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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수기 당선작] 동국대 총장상 - 허인영

기자명 법보

거룩한 꽃과 잎들의 지극한 정성 일깨워 준 봉정암 순례길

봉정암으로 향하는 순례길 
40년 교직인생 정리하면서 
나 자신에게 준 위로의 길

유년시절 할머니와 어머니
염불소리 들으면서 잠들어
아버지 부처님이야기 일상
집안 전체 항상 불심 가득

교직생활 하던 중 알게 된
복지시설 진여원 열악함에
동료교사와 십시일반 정성
23년째 기부 이어져 감동
쉼없이 노력한 인연에 감사

그림=육순호
그림=육순호

설렘과 긴장으로 잠을 설쳤다. 우리 일행은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에 도착해 셔틀버스를 타고 백담사 주차장에서 내렸다. 신발 끈과 마음자락을 단단히 묶었다. 여린 새순이 겨우 얼굴을 내밀기 시작하는 계곡에는 생강나무의 노랑 솜꽃이 봄바람에 살랑거리고 있었다. 동행한 분들이 나눠 주는 결연한 웃음의 의미를 말없이 새기면서 걷기 시작하였다. 4월 산바람이 아직도 차갑게 옷 속을 파고들어 늘어진 마음을 잡아주었다. 이번 성지순례는 8월 말이면 긴 교직생활을 끝내고 교단을 떠나 인생 제2막을 시작하는 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우리는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한번 되돌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자신은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지 살필 수 있어야 한다”던 법정 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나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소중한 기회이기도 했다. 

나의 유년시절은 할머니와 어머니의 염불소리를 들으며 잠드는 날이 많았다. 초하루와 보름이 다가오면 정성스럽게 절에 갈 준비를 하시던 어머니 뒷모습은 늘 신중하고 경건하셨다. 또한 교단에서 평생을 보내셨던 아버지의 부처님 이야기는 재미를 넘어서 신비롭기까지 했다.

사범대학 졸업 후 모교에서 교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새내기 선생의 학교생활은 좌충우돌이었고 열정이 앞서 실수도 많았으나 은사님과 선배 선생님들의 지도로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1984년 중학교 2학년 학생들을 인솔하여 해인사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의 일이다. 우리 학생들에게 법보사찰의 의미와 사찰 관람 태도를 지도한 후 희망을 받아 부처님께 절하러 갈 학생들을 데리고 법당으로 갔다. 호기심 반, 장난 반으로 따라 온 학생들이 “선생님! 공부 잘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말하면서 절해도 되나요?”라고 물어 “‘그래, 공부 잘하게 해주세요’하면서 세 번 절을 해라”라고 대답을 했다. 그 순간 뒤쪽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착한 사람이 되겠습니다. 다짐하며 절을 하여라”라는 묵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한 법당에 울려 퍼진 그 소리는 성스럽기까지 했으나 부끄럽고 창피해서 뒤를 돌아볼 자신이 없었다. 학생들과 삼배를 올리고 조심스럽게 주위를 살폈으나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아마도 뒤따라 오셨던 스님이셨거나 관광객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나에겐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깊은 울림이 되어 불교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연하게 나의 종교가 불교라고 생각만 했던 탓에 간단한 질문에도 어설픈 대답을 하는 교사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초파일 불자’였던 것이다. 

수학여행을 다녀와서 체계적인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 곳 저 곳을 기웃거렸다. 수학여행에서 느꼈던 부끄러움과 부처님을 찾아다니던 의지도, 갈구하던 마음공부도 구체화되는 것이 없자 점차 일상생활 속으로 묻혀 갔다. 불교와 관련된 다양한 책을 찾던 중 자연스럽게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만나게 되었다. 법정 스님의 체취와 절집 풍경 그리고 부처님의 법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맑고 향기롭게’ 활동 하시는 모습을 뵙고 작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막연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불자의 사회실천운동의 방향을 법정 스님이 알려주셨던 것이다. 사회복지시설 진여원과의 인연은 그 때부터 시작되었다. 1997년 남편이 충주시 동량면 지역 향토 지명 조사를 한다기에 따라 나섰다가 ‘진여원’이라는 사회복지시설이 있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찾아 갔더니 비구니 보림 스님이 갈 곳 없는 아이들, 노인들과 함께 가건물에서 생활하고 계셨다. 자세히 알아보니 ‘소쩍새 마을’을 운영하던 스님이 충주에 사회복지시설을 마련하려고 대지를 준비하셨으나 후원금 관리 및 운영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어 그 스님은 떠나시고 남은 가족들과 어렵게 생활하고 계시는 곳이었다. 여러 문제가 야기되어 홍역을 치른 후라서 봉사자도, 후원금도 거의 끊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진여원을 나오면서 너무 열악한 임시 건물에서 스님 혼자 많은 식구들을 위해 애쓰시는 모습이 매우 안타까웠다. 진여원을 다녀와서 남편에게 후원금을 보내면 좋겠다고 했더니 적극 호응하였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힘이 미약했으므로 각자 학교에 홍보하여 십시일반으로 모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직원 조회시간에 선생님들에게 진여원에 대한 설명을 하고 안내문을 붙여 도와줄 것을 호소하였다. 

