성국 시인의 ‘운주사 와불’이란 시가 생각나 읊어본다. 

“누워 있는 것이 아니다 / 걷고 있는 거다 저문 하늘에 / 빛나는 북극성 좌표삼아 / 천지간을 사분사분 밟으며 오르고 있다 / 등명(燈明)의 눈빛 치뜬 연인과 / 나란히 맞댄 어깨 죽지가 욱신거리도록 / 이 세상 짊어지고 / 저 광활한 우주로 내 딛는 중이다 // 무릇 당신도 등짐 속의 한 짐!” 

마지막 구절이 그야말로 절창이다.

중국의 작가 위화(余華)는 ‘살아간다는 것은(活着)’이란 소설에서 “인생은 무거운 등짐을 진 채, 머나 먼 길을 걸어가는 것과 같다”라고 말했다. 누군가의 짐이 아니라 누군가의 짐을 나누어 짊어지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 운주사 와불처럼 이 세상과 중생의 짐을 이고 진 채, 세상과 중생에게로 당당히 걸어가고 싶다. 

운주사 와불 옆에 누워 꿈을 꾸어 본다. 민초들의 새 벗이 되고, 그들을 하늘로 알고 섬기노라면 운주사 와불은 어느 날 시나브로 일어나 새로운 세상을 열 것이라고 생각한다. 새 날, 새 세상, 새 사람만이 오늘과 내일의 희망이자 깨달음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흔히 백성과 중생을 가리켜 ‘민초(民草)’라고 한다. 김수영 시인의 ‘풀’이란 시에 “풀이 눕는다 / 비를 몰아내는 동풍에 나부껴 / 풀은 눕고 / 드디어 울었다 /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 풀이 눕는다 / 바람보다 빨리 눕는다 /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 …(중략)… /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라고 노래한다. 풀처럼 민초도 ‘눕고 울지만 끝내 일어나며 웃는’ 존재일 것이다. 그러니 중생의 또 다른 모습인 부처도 끝내 그 자리에서 당당히 일어나며 웃으리라. 그 날이 오면, 아니 지금 여기에서.

드디어 그때가 왔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今此) 우리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운주사 와불을 일으켜 세우자. 미륵님이 올 때까지 혹은 어느 초인이 오기를 마냥 기다릴 순 없는 일이다. 운주사 와불이 일어나 웃으며 세상 속으로 당당한 발걸음을 옮기고 있으니 모두 그 뒤를 따라 새 날, 새 세상, 새 사람이 됨이 옳지 않겠는가. 우리 모두 한 마음으로, 더불어 함께 가는(一心同行) 그 길의 도반(道伴)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광 스님 조계종 교육부장 vivachejk@hanmail.net

 

[1487 / 2019년 5월 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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