1997년 10월이었다.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진여원에 대하여 많은 분들이 알고 있었으나 상당부분 왜곡된 내용도 많았고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다. 그러나 어려운 이웃을 돕자는 취지에 여러 선생님들이 정성을 모아주셨다. 매월 월급날이 되면 한분 한분이 주시는 성금을 모으는 즐거움과  따뜻한 미소를 나누어 주시는 선생님들을 만나는 기쁨은 매우 컸다. 그 때 시작한 진여원 돕기는 2019년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금액이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마음을 모아 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23년째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재단 인사이동으로 우리 학교(충주북여중)에 계시던 분들이 한림디자인고등학교로 가셔서 지금은 우리 학교 15명, 고등학교 10명, 총 25명이 매달 기부하고 있다. 매달 보내던 성금도 양쪽 학교로 나뉘다 보니 모으기가 쉽지 않아 고등학교 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몇 달 씩 묶어서 보내고 있다. 또한 남편이 충주대원고등학교에 근무해서 그 곳에도 홍보해 20여명이 기부를 하시다가 남편이 퇴직을 하면서 현재는 14명이 매월 기부하고 있다.

진여원은 초기에 고생을 많이 하셨던 보림 스님이 시설 및 모든 재산을 조계종단으로 넘기신 후 작은 암자로 옮겨 수행을 하고 계신다. 현재는 원주 성불원 산하기관으로 사회봉사활동을 많이 하시는 현각 스님이 이사장님이시고 주지 혜원 스님이 운영하고 계신다. 

2010년 3월 봄날! 오늘처럼 꽃바람이 불던 날 슬픈 소식이 들려왔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TV 뉴스에서 보았다. 편찮으셔서 제주도에서 요양하신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너무도 일찍 가셔서 매우 슬프고 상실감이 컸다. 평소에 입으셨던 옷차림 그대로 평상에 누워 가시던 마지막 모습은 아직도 수채화처럼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름다운 마무리’였다. 스님의 타계 소식은 불교 신도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에게도 큰 슬픔을 안겨주었다. 신심이 깊으셨던 어머니는 나보다 더 가슴 아파 하셨다. 다비식을 지켜보면서 스님의 따뜻하지만 정신을 일깨워 주시는 ‘오두막 편지’를 받지 못하게 될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슬펐다. ‘텅 빈 충만’의 소중함이 얼마나 감사한 마음이었는지 법정  스님이 가시고 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2011년 3월, 내 탯줄이셨던 어머니도 “꽃피는 봄날, 스님처럼 가고 싶다”고 말씀하시더니 일 년 뒤에 거짓말처럼 꽃바람이 불던 날 자연으로 돌아가셨다. 작은 육신의 어머니가 떠나시고 나니 온 세상은 또 다른 어머니로 가득하였다. 활짝 핀 매화꽃을 보면 어머니 얼굴이 보였고, 콩나물을 무치며 맡은 참기름에서도 어머니 냄새가 났다. 엄마의 온기가 그리울 때면 늘 손에 쥐고 염불을 하셨던 염주를 매만지거나, 생전에 즐겨 들으셨던 금강경 독송을 들으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곤 한다.

봉정암은 가도 가도 보이지 않았다. 발이 뜨거워져서 냇가에 앉아 식히기도 했고, 간식을 먹으며 에너지를 보충하기도 하고 아름다운 주변 풍경과 신선한 바람을 길동무 삼아 열심히 갔음에도 멀기만 했다. 지쳐서 주저앉고 싶을 때 멀리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 소리에 힘을 얻어 다시 걸으니 드디어 부처님집이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 상서로운 기운과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함에 압도되었다. 표현하기 어려운 충만감에 그냥 바라보며 가슴으로 느끼기만 하였다. 이렇게 부처님 옷자락을 놓치지 않고 봉정암까지 올 수 있는 귀한 인연들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였다. 수많은 인연 덕분이지만 특히 유년시절 늘 염주를 들고 염불하시던 외할머니의 곧은 뒷모습에서 불교의 그림자를 보았고, 평생 불심으로 생활하셨던 어머니를 통하여 부처님의 자비를 배웠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49재를 올리러 음성 미타사에 갔을 때 함께 신행 활동을 하시던 보살님들이 “어머니와 함께 철야기도를 하면 신심이 저절로 생겼다”는 등 어머니 옛 모습을 말씀해 주셔서 돌아가신 뒤 또 다른 어머니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으니 ‘영혼의 모음(母音)’이었다. 그리고 한 번도 직접 뵙지 못했지만 나에게 불법의 향기와 삶의 안목을 일러주신 법정 스님이 계셨다. 어렵고 힘들 때 스님의 책을 읽으며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고, 흐트러진 자세를 바로 잡으며 불자다워지려고 노력하였다. 그리고 부처님 말씀을 몸소 실천하시는 보림 스님을 뵈면서 초파일 불자에서 벗어나고자 애를 써 보기도 했다. 또한 같은 공기를 마시던 국어교사이셨던 진공 스님의 관심과 배려 덕분에 충주 금봉산 석종사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혜국 큰 스님의 법문을 들을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다. 

이번 성지순례는 40년 교직 인생을 정리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은 행복한 시간이었다. 봉정암의 무한 에너지가 제2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힘찬 원동력이 될 것 같은 기대와 설렘, 그리고 새로운 희망이 생겼다. 이러한 소중한 기회를 마련해 주신 석종사 큰스님과 진명 스님, 불교대학 교수 스님들과 동행하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퇴직하면 진여원 성금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불교대학에서 같이 공부하는 민 선생님, 정 선생님이 흔쾌히 맡아주겠다고 해서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1488 / 2019년 5월 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